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8

KBS 한국방송공사 창립

2022년 3월 3일은 공사창립 49주년이다. 오른쪽 사진은 공사창립식이 있던 날 임원과 사무관급 이상 간부들이 함께 한 사진으로 KBS사우회 사이버 박물관에 그 성함이 기재되어 있다. (전영효 회우제공) 1970년대 들어 KBS가 더 이상 국영방송으로 존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 1971년 공영방송의 꿈을 안은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이 취임하면서 공사추진이 급물살을 탔다. 최창봉 중앙방송국장 영입과 노정팔 방송관리국장 임명으로 실무진을 갖추어 공사창립 계획을 추진, 1972년 12월 30일, 한국방송공사법이 공포되었다. KBS 유 일봉 기획 조사실장과 민 두식 서무과장을 반장으로 8명의 실무반이 편성 된 것은 1973년 1월 10일경이었다. 실무 반은 공사 창립과 동시에 시행될 기본규정과 예산을 편성하..

그때 그 방송기술인들 1960-70년대

사우회 정근춘 회장께서 언젠가 저에게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아랫부분이 다 달아나버렸다”고 그러더군요. 보내 봐라 해서 살펴봤더니 아랫부분이 달아난 것이 아니고 이게 다 눈이에요. 길도 없는 눈밭을 개를 앞세워 장비를 싣고 가는 거죠. 고지의 송신소에 사고가 나면 인근의 10만 명이 TV를 못 보게 되요. 그러면 이렇게 짐을 싣고 가서 고쳤던 거죠.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이기에 다 그런 줄 알아요. 그래서 “세상에 이런 일 안 겪은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말하죠. “당신들이나 겪고 당신들이나 알지 그걸 누가 아냐.”고. 기억되어야 할, 한국방송의 역사니까요. KBS가 발행한 공영방송 제5호 (2015년 12월 30일) 「김동식의 마이크를 끄고」에서 필자와 인터부한 글 일부를 ..

KBS-TV개국 1961년 12월 31일

호출부호 HLCK, 영상출력 2Kw, 음향출력 1Kw, 채널 9로 대한민국 기간방송 KBS가 방송을 내 보낸 지, 12월 31일로 60년이 된다. 예산이 책정된 것도 아니고, 집지을 땅이 있었던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일국의 TV기간방송이 계획단계로부터 불과 5개월 만에 그 결실을 보아 방송을 내 보낸 것이다. 5.16으로 들어선 군사정부가 국민들에게 줄 큰 선물을 찾던 중, 그해 7월에 취임한 오재경 장관은 전직 공보실장시절부터 꿈이던 TV방송을 제안했고 그 안이 받아 들여져 때 마침 뜻밖에 마련된 20만 달러의 자금이 있었는지라, 그 재원을 바탕으로 TV방송은 추진되었다. 위 1번 사진을 제공한 임택근 아나운서는 ‘엄동설한에 부랴부랴 건축된 방송국이라 미쳐 잔손질이 안 되어 첫 방송을 할 때는 난방도 안..

남산방송시대의 개막 1957년 12월 10일

1957년 12월 10일 남산기슭에 KBS 새로운 방송사옥이 문을 열어 1976년 여의도로 옮기기까지 20년 가까운 세월 남산방송시대가 꽃을 피웠다. 일본침략의 마수가 뻗치면서 세워진 통감부로부터 1926년 경복궁 뜰에 마련된 건물로 옮기기 까지 이곳에 있었던 총독부 가 박물관, 과학관 등으로 쓰이다가 1956년 오재경 공보실장이 취임하면서 이곳에 KBS방송국 신축을 추진 1281평의 대지위에 1층 350평, 2층 347.5평, 3층 114.2평으로 된 현대식 방송국이 완공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들, 문화예술인, 외교사절 등 남산의 공개홀을 가득매운 가운데 준공식을 가졌고 날마다 진행된 각종 축하방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역사적인 남방방송시대를 연 것이다. 이를 계기로 1953년 8월 1..

KBS어린이 합창단과 작곡가 이수인

1947년 9월 배준호 프로듀서의 제안으로 창단된 KBS어린이 합창단! 길고 긴 세월! 한용희·박인채 등 명 프로듀서와 현재덕·정세문·안병원·박흥수·이은열·최 충·유병무·김규환·이수인 등 명작곡가들로 이어진 지휘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65년간 한동일·정명화·정경화 ·이규도·정명훈·조수미·신영옥 등 세계적인 예술가를 비롯해서, 2,500 여명의 단원을 배출하면서 세운 공이야 말로 필설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 중에서도 6.25때는 국민과 군의 사기를 높여주는데 큰 공헌을 했고 전쟁이 끝난 1954년 국민사절로 4개월간 백악관 연주를 비롯해서 미국 전역 순회공연으로 국위를 선양함과 동시에 많은 원조를 유치해서 국가재정에 큰 도움을 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88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 최..

방송기자 1호 문제안(文濟安)과 군정청 최초 연두기자회견

1946년 1월 16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연두기자(군정청)회견이 있었다. 1945년 8월 16일 해방되던 그 다음날 방송기자가 된 문제안의 귀중한 사진 속에 군정청 당국자들과 기자들이 함께 한 이 역사적인 사진이 있다. (1945년 11월 1일 신경-지금의 장춘-에서 활동 하던 조동훈이 기자로 오기 전 까지 KBS에는 문제안 기자 만 있었다. 문제안은 해방 전 날 밤 「同盟通信(도오메이 쯔우싱)」에서 해방소식을 취재 하던 중 헌병대에 감금당했고, 해방되던 다음날 아침 임시로 명명된 방송국이름 「SEOUL STATION」을 붓글씨로 써 걸기도 했다. 8월 15일 건국준비위원회 모습을 어느 매체보다도 앞서 취재한 주인공으로 첫 '대한독립만세'를 여기서 힘께 불렀다고 했다. 9월 8일 미군이 진주하던 ..

올림픽과 방송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태극기 깃발을 들고 첫 출전한 런던 올림픽 (1948년 7월 29일~8월14일)에서 민재호 아나운서의 첫 멘트 인사말, 그로부터 해외에서 실시되는 첫 아나운서 멘트는 의례히 이렇게 시작되었다. 17일간 열렸던 그 대회에 67명의 선수가 파견되었지만 아직 우리정부도 수립되지 않은 가난하던 나라에서 기술자도 없이 보조 아나운서도 없이 홀로 가 영국 BBC 협조를 얻어 단파방송으로 시행된 중계방송, 1주일에 두·세 번 15분에서 30분, 방송시간이 짧고 또 방송 상태가 안 좋아 방송이 어려웠던 날이 있었지만 그래도 국민들은 감격에 젖어 그 방송을 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나라 올림픽 중계방송, 그로부터 중계방송 없는 올림픽은 상상 할 수 없게 되었다. 1952년 올림..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22- 6.25 첫 방송 위진록 아나운서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 KBS;,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새벽 3·8선 전역에 걸쳐서 북한공산군이 전면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 하십시오. 우리국군이 건재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이하생략. 6.25 첫 방송이 나간 지 67년이 지나 2017년 6월 KBS스튜디오를 찾아 그때 그 뉴스를 재현했다. 위 왼쪽은 그때 촬영했고 오른쪽은 1951년 NHK 채널을 활용해 UN군 총사령부방송(VUNC)을 하던 때의 모습이다. (NHK는 UN관할 하에 있었음) 방송에서는 계속 뉴스를 내 보냈어도 시민들은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별거 아닐 거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3일도 채 안되어 서울이 함락 당했다. 3년 이상을 끌며..

최초의 TV방송국 KORCAD (호출부호 HLKZ) 와 설립자 황태영

1956년 5월 12일! 우리나라 TV방송역사의 기원이다. 세계에서 15번째로, 아세아에서는 필리핀과 일본, 태국에 이어 네 번째로 설립된 TV방송국 KORCAD-TV이었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 296번지 보신각 옆, 옛날 조선은행, 한일은행 건물로 썼던 동일빌딩에서 출력 100W, 채널 9(지금의 KBS1 채널) 서울 일원을 대상으로 한 방송, TV수상기 3,000대, 외환사정이 어렵던 시절, TV수상기 보급 정체 등으로 극심한 재정난을 겪다가 1957년 5월 7일 설립된 지 1년이 채 못 되어 한국일보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대한방송주식회사로 사명이 바뀌었다. 1959년 2월 2일 발생한 화재는 TV방송을 더 이상 이어갈 의욕을 상실 해버리고 말았다. AFKN의 시설을 빌려 겨우 이어가던 이 방송국은 ..

1947년 서윤복 보스턴마라톤 우승과 개선 중계방송

1947년 4월 19일, 보스턴에 울려 퍼진 서윤복 선수우승낭보! 그 우승의 감격을 안고 개선한 6월 22일! 방송과 신문은 모두 그 낭보로 채워지고 전 국민의 마음 하나가 되어 환호성을 올렸다. 세계 각 언론은 동양인의 기적이라는 빅뉴스로 이 소식을 전했고 선수들이 인천항을 입항 할 때 인산인해를 이루어 환영했다. 해방공간의 서울 한복판에 민족지도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환영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카퍼레이드를 벌렸고 환영대회를 열었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처음 출전한 국제 대회에서의 우승! 1936년 손기정선수의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에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 그때의 설음을 생각하며 KBS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는 더 우렁차게 더 멀리 울려 퍼져 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민재호·윤길구·윤용노·전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