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1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22- 6.25 첫 방송 위진록 아나운서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 KBS;,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새벽 3·8선 전역에 걸쳐서 북한공산군이 전면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 하십시오. 우리국군이 건재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이하생략. 6.25 첫 방송이 나간 지 67년이 지나 2017년 6월 KBS스튜디오를 찾아 그때 그 뉴스를 재현했다. 위 왼쪽은 그때 촬영했고 오른쪽은 1951년 NHK 채널을 활용해 UN군 총사령부방송(VUNC)을 하던 때의 모습이다. (NHK는 UN관할 하에 있었음) 방송에서는 계속 뉴스를 내 보냈어도 시민들은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별거 아닐 거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3일도 채 안되어 서울이 함락 당했다. 3년 이상을 끌며..

최초의 TV방송국 KORCAD (호출부호 HLKZ) 와 설립자 황태영

1956년 5월 12일! 우리나라 TV방송역사의 기원이다. 세계에서 15번째로, 아세아에서는 필리핀과 일본, 태국에 이어 네 번째로 설립된 TV방송국 KORCAD-TV이었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 296번지 보신각 옆, 옛날 조선은행, 한일은행 건물로 썼던 동일빌딩에서 출력 100W, 채널 9(지금의 KBS1 채널) 서울 일원을 대상으로 한 방송, TV수상기 3,000대, 외환사정이 어렵던 시절, TV수상기 보급 정체 등으로 극심한 재정난을 겪다가 1957년 5월 7일 설립된 지 1년이 채 못 되어 한국일보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대한방송주식회사로 사명이 바뀌었다. 1959년 2월 2일 발생한 화재는 TV방송을 더 이상 이어갈 의욕을 상실 해버리고 말았다. AFKN의 시설을 빌려 겨우 이어가던 이 방송국은 ..

1947년 서윤복 보스턴마라톤 우승과 개선 중계방송

1947년 4월 19일, 보스턴에 울려 퍼진 서윤복 선수우승낭보! 그 우승의 감격을 안고 개선한 6월 22일! 방송과 신문은 모두 그 낭보로 채워지고 전 국민의 마음 하나가 되어 환호성을 올렸다. 세계 각 언론은 동양인의 기적이라는 빅뉴스로 이 소식을 전했고 선수들이 인천항을 입항 할 때 인산인해를 이루어 환영했다. 해방공간의 서울 한복판에 민족지도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환영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카퍼레이드를 벌렸고 환영대회를 열었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처음 출전한 국제 대회에서의 우승! 1936년 손기정선수의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에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 그때의 설음을 생각하며 KBS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는 더 우렁차게 더 멀리 울려 퍼져 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민재호·윤길구·윤용노·전인국..

해방 후 첫 3·1절 기념행사와 중계방송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선생님이 소중하게 간직한 역사기록사진! 중계방송석이 식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날 촬영된 또 다른 사진 후면에는 다음 글이 쓰여 있다(원문대로 옮김). 檀紀 四二七九年 三月 一日- 二十七年만에 처음으로 마음노코 마지하는 國慶日 三一節! 이날아침 서울 鐘路의 임경이 울더니 午後 二時부터는 德壽宮 中和殿앞에서 흰저고리 검정치마 입은 朝鮮의 딸들이 三一節을 記念하는 「三一運動의 노래」 를 소리 높여 불으더라. 일제강점기에는 보신각의 관리가 허술했고 종소리도 물론 울리지 못했다. 해방의 날 1945년 8월 15일 울렸어야 할 보신각종을 그때도 미처 울리지 못했고 첫 3.1절 기념행사를 한 이날 정오 12시! KBS중계방송으로 울려 퍼진 민족대표 33인을 상징 하는 33번의..

일제강점기 조선어방송 역대 책임 보직인사

우리나라에서 방송국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27년 2월 16일이었지만 1932년 조선방송협회가 발족하고 二重放送이 실시되면서부터 사업부장 노창성, 제2방송과장 윤백남의 책임보직자 이름이 등재된다. 노창성은 처음부터 방송국설립에 참여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일약 사업부장이 되었고 尹白南 (Yoon, Baek-nam, 敎重)은 연극·영화·史話·레코드 제작 등 당대 문화예술계의 최고 반열에 있던 인사로 원래는 제2방송부장 예정으로 영입된 인사인데 제2방송부장 직제는 끝내 불발되어 제2방송과장으로 약 1년간 우리말 방송초석을 다졌다. 방송국 퇴직 후에도 방송출연 등 해방 후까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野談의 제1인자로 알려졌는데 그의 야담은 다른 분들의 옛날이야기와는 달리 史話라는 말로 표현되어 역사 이야기임..

미국의 소리방송 (VOA-Voice of America) 초기방송인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42년 2월 24일 발족한 VOA에서 한국어 방송을 시작한 것은 그해 8월 29일(국치일 32주년)로 1972년 KBS가 그 중계방송을 중단 할 때까지 우리나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VOA의 對일본 방송 적임인사로 지목된 유학생「황성수」는 한국에 살고 있던 가족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VOA근무를 승낙했다. 4년간 그 방송을 하던 중 1946년 외무부 정보국장으로 국내에 돌아와 국회부의장 등 요직을 지냈다. 1943년 JODK아나운서가 되어 홍일점으로 해방을 맞아 인기절정이었던「호기수」는 1947년 미국유학길에 올라 학생신분으로 VOA아나운서가 되어 1960년대까지 근무했다. 딸이 VOA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어머니가 공산군에게 납북당하..

방송 100년, 최초의 방송국 KDKA

2020년 11월 2일은 미국에서 방송을 시작한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크 웨스팅하우스(Westing House)사 빌딩 옥상에 텐트를 치고 100W출력으로 방송을 시작한 KDKA, 그때의 아나운서「알린」(Harold W.Arlin)은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방송국 개국과 함께 처음 내보낸 프로그램은 하딩과 콕스가 대결한 미국 제 29대 대통령 선거전의 개표 중개 방송이었고 하딩이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는 소식이 다음날 아침 신문이 배달되기도 전에 라디오를 통해서 전달되자 미국 국민들은 라디오 위력에 환호 했다. 그로부터 방송은 광고로 큰 수입을 올리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 매체로 등장, 1년도 채 안되어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산업이 되었고 1922년 말에 이르..

조선방송협회 보급형 라디오 1호

방송초기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 값이 보통사람들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싼 값이었다. 해드샛을 쓰고 한사람씩 들을 수 있는 「광석 라디오」는 쌀 세가마니 값을 주고 살 수 있었지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사용이 어려웠고 진공관 라디오는 쌀 20가마니 정도의 값을 주어야 했으며 미국제 좋은 라디오는 쌀 100가마니 값 이상을 주어야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서울에서 1Kw로 방송하던 시절이라 청취지역도 극히 제한적인데다가 한·일어를 동일채널에 편성하는 등 여러 사정으로 라디오가 보급되지 않으니 청취료 수입이 들어오지 않아 방송국 운영이 극도로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1932년 조선방송협회를 설립하고 출력증강·이중방송실시·지역방송 확장과 함께 방송국에서 라..

항일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 수형자 옥중사진

항일단파방송 海內·外 연락운동(이하 단파방송이라 함)이란 일제강점기 말 암흑시대에 미국·중국 등 해외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단파방송을 통해 국내에서 듣고 독립운동가 등에게 전파해서 독립운동의 기폭제로 삼았던 역사적인 지하 독립운동으로 방송사에 길이 남는다. 이 일로 방송인을 포함한 350여명이 경찰에 끌러가 갖은 고초를 겪었고 70여명이 실형을 받았으며 6명의 獄死者를 냈는데 그중 위 세 사람의 옥중사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보존되어 있다. 송진근은 방송국 직원들이 단파방송으로 들은 해외소식을 모아 송남헌 등에게 전한 사람으로 1930년대 이계원과 쌍벽을 이룬 인기 아나운서였고 송남헌은 방송국 아동작가로 활동하면서 방송국 직원들이 듣고 모은 해외소식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한 사람이다. 허헌은 민족변호사로 독립운..

경성방송국과 洪蘭坡 (永厚)

경성방송국 현대음악은 홍난파의 공로가 크고 그의 음악세계는 경성방송국을 통해 더욱 더 빛났다. 경성방송국 개국을 앞두고 그가 주동적으로 창설한 중앙악우회가 1927년 2월 16일 방송국 개국 기념공연을 가졌다. 이원수 작사 「고향의 봄」을 비롯해서 수많은 동요, 가곡이 경성방송국의 전파를 타며 전 국민들이 함께 부르기 시작해서 오늘까지도 국민적 노래로 자리매김 했으며. 미국의 재즈음악을 최초로 도입해서 경성방송국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1931년부터 33년까지 미국유학을 다녀와서는 홍성유·이영세와 함께 바이올린 트리오를 구성 경성방송국에 본격적으로 출연하면서 방송국에 홍난파 자리가 마련되어 1936년 우리나라 최초의 「경성방송국 교향악단」을 창설해서 운영하다가 1941년 8월 늑막염으로 세상을 떴다. 이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