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태극기 깃발을 들고 첫 출전한 런던 올림픽 (1948년 7월 29일~8월14일)에서 민재호 아나운서의 첫 멘트 인사말, 그로부터 해외에서 실시되는 첫 아나운서 멘트는 의례히 이렇게 시작되었다. 17일간 열렸던 그 대회에 67명의 선수가 파견되었지만 아직 우리정부도 수립되지 않은 가난하던 나라에서 기술자도 없이 보조 아나운서도 없이 홀로 가 영국 BBC 협조를 얻어 단파방송으로 시행된 중계방송, 1주일에 두·세 번 15분에서 30분, 방송시간이 짧고 또 방송 상태가 안 좋아 방송이 어려웠던 날이 있었지만 그래도 국민들은 감격에 젖어 그 방송을 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나라 올림픽 중계방송, 그로부터 중계방송 없는 올림픽은 상상 할 수 없게 되었다. 1952년 올림픽은 전쟁 중에 서명석 아나운서가 홀로 파견되어 중계방송에 임했고 1956년 멜버른올림픽 때 엔지니어가 참여 장기범·임택근·김성열이 중계방송에 임해서 이때부터 정상적인 올림픽 방송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어린 시절 학교 확성기를 통해서 송순천 선수(은메달) 경기 중계방송을 들은 기억이 있다. 1960년 로마대회 때는 임택근·이광재·김성배가 파견되었고, 1964년 일본 도쿄 올림 때부터 민방(MBC)이 올림픽 중계방송을 실시했다.
우리선수가 처음 출전한 올림픽은 1932년 LA에서 열린 10회 때로 마라톤의 김은배, 권태하, 권투의 황을선 선수가 파견되었다. 4억 인구의 중국이 단 한명의 선수를 파견 했을 때 세 명의 우리 선수가 파견되어 주미 교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는 가운데 마라톤과 권투에서 선전해서 6위 김은배, 권태하가 9위에 올라 마라톤의 기대를 부풀렸다. 다음 대회 1936년 독일 베를린 대회에서 손기정이 우승하고 남승룡이 3위에 입선 조선인의 기개를 만방에 떨쳤지만, 불행히도 이들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달렸었다. 당시 민족지들이 그 일장기를 제거한 사진을 게재했다가, 정간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태극기를 가승에 달고 맞은 첫 금메달은 1976년 멕시코 올림픽 때 양정모 선수이고 오늘날에는 올림픽 10위를 넘나드는 올림픽 강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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