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부호 HLCK, 영상출력 2Kw, 음향출력 1Kw, 채널 9로 대한민국 기간방송 KBS가 방송을 내 보낸 지, 12월 31일로 60년이 된다.
예산이 책정된 것도 아니고, 집지을 땅이 있었던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일국의 TV기간방송이 계획단계로부터 불과 5개월 만에 그 결실을 보아 방송을 내 보낸 것이다. 5.16으로 들어선 군사정부가 국민들에게 줄 큰 선물을 찾던 중, 그해 7월에 취임한 오재경 장관은 전직 공보실장시절부터 꿈이던 TV방송을 제안했고 그 안이 받아 들여져 때 마침 뜻밖에 마련된 20만 달러의 자금이 있었는지라, 그 재원을 바탕으로 TV방송은 추진되었다.
위 1번 사진을 제공한 임택근 아나운서는 ‘엄동설한에 부랴부랴 건축된 방송국이라 미쳐 잔손질이 안 되어 첫 방송을 할 때는 난방도 안 되었고 건물지붕도 채 안되어 천장으로 별빛이 보이고 추위로 입김이 서리는 가운데서 숯불을 피워놓고 텔레비전의 첫 방송을 내 목소리로 내 보내던 일이 수많은 추억 중에 잊지 못할 추억이다.’ 라고 했다. 12월 25일 성탄절까지 방송을 내 보내야 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10월부터 터를 다지고 집을 짓기 시작했으니 얼어붙는 시멘 콘크리트에 소금을 뿌리고 불을 피워 녹여가며 밤·낮 없는 공사를 진행했고, 기계는 10월부터 미국주문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급박하게 서둘렀으며 공사요원들에게는 얼마나 큰 고충이 있었겠는가? 지금의 시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더 어려운 것은 송신소 시설공사였다.
연희송신소에서 사용하던 75m 철탑을 옮겨 세우고 24개가 필요한 급전선 25개를 미국에서 급히 사 왔지만 두개만 잘못 되어도 공사는 큰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철탑 위에 12m길이, 1톤 반이나 되는 「수퍼턴 스타일 안테나」를 올리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그것이 무슨 문제 이겠느냐? 고 하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야말로 큰 과제였다.
만약 실패하면 허사가 되는 공사, 그것을 도르래를 이용해서(2번 사진) 철탑 위에 안착시켰다.(노정팔 저, 「한국방송과 50년」참조),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넘기며 급박하게 진행한 공사였다. 이렇게 해서 방송은 원래의 계획보다 1주일 늦은 12월 31일 오후 6시를 기해서 실시되었다. 정식 프로그램은 다음 해 1월 14일부터 편성되었고, 직제가 새로 마련되어 정식으로 기구가 발족된 것은 2월 5일부터였다. 그때의 TV수상기는 10,000대 정도 있었고 급히 수입을 추진해서 1963년에 가서야 3만대가 되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몇 만대이던 수상기는 1970년대 들어 백만 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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