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4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6 황우겸을 통해본 방송역사

「바보상자, KBS-TV 개국요원, 초대 아나운서실장으로 2년 반을 근무하면서 쓴 실화기록! 오늘에 보니, 이 책 외에는 그때의 기록이 별로 없어요. 이장춘씨가 받아서 활용하다가 길이 보존 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선배님이 떠나시기 바로 전 필자에게 두 개의 큰 상자에 일생동안 모은 자료를 담아 택배로 보내주시면서 저서 바보상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당부를 하셨다. (사진 1, 바보상자 저서를 들고 촬영한 저자)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공개모집으로 들어온 강찬선·임택근·이수열·정순향과 함께 입사, 명성을 떨쳤다. 특히 인천동산고등학교 대표선수로 그 시절 황금사자기 대회 등에서 경력을 쌓은 황 아나운서는 야구중계방송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동대문 운동장에서 야구중계방송 일정과 출산일이 겹쳤다. 병원에서는..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5- 8·15 광복의 날 방송국에선

1.이혜구(제2방송과장), 2.한덕봉(기사), 3. 이정섭(협회 기획과장) , 4. 박경호(협회 과장) , 5. 김억(편성원) , 6. 김진섭(편성원) , 7.이계원(아나운서), 8.송영호(편성원) 일제강점기 오랜 세월 우리말방송을 위해 힘을 기울였던 분들이다. 위 사진설명은 해방당시의 직책으로 해방직후 조선방송협회 (회장 이정섭·기술부장 한덕봉), 중앙방송국 (국장 이혜구·편성과장 김 억·기획과장 박경호·업무과장 김진섭·방송과장 이계원·편성계장 송영호(1947년 편성과장)등 직책을 맡아 해방정국방송을 이끌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참전하고 두만강을 건너 8월 13일 대 출력 청진방송국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14일 밤「해방소식이 들어온다.」 는 말에 이혜구 과장은 문제안 에게 「同盟通信에 가서 ..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4 스무고개로부터 재치문답까지

1, 부산피난시절의 스무고개(사회 장기범, 패널 노천명(여) 등) 2.환도 후 최초의 스무고개(사회 임택근, 패널 이덕근, 문제안, 이경희, 김복경, 노경래) 3.1966년 진해 재치문답을 마치고 (사회 장기범-1, 기술 고흥복-2-사진제공) 4.인기절정 시의 재치문답 제작·출연진(앞줄 왼쪽부터 문제안, 최계환, 장기범, 강소천, 박종민 : 뒷줄 한국남, 정희경, 이경희-사진제공, 윤길숙, 정연희, 안의섭) 「방송국에서 파면 된지 1년 만에 송영호 선배(편성과장) 강권으로 47년 7월 PD로 들어왔어요. 미국고문이 가져온 디스크를 검토하던 중 공개방송이 있어요. 처음 듣는 프로그램이지만 우리정서에 맞도록 잘 제작하면 좋을 것 같아 방송제목, 내용 등 다각도로 검토, 그해 8월 우리나라 최초의 공개방송 ‘..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3「이동 방송 차」->「이동방송국」->「TV 중계방송 차」

6.25전쟁발발 직후 목포방송국에서 세계방송역사에 유례가 없는 해상 이동방송이 실시되었다. 그로부터 육지에서도 여러 형태로 이동방송이 실시되던 중 1952년 이동방송차를 도입(사진 1, 고 신경석 속초 이동방송국장 제공) 전진하는 유엔군과 국군을 따라 옮겨 다니며 방송을 했다. 이 차는 원주에 국군전방사령부가 마련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이동방송을 하다가 동해안 북부의 어업 전진기지 속초에 고정, 「속초이동방송국」이 되었다. 1957년 두 대의 이동방송차가 도입되면서「이동방송국」이 편성되어 전국 순회이동방송을 실시했다. (사진 2, 국가기록원 제공) 이동방송 대상지역에 방송기간동안 라디오를 빌려주고 그 라디오 곁에 여러 사람이 모여 방송을 듣기도 하고 확성기로 방송을 중계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2「청실홍실」-멜로드라마의 기원

1956년 12월 2일, 이 땅에서 최초로 멜로드라마가 방송 된 날이다. 청취자들의 큰 호응을 받으며 다음해 4월 28일까지 30회가 방송, 공전의 대 히트 작으로 기록되었다. 1957년 정규 프로그램에 「산 너머 바다건너」일일연속극을 편성, 드라마 일일연속극 시대를 열었다. 1960년대 민영방송의 탄생과 더불어 라디오·TV방송의 주프로그램으로 자리 매김, 극장을 찾던 사람들이 TV에 시선을 돌려 극장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청실홍실」은 영화는 물론 TV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다. 이 드라마를 쓴 조남사는 1923년 충북 영동에서 출생, 일본 동경 전수대학 경제과를 중퇴했다. 1947년 KBS중앙방송국이 최초로 공모한「방송연기 연구생」 (뒷날 KBS 성우 특1기로 지칭)으로 방송국과 인연을 맺어 6..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1 제1기 성우의 탄생과 歷程

2015년 6월 10일, 「성우 60년 역정, 라디오 드라마 사」가 출판되고 오승룡, 김소원, 김수일, 고은정 등 1기 성우 들을 비롯한 수백 명의 대한민국 성우들이 KBS에 모여 이근욱 이사장 주관으로 기념회가 열렸다. 왼쪽 사진은 그날의 기념식 사진이고 오른쪽은 1957년 12월에 촬영한 1기 성우들이다. 앞에서 부터 윤미림, 이창환, 김옥경, 김소원(김연임), 박용기, 심영식, 고은정, 신원균, 김수일 (오승룡, 정동은, 은 이 사진 속에 없다) 방송극은 방송역사와 함께 있어왔지만 오랜 세월 연극, 영화배우들의 몫이었다. 해방 후 목소리 연기자를 양성 할 필요를 느끼면서「방송극연구원」을 선발했다. 1947년 : 조남사(작가, 연출가), 황정순(영화배우), 민구(연출가), 장민호 (연극·영화배우), ..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0-한국방송공사창립 비화

1948년 10월, 국영방송이 된 KBS는 1960년대 급격한 환경변화로 국영방송으로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1971년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이 취임, 1년 여 논의를 거치 1972년 12월 30일「한국방송공사법」이 확정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1973년 1월 10일경 공동팀장 유일봉 기획조사실장 · 민두식 서무과장을 비롯, 모두 10명으로 구성된 특별 팀이 발족되어 공사 출범과 동시에 시행될 기본규정과 예산 편성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필자에게는 본사 라디오 방송과 16개 전 지역 국의 예산을 편성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20여일에 걸쳐 그 임무를 완수했다. 그때 10분의 팀원은 대부분 고인이 되셨고 장용섭·김헌수·필자 세 사람 생존 해 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그날을 되돌아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것, 참으..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39 -첫 방송 터 유허비 遺墟碑

「1927년 2월 16일, 이 자리에서 한국의 방송전파가 처음으로 퍼져 나갔다. 비록 우리말을 끝내 지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가슴 깊이 감춘 채였으나, 여기서 비롯된 우리 방송 전파는 우리 손으로 우리 배달겨레를 위해서 힘차게 자라, 앞으로 한가람 푸른 물과 마뫼 (필자 주: 한강과 남산의 우리말) 높은 바위가 마르고 닳도록 겨레의 마음을 실어 하늘 높이 그리고 멀리 쏘아 올려야 한다. 그 뿌리를 잊지 않고 더욱 더 빛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 첫 방송 터에 비를 세워 오래 오래 기리고자 한다.」 1987년 9월 3일 방우회장 문시형 첫 방송 터 碑 후면, 동판에 건립을 위한 마음을 모은 분 122명의 성함과 함께 새겨진 글이다. 6.25로 첫 방송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터는 인근의 덕수초등학교와..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38 기독교방송(KY)탄생

1954년 12월 15일 오후 6시! 종로 2가 기독교회관 5층에 방송시설을 갖추어 연희송신소 출력 5Kw, 주파수 700Khz, CBS HLKY 첫 방송전파가 발사되었다. 오랜 세월 KBS단일방송에서 복수방송시대의 첫 문을 연 것이다. 미국 국적을 보유한 한국인이라고 불린 감의도 (디켐프-Edward Otto DeCamp)가 주축이 되고, 김재복 장노를 총괄책임자로해서, KBS 정규섭(엔지니어), 박화목(프로듀서), 이보라(연출가) 등을 책임자로 영입 개국했다. 선교를 주목적으로 한 방송, 첫날 4시간 30분의 개국특집으로 방송된 드라마와 성경공부, 축하음악회, 등은 방송의 성격을 잘 말해주었다. 창사 때부터 드라마에 역점을 두어 1955년의 대원군과, 1957년 한운사 작 “이 생명 다 하도록” 조남..

대한민국 최초 방송 종군기자 한영섭

現職「6.25 참전 종군기자회 회장」韓기자는 95세로 「흥남철수작전」을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산 증인이다. 1949년 2월 공개경쟁시험을 거쳐 KBS 중앙방송국 기자로 들어와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과 함께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국방부를 출입하게 되었다. 6.25가 터지자 방송이 전시체제로 바뀌어 전쟁터를 누비며 취재 활동을 수행했다. 1950년 11월 최전방의 적진을 무너뜨리며 북진하는 UN 한국군 수도사단의 종군기자로 같은 군 트럭에 타고 가던 병사가 적탄에 쓰러져 가는 상황을 체험하며, 자신의 生死를 가늠 할 수없는 속에서 최북단 청진 끼지 진격, 상황을 취재 보도했다. 북진 중 KBS 원산, 함흥, 청진방송국을 보호하며 그 방송시설의 단파방송을 통해 서울 중앙방송국으로 기사를 송고, 어느 종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