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9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1 제1기 성우의 탄생과 歷程

2015년 6월 10일, 「성우 60년 역정, 라디오 드라마 사」가 출판되고 오승룡, 김소원, 김수일, 고은정 등 1기 성우 들을 비롯한 수백 명의 대한민국 성우들이 KBS에 모여 이근욱 이사장 주관으로 기념회가 열렸다. 왼쪽 사진은 그날의 기념식 사진이고 오른쪽은 1957년 12월에 촬영한 1기 성우들이다. 앞에서 부터 윤미림, 이창환, 김옥경, 김소원(김연임), 박용기, 심영식, 고은정, 신원균, 김수일 (오승룡, 정동은, 은 이 사진 속에 없다) 방송극은 방송역사와 함께 있어왔지만 오랜 세월 연극, 영화배우들의 몫이었다. 해방 후 목소리 연기자를 양성 할 필요를 느끼면서「방송극연구원」을 선발했다. 1947년 : 조남사(작가, 연출가), 황정순(영화배우), 민구(연출가), 장민호 (연극·영화배우), ..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0-한국방송공사창립 비화

1948년 10월, 국영방송이 된 KBS는 1960년대 급격한 환경변화로 국영방송으로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1971년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이 취임, 1년 여 논의를 거치 1972년 12월 30일「한국방송공사법」이 확정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1973년 1월 10일경 공동팀장 유일봉 기획조사실장 · 민두식 서무과장을 비롯, 모두 10명으로 구성된 특별 팀이 발족되어 공사 출범과 동시에 시행될 기본규정과 예산 편성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필자에게는 본사 라디오 방송과 16개 전 지역 국의 예산을 편성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20여일에 걸쳐 그 임무를 완수했다. 그때 10분의 팀원은 대부분 고인이 되셨고 장용섭·김헌수·필자 세 사람 생존 해 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그날을 되돌아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것, 참으..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39 -첫 방송 터 유허비 遺墟碑

「1927년 2월 16일, 이 자리에서 한국의 방송전파가 처음으로 퍼져 나갔다. 비록 우리말을 끝내 지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가슴 깊이 감춘 채였으나, 여기서 비롯된 우리 방송 전파는 우리 손으로 우리 배달겨레를 위해서 힘차게 자라, 앞으로 한가람 푸른 물과 마뫼 (필자 주: 한강과 남산의 우리말) 높은 바위가 마르고 닳도록 겨레의 마음을 실어 하늘 높이 그리고 멀리 쏘아 올려야 한다. 그 뿌리를 잊지 않고 더욱 더 빛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 첫 방송 터에 비를 세워 오래 오래 기리고자 한다.」 1987년 9월 3일 방우회장 문시형 첫 방송 터 碑 후면, 동판에 건립을 위한 마음을 모은 분 122명의 성함과 함께 새겨진 글이다. 6.25로 첫 방송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터는 인근의 덕수초등학교와..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38 기독교방송(KY)탄생

1954년 12월 15일 오후 6시! 종로 2가 기독교회관 5층에 방송시설을 갖추어 연희송신소 출력 5Kw, 주파수 700Khz, CBS HLKY 첫 방송전파가 발사되었다. 오랜 세월 KBS단일방송에서 복수방송시대의 첫 문을 연 것이다. 미국 국적을 보유한 한국인이라고 불린 감의도 (디켐프-Edward Otto DeCamp)가 주축이 되고, 김재복 장노를 총괄책임자로해서, KBS 정규섭(엔지니어), 박화목(프로듀서), 이보라(연출가) 등을 책임자로 영입 개국했다. 선교를 주목적으로 한 방송, 첫날 4시간 30분의 개국특집으로 방송된 드라마와 성경공부, 축하음악회, 등은 방송의 성격을 잘 말해주었다. 창사 때부터 드라마에 역점을 두어 1955년의 대원군과, 1957년 한운사 작 “이 생명 다 하도록” 조남..

대한민국 최초 방송 종군기자 한영섭

現職「6.25 참전 종군기자회 회장」韓기자는 95세로 「흥남철수작전」을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산 증인이다. 1949년 2월 공개경쟁시험을 거쳐 KBS 중앙방송국 기자로 들어와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과 함께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국방부를 출입하게 되었다. 6.25가 터지자 방송이 전시체제로 바뀌어 전쟁터를 누비며 취재 활동을 수행했다. 1950년 11월 최전방의 적진을 무너뜨리며 북진하는 UN 한국군 수도사단의 종군기자로 같은 군 트럭에 타고 가던 병사가 적탄에 쓰러져 가는 상황을 체험하며, 자신의 生死를 가늠 할 수없는 속에서 최북단 청진 끼지 진격, 상황을 취재 보도했다. 북진 중 KBS 원산, 함흥, 청진방송국을 보호하며 그 방송시설의 단파방송을 통해 서울 중앙방송국으로 기사를 송고, 어느 종군기..

남산 방송철탑과 타워

1961년 KBS가 TV방송을 실시하면서 남산정상에 처음으로 철탑을 세운이래(본란 27호 참조) TBC, MBC가 TV방송을 실시하면서 이곳에 각기 철탑을 세웠다. MBC·TBC 개국주역 (고)정환옥이 1965년에 결성된 민간방송협회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남산에 모든 방송사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종합철탑건립안을 생각했고 1968년 방송사들이 힘을 모아 「한국 전파 탑 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뜻을 실천 해 나가기로 했다. KBS가 이 철탑을 활용 10Kw출력을 50Kw로 대폭 늘려 방송한 것은 1971년 8월로 이때부터 방송사들은 해발 479.7m, 동양에서 제일 높은 철탑에서 TV·FM 등을 송수신하게 된 것이다.(537m인「모스크바」탑에 이어 세계 2번째, 도오꾜오 타워는 3백33m). 이 타워는 전파..

호출부호 「HL」과 방송의 날

왼쪽은 1947년 10월 2일 최초로 방송마이크에 부착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呼出符號/Call Sign이고 오른쪽은 1964년 10월 2일 최초로 우리나라 국·민영 방송인들이 함께 만나 진명여고 3·1당에서 연 제1회 방송의 날 기념사진이다. 1947년 미국 애틀랜타 시에서 열린 國際無線通信會議-ITU에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무선호출부호가「HL」로 결정됨에 따라 대한민국 방송이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정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64년 10월 2일을 방송의 날로 정해서 해마다 행사를 해 오던 중 KBS 공영방송출범을 계기로 1974년 1월 결성된 「한국방송협회」가 주관하게 되었고 「한국방송대상」도 함께 시행되었다. 1978년 한국방송협회 총회 결정에 따라 9월3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

이승만 국회의장·방송인이 함께 한 헌법서명 기념사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헌법이 제정 공포되던 날 1948년 7월 17일, 이승만 국회의장과 이정섭 조선방송 협회장(우), 홍양명 중앙방송국장 (좌), 송영호 편성과장(뒤)이 함께 한 역사적인 사진이다. 엄복영 회우로부터 강원도 화진포 이승만 별장에 이 사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송현식 회우에게 전했더니 바로 보여주셨다. JODK 마지막 기획과장 이정섭은 해방 후 조선방송협회장(정부수립 후 대한방송협회장)으로 재직하다가 6.25때 납북되었다. 신경(장춘)에서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홍양명(洪陽明)은 군정청 초대 이혜구 방송국장에 이어 1947년 8월 15일 2대 중앙방송국장으로 취임 정부 수립 때까지 재직했고 6.25때 납북되었다. 1938년 아나운서로 입문한 송영호는 (송현식 회우 부친) 해방 후 ..

6.25 마지막 방송과 김현수 대령 순직

1950년 6월 27일 밤 9시 이후의 방송은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며 급박한 상황에 대전방송국에서 보내온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방송·전황·행진곡·애국 시 등으로 이어지다가 12시에 마치고 방송 거부 장치를 했다. 한강건너 영등포 우체국에서 방송 할 예정으로 비상 방송기기를 트럭에 싫고 새벽 2시 10분경 방송국을 출발했다. 2시30분경 한강교에 도달했으나, 이미 자동차가 한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름비가 내리는 칠흑 같은 밤, 자동차에서 내려 8명의 방송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한강교를 막 건넜을 때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울렸다. 그 폭음이 한강 폭파 음이었다는 것을 한 것은 뒷날이었다. 관악산을 넘어 안양에 도착해서 7시경 라디오 다이얼을 맞추니 뜻밖에도 행진곡이 방송..

동요의 기원 「반달」과 방송

2024년이면 우리나라에서 시험방송 전파가 발사 된지 100년임과 동시에 동요 100년을 맞는다. 이 땅에 방송과 동요는 시발점을 같이하고 방정환 선생님의 「어린이 운동」과도 맥을 같이한다. 방정환선생님이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정하고 색동회를 결성하면서(어린이 날 기원이 1923년이라고도 하는데 KBS에서 올해 어린이 날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어서 여기에 따름) 일본 유학중인 윤극영을 찾아 동요 제작과 색동회에 참여 해 주도록 부탁한다. 그로부터「반달」이 탄생하고 방정환 창간 「어린이」잡지에 실려 1924년10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때 어린 학생 이정숙의 목소리로 부른 반달을 사우회 사이버 박물관에서 들을 수 있다.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은 시험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