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62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4우리나라 「교향악단의 기원」

2024년 3월 29일 역사적인 KBS교향악단 800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이 교향악단은 90년을 거슬러 올라가 홍난파가 주축이 되어 1935년 4월 13일 JODK오케스트라 결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전에도 오케스트라라고 불리는 악단이 있었지만 실내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JODK오케스트라를 우리나라 교향악단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다. 30명 내외의 단원으로 방송국의 양악은 이때부터 그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다.1941년 홍난파가 세상을 뜨면서 계정식이 지휘를 맡고 악장으로 있던 김생려가 운영을 맡았지만 곧이어 제2차 대전이 일어나, 교향악단은 망가지고 관현악단 수준으로 운영되다가 해방되면서 아예 해체되고 민간이 운영하는 고려교향악단이 탄생했다. 이 악단은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10월 24일, ..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3, 어린이 공개방송 누가누가 잘하나 70년

KBS-2TV 매주 목요일 오후 4시면 어린이들의 발랄한 동작·동요와 함께 사회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가누가 잘하나........!」「1954년 시작된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의 어린이 전문 음악 프로그램동요와 함께 끼와 재능을 마음껏 뽐내는 어린이들의 '꿈의 무대'로 동요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추억의 동요 명곡부터 교과서 수록곡, 최신 동요까지 세상의 모든 동요를 소개하고, 함께 부른다. 또한 클래식, 국악, 뮤지컬, 팝 등 다양한 장르의 고품격 음악과 공연을 소개해 어린이들의 감성을 일깨우고 음악 전반에 대한 이해를 북돋운다.」KBS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이다. 「이번에는 .....!」하고, 사회자의 말이 시작되면 모두가 앞 다투어 손을 들며 저요, 저요. 를 외친다. 지명 받은 어린이는 혼신을 다..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2女路, 방송사상 최고의 시청률·화제작

1.영구·분이 결혼식 장면 O안 작가·연출 이남섭 (제공 고 김연진)2.영구(장욱제) 분이(태현실)의 극중 인물과 실제인물(제공 고 정규봉)3.여로 終放 기념 (제공 오승룡) 본명 장시권 張時權  1972년4월 3일부터 12월, 7시 반부터 50분까지, 일일연속극 211회가 방영되면서 온통 화제는 여로에 모아졌다. TV가 있는 집, 전파사, 다방, 만홧가게 등 TV를 볼 수 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갖가지 화제를 낳았다. 그 시간대면 시가지가 한산 할 정도였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70%가 여로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작품의 제목을 딴 상품과 상호가 생겨났고, 남자 주인공 ‘영구’는 바보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영구의 뛰어난 연기력에 분이의 일제 강점기로부터 5. 16후까지 20년간 격동기..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1 가수의 등용문 전속가수

KBS 전속가수는 해방된 나라에서 마땅히 부를 노래가 적었던 때 우리 정서에 맞는 노래를 보급하고 아울러 새로운 가수를 양성 하는데서 부터 비롯되었다. 박시춘·손목인을 단장으로 KBS 전속악단을 구성하고 편성과에 김영수, 유호. 두 작가가 임용되어 글·노래 가사를 썼다. 박시춘 손목인은 그 가사에 곡을 붙이면서 새로운 가수를 발굴하고 전속가수를 모집했다. 1947년 제1기 이예성, 김백희, 송민도, 원방현, 옥두옥, 이계운이 선발되고 1949년 제2기 금사향, 고대원등, 6.25가 일어나 주로 군 예대에서 활동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성악가 현인은 KBS 요청으로 「신라의 달밤」을 불러 대 히트! 뒷날까지도 국민가요로 애창되고 있다. 방송국이 서울로 돌아와 1955년 노래자랑을 시작하던 무렵 손석우, 송민..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0 방송(시험방송) 100년, 동요 100년

까치 까치설날은......., 푸른 하늘 은하수......, 윤극영으로부터 시작된 동요, 올해로 100년을 맞았다. 시험방송으로 부터 100년을 맞은 우리나라 방송은 그로부터 동요를 방송에 실으면서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었다. 경성방송국 개국 때부터 방송과 깊은 인연을 맺은 홍난파는 이원수의 시에 곡을 붙여 방송에 올리자 순식간에 전파 되었고 박태준은 최순애의 오빠생각에 곡을 붙여 방송에 올렸다. 멀리 떨어져 살던 둘은 그로부터 친분을 쌓아 부부가 되었다. 설날이면 제일 먼저 부르는 노래「설날」,지난 100년간 제일 많이 불린 노래 반달, 고향의 봄, 오빠생각, 우리의 소원은 통일, 동요로 시작 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한겨레가 언제 어디서든지 함께 부르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KBS어린이 합창단..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9 여의도 방송시대의 개막

1. 준공준비 중인 사옥 (사진제공 고 정규봉) 2. 준공 직후의 사옥 (2.3, 사진제공 송병현 회우) 3. 준공식을 마치고 박정희 대통령·홍경모 사장 등 4. 원래의 설계조감도(사진제공 지승표 회우) 1976년 12월 1일, 여의도 방송시대가 열렸다. 7개의 TV스튜디오, 19개의 라디오 스튜디오, 자동송출장치 등을 갖춘 현대식 청사! 여기에 1980년 방송통폐합으로 TBC사옥을 더하고 86아세안 게임과 88올림픽을 계기로 국제방송센터(IBC)와 대형 KBS홀을 지어 오늘날의 여의도 KBS가 되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이어오던 남산 청사가 비좁던 터에 1971년 3월 31일 연희송신소가 소래로 옮기면서 그 땅을 활용, 남산청사의 비좁음을 해소하려는데 서부터 비롯되었다. 문화공보부 시설 팀은(과장 ..

48 최장수 인기 프로그램 노래자랑

1.최초 공개방송 기념 (PD:김창구·사회:장기범)-이경희-제공 2.대한공론사 스튜디오 노래자랑, PD:송영수, 사회 임택근-제공 3.1962,전국 아마추어 톱 싱거 대회(3회) PD:송영수-제공 4.1967,파월용사 훈련장-춘천방송국-PD:이장춘, 사회:이공순 5.2003,광복절(평양)남·북 합동. 사회:송해, 박재헌-제공 「1955년 5월 27일 동화백화점 4층! 방송사상 최초의 노래자랑 공개 방송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몇 차례 예고방송을 하고 나니 당일 동화백화점에는 출연자와 방청자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너무 사람이 많이 들어와서 출입문을 다치고 나니 유리를 깨고 다친 문을 부수고 노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속수무책이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어 공개방송을 진행하기 어려웠지만 첫 약속을 어길 수..

47 최초의 국제방송행사 제5차 ABC총회(ABU전신) 1963년

사진 : 1. 제5차 ABC총회 회의장(사진제공 故 유병은), 2. 남양송신소 방문 3 제4차 총회 우리 측 대표(윤태로·유병은) 4. 2012년부터 ABU회장 김인규 KBS사장(사진제공 박재헌) 1963년 9월 28일 우리나라 방송사상 최초로 국제방송행사 ABC(Asian Broadcaster Conforence)총회가 서울 조선호텔에서 막을 올렸다. 국제방송행사가 우리나라에서도 열려야 된다는 오재경 공보부장관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1962년 제4차 대회에 대표(유병은·윤태로) 를 파견 그 뜻을 이루어 5차 총회는 정부차원의 큰 행사로 치러졌다. 6일간에 걸쳐 열린 이 회의에서 ABC를 발전적으로 해체, 아메리카·유럽과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는 ABU(The Asia-Pacific Broadcasti..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6 황우겸을 통해본 방송역사

「바보상자, KBS-TV 개국요원, 초대 아나운서실장으로 2년 반을 근무하면서 쓴 실화기록! 오늘에 보니, 이 책 외에는 그때의 기록이 별로 없어요. 이장춘씨가 받아서 활용하다가 길이 보존 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선배님이 떠나시기 바로 전 필자에게 두 개의 큰 상자에 일생동안 모은 자료를 담아 택배로 보내주시면서 저서 바보상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당부를 하셨다. (사진 1, 바보상자 저서를 들고 촬영한 저자)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공개모집으로 들어온 강찬선·임택근·이수열·정순향과 함께 입사, 명성을 떨쳤다. 특히 인천동산고등학교 대표선수로 그 시절 황금사자기 대회 등에서 경력을 쌓은 황 아나운서는 야구중계방송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동대문 운동장에서 야구중계방송 일정과 출산일이 겹쳤다. 병원에서는..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5- 8·15 광복의 날 방송국에선

1.이혜구(제2방송과장), 2.한덕봉(기사), 3. 이정섭(협회 기획과장) , 4. 박경호(협회 과장) , 5. 김억(편성원) , 6. 김진섭(편성원) , 7.이계원(아나운서), 8.송영호(편성원) 일제강점기 오랜 세월 우리말방송을 위해 힘을 기울였던 분들이다. 위 사진설명은 해방당시의 직책으로 해방직후 조선방송협회 (회장 이정섭·기술부장 한덕봉), 중앙방송국 (국장 이혜구·편성과장 김 억·기획과장 박경호·업무과장 김진섭·방송과장 이계원·편성계장 송영호(1947년 편성과장)등 직책을 맡아 해방정국방송을 이끌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참전하고 두만강을 건너 8월 13일 대 출력 청진방송국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14일 밤「해방소식이 들어온다.」 는 말에 이혜구 과장은 문제안 에게 「同盟通信에 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