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8

일제 강점기 방송인 지하 독립운동 목숨 건 短波放送 海內·外 連絡

사진 설명1. 단파방송 연락 계통도2. 옥중 사진 : 송진근, 허헌, 송남헌3. 勿忘碑 제막기념 사진4. 勿忘碑 제막5. 물망비의 의미 (동판)6. 73회 순국선열의 날 애족장 수상 이근창 이 글은 2024년 7월호에 발행된 문화회보 통권 제 77호에 실린 글입니다. 「미국에서 단파방송으로 들려오는 이승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피가 끓어오르고 정규방송대신 이 방송을 중계방송 하고 싶은 생각이 지배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고 성기석이 쓴 효암행장기에서 인용한 글이다. 「단파방송 수신사건」· 「단파방송 밀청사건」방송인을 비롯한 관련자 350여명이 경찰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받으며 조사가 이루어지고 6명의 獄死者를 포함 75명 이상이 형을 살았던 이 운동은 일제강점기 말 「조선어학회 사건」과 함께 가장..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9 강영숙 아나운서

1.새해 새아침 첫인사 방송 1956년2.KBS 아나운서 언파레이드를 마치고3.KBS-TV 「누가, 누가 잘하나」첫 사회 1965년4.최초 여성 스포츠 중계방송 1964년 도쿄 올림픽 5.여성 방송인회 결성(회장) 청와대 방문 1967년6.서울시 문화상 수상 1968년7.「禮智院」 개원(원장) 1974년   「누가, 누가 잘하나」 어린이 공개방송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그 시대를 사시던 분들은 강영숙을 그렇게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영숙은 시사뉴스·교양·대북방송 등 방송 전 분야에 걸쳐 능수능란했다. 어린이 방송에서 간지러울 정도의 따스하고 달콤함을, 대북방송이나 뉴스해설에서는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강영숙이다. 이 강영숙 아나운서가 2024년 9월 11일 향년 ..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8 방송문화상 -> 한국방송대상

1.제1회 방송문화상 수상자 (좌로부터 한갑수·최요안·성경린·장민호·이종훈·장기범)2.방송문화상 시상식 (고 박상진 제공)3.한국방송대상(최초의)시상식(대한민국 방송 상 4회) (고 유병은 제공)4.제38회 한국방송대상 시상5.특별공로상 수상자 (홍두표·안국정·여운계) 올 61회 방송의 날을 계기로 51회 한국방송대상 시상식이 있다.한국방송대상이 시행되기 전 최초의 방송인 대상 연례행사로, 방송문화상 시상식이 1958년 8월 16일 남산 연주소 제1스튜디오(공개홀)에서 있은 후 1968년까지 시행되었다. 교양, 문화, 음악, 보도, 연기, 기술 등 각 분야별로 연간 6-7명을 선발 시상하면서 방송계의 큰 행사로 치러졌다. 조풍연·이흥열·장기범·김희창·복혜숙·성기석·장사훈·김영수·이혜경·이인관·임택근·조남..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7방송 할머니 卜惠淑(복馬利)

사진설명1. 시험방송 시절(1925년) : 방송극 출연2. 정동 시절(1956년) 우상 방송출연(서월영과), 좌하 방송인들과3. 남산 시절(1958년) 방송드라마 출연 4. 성우 언파레이드를 마치고, 1957년   「내가 연극이며, 영화에 데뷔 하던 시절, 우리나라에는 첫 방송이 시작되고 있었다.나는 그 시험방송에서부터 참여 해 내 딴에는 최초의 레코드 취입 최초의 방송출연 기록을 세웠다」1981년 5월 13일 동아일보에 실린 「나의 交遊錄」 시작 말이다. 1904년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1925년 시험방송시절 최초의 방송극「새벽종」출연으로부터 1981년까지(1982년 10월 5일 사망) 라디오 방송·가수·연극·영화·TV탤런트 등 그의 행적과 그가 남긴 기록은 이 나라 방송사에서 매우 중시되..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6-KBS 순직방송인 1호 이성실(기술)

1. 이성실과 묘비 문2. 장례식 추도 장면(중앙방송국장 노창성)3. KBS 동료 직원들 묘소참배(사망 1년 후)4. 이성실 마지막 모습(1951년 3월 10일, 제주방송국 500W 출력증강 송신기 설치) 「마지막 1초까지 나리위해 바친 / 순직청년 李成實이 여기 누었다.송신기를 고치던 손이 감전돼 / 스물 세살이 꽃봉오리 모양 꺾였다.자유의 소리 大韓과 함께 영원히 있을 그대 / 동지들의 꽃다발을 안고 고이 쉬시라. 」 단기 四二八五년 칠월 일동료직원이자 시인 노천명의 글로 새겨진 이성실의 묘비 글이다. 당시 이성실의 부산일보 訃告 원문을 옮긴다. 本局 局員 李成實技士는 단기 4284년 7월 29일 오후 6시 15분 순직하였기에 玆以訃告공보처 방송국장 盧昌成, -중략- 장지 釜山市 共同墓地/葬儀위원장 ..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5, KBS 사우회 35년 걸어온 길

1.동우회 해산·사우회 창립총회 (1888년 12월 19일, 회장 최창봉)2.창립총회를 마치고 본사방문(원안 : 임원진 이인관·최창봉·노정팔 KBS이사장·조돈준·김성배) 3.2005년 8월 수원 연수원에서 컴퓨터 교실을 마치고(1회 20명씩 3회 시행되었다.)4.강원도 정선 문화재 탐방·탐석여행 2006년 5월(창립 기념일을 앞두고 많은 회원참석)5.처음 열린 사우회 창립일 기념행사(2006년 6월 1일)6. 사우회 30주년 기념식장(2019년)7.여성위원회 창립(2015년 9월 18일) 2006년 6월 1일, KBS 사우회가 법적으로 탄생한지 17년이 되어 첫 기념행사를 가졌다. 그로부터 또 18년이 지난 오늘, 창립 35회를 맞아 3,000여 회원을 거느린 언론사 퇴직사원 최대 결사체가 되었다. 19..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4우리나라 「교향악단의 기원」

2024년 3월 29일 역사적인 KBS교향악단 800회 정기 연주회가 열렸다.이 교향악단은 90년을 거슬러 올라가 홍난파가 주축이 되어 1935년 4월 13일 JODK오케스트라 결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전에도 오케스트라라고 불리는 악단이 있었지만 실내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JODK오케스트라를 우리나라 교향악단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다. 30명 내외의 단원으로 방송국의 양악은 이때부터 그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다.1941년 홍난파가 세상을 뜨면서 계정식이 지휘를 맡고 악장으로 있던 김생려가 운영을 맡았지만 곧이어 제2차 대전이 일어나, 교향악단은 망가지고 관현악단 수준으로 운영되다가 해방되면서 아예 해체되고 민간이 운영하는 고려교향악단이 탄생했다. 이 악단은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10월 24일, ..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3, 어린이 공개방송 누가누가 잘하나 70년

KBS-2TV 매주 목요일 오후 4시면 어린이들의 발랄한 동작·동요와 함께 사회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가누가 잘하나........!」「1954년 시작된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의 어린이 전문 음악 프로그램동요와 함께 끼와 재능을 마음껏 뽐내는 어린이들의 '꿈의 무대'로 동요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추억의 동요 명곡부터 교과서 수록곡, 최신 동요까지 세상의 모든 동요를 소개하고, 함께 부른다. 또한 클래식, 국악, 뮤지컬, 팝 등 다양한 장르의 고품격 음악과 공연을 소개해 어린이들의 감성을 일깨우고 음악 전반에 대한 이해를 북돋운다.」KBS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이다. 「이번에는 .....!」하고, 사회자의 말이 시작되면 모두가 앞 다투어 손을 들며 저요, 저요. 를 외친다. 지명 받은 어린이는 혼신을 다..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2女路, 방송사상 최고의 시청률·화제작

1.영구·분이 결혼식 장면 O안 작가·연출 이남섭 (제공 고 김연진)2.영구(장욱제) 분이(태현실)의 극중 인물과 실제인물(제공 고 정규봉)3.여로 終放 기념 (제공 오승룡) 본명 장시권 張時權  1972년4월 3일부터 12월, 7시 반부터 50분까지, 일일연속극 211회가 방영되면서 온통 화제는 여로에 모아졌다. TV가 있는 집, 전파사, 다방, 만홧가게 등 TV를 볼 수 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갖가지 화제를 낳았다. 그 시간대면 시가지가 한산 할 정도였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70%가 여로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작품의 제목을 딴 상품과 상호가 생겨났고, 남자 주인공 ‘영구’는 바보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영구의 뛰어난 연기력에 분이의 일제 강점기로부터 5. 16후까지 20년간 격동기..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51 가수의 등용문 전속가수

KBS 전속가수는 해방된 나라에서 마땅히 부를 노래가 적었던 때 우리 정서에 맞는 노래를 보급하고 아울러 새로운 가수를 양성 하는데서 부터 비롯되었다. 박시춘·손목인을 단장으로 KBS 전속악단을 구성하고 편성과에 김영수, 유호. 두 작가가 임용되어 글·노래 가사를 썼다. 박시춘 손목인은 그 가사에 곡을 붙이면서 새로운 가수를 발굴하고 전속가수를 모집했다. 1947년 제1기 이예성, 김백희, 송민도, 원방현, 옥두옥, 이계운이 선발되고 1949년 제2기 금사향, 고대원등, 6.25가 일어나 주로 군 예대에서 활동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성악가 현인은 KBS 요청으로 「신라의 달밤」을 불러 대 히트! 뒷날까지도 국민가요로 애창되고 있다. 방송국이 서울로 돌아와 1955년 노래자랑을 시작하던 무렵 손석우, 송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