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일제 강점기 방송인 지하 독립운동 목숨 건 短波放送 海內·外 連絡

이장춘 2024. 9. 16. 12:54

 

사진 설명

1. 단파방송 연락 계통도

2. 옥중 사진 : 송진근, 허헌, 송남헌

3. 勿忘碑 제막기념 사진

4. 勿忘碑 제막

5. 물망비의 의미 (동판)

6. 73회 순국선열의 날 애족장 수상 이근창

 

이 글은 2024년 7월호에 발행된 문화회보 통권 제 77호에 실린 글입니다.

 

「미국에서 단파방송으로 들려오는 이승만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피가 끓어오르고 정규방송대신 이 방송을 중계방송 하고 싶은 생각이 지배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고 성기석이 쓴 효암행장기에서 인용한 글이다.

「단파방송 수신사건」· 「단파방송 밀청사건」방송인을 비롯한 관련자 350여명이 경찰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받으며 조사가 이루어지고 6명의 獄死者를 포함 75명 이상이 형을 살았던 이 운동은 일제강점기 말 「조선어학회 사건」과 함께 가장 큰 지하 독립운동으로 일컬어진다.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동아일보 등 모든 민족지는 폐간되고 외국방송을 들을 수 있는 단파수신기는 모두 몰수되었으며 외국과 연락이 되는 선교사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은 퇴거명령을 받고 우리나라를 떠났다. 그야말로 세상은 일본인들이 말하는 것 외에는 알 길이 없었다. 지하에서 나마 근근이 이어가던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도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암흑세계가 된 것이다.

이때 단파방송을 타고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가 있었다. 미국의 소리(VOA) 나 중국 중경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세계정세를 제대로 알려주는 방송이었다.

그러나 이 방송은 단파수신기를 갖은 사람만이 들을 수 있었고. 또 이 방송을 듣다가 걸리는 경우 목숨을 내 놓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송국에는 단파수신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들이 있었고 몰수된 단파수신기가 있었다. 방송인들은 이 수신기를 통해 목숨을 걸고 몰래 몰래 외국의 방송을 듣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았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챈 독립 운동가들은 극비리에 방송국과 연락채널을 갖고 그 소식을 받아 독립운동의 기초자료로 삼아 독립운동을 전개 해 나갔다. 그러자 국내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소문들이 퍼져나갔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일방적인 선전이 무력화되면서 위기를 느낀 인본경찰은 그 진원지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방송국에 의심의 눈길을 돌려 수사력을 집중시켰다. 이리하여 1942년 12월 이 일이 탄로 나기 시작하면서 방송인들을 채포, 고문 등을 통해서 관련자들을 알아내기 시작했다. 끌려가면 무소식이다. 갖은 고문이 이루어지고 또 고문을 통해서 새로운 관련자들을 찾아내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수사는 확대되었다.

방송국뿐만 아니라 각계각층 의심 될 만한 사람들은 모두 끌려가 고문을 받고 형을 받았다. 변호사 등이 입회 할리 없었고 가족들에게 마저도 알려주지 않은 체 극비리에 고문 수사기 이루어졌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고 박용신 옹은 「감옥생활은 호텔이었다. 구치소 있는 동안의 고문이란 차라리 죽음보다 더 한 것이었다.」라고 했다.

이런 지독한 고문으로 6명이 옥사를 한 것이다. 「옥사자 명단 : 이이덕, 경성방송국 기술부 엔지니어, 이근창, 경성방송국 보수과 기술자 (애족장 수훈) 김중웅 형제 중 동생(이름 미상), 경성방송국 기술부 엔지니어, 홍익범 전 동아일보 정치부기자 (애족장 수훈)

문석준, 조선일보 영업국장, 경기현, 의사)」

수형자 중 홍익범(동아일보 전 기자), 송남헌(아동문학가) 등은 공소장에 방송국 직원으로 표기 되어있지만 이것은 방송국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축소하기 위해 일부러 위장한 것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단편적으로만 전해오던 이 일은 1980년대 들어 (사) 방우회와 유병은선생 노력으로 정리되고 세미나 등을 거쳐 「抗日短波放送 海內 · 外 連絡運動」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 일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의 勿忘碑를 KBS 안에 세워 1991년 9월 9일 제막식을 갖고 해마다 방송인 들이 만나 그 일을 기린다. (제막식과 그날의 기념사진) 이에 앞서 독립운동 선열 3분을 추천해서 1990년 8.15 광복절에 성기석·조종국·홍익범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그 뒤로도 이준순·박용신·조성국·김필상·김동하·이근창·송진근·염준모 등에게 상훈이 수여되었다.

필자는 이 운동에 관해 글을 쓰면서 많은 분들과 얘기를 나누었고 애국자 이근창이 옥사한 것을 알고 있는 이종익 옹이 4년여에 걸쳐 상훈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면서 저를 찾아왔을 때 관련 서류를 갖추어 당국에 제출 2012년 11월 17일 제73회 순국선열의 날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일과 KBS가 그날 행사를 중계방송 할 수 있도록 건의한 일(종합뉴스에도 큰 비중으로 방송), 2007년 3·1절을 계기로 KBS와 방우회가 협력해서 한 시간 동안 방송된 다큐멘터리「잊혀진 독립운동」을 잊을 수가 없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지만 요즈음은 자료들이 많아졌다.

춘하추동방송 블로그에도 40여편의 글·동영상 등이 있다.

 

관련자료 목록

 

1. 단파방송 연락운동 유병은 저

2. 단파사건 재판기록 유병은 모음-KBS수장고

3. 성기석 효암행장기

4. 단파방송 해외 연락사건 (1988년 6월 3일)

-사단법인 방우회 주최 방송 토론회 종합보고서 -세미나-

5. 대일 항쟁기 단파방송사건" 2008년 말 국사편찬위원회 간(일어판)

6. 이 인 저 애산여적,

7. 허헌 연구

8. 송남헌 회고록

9. 잊혀진 지하 독립운동 : 2007년 3.1절 KBS특집 다큐멘터리(1시간)

10. 단파사건의 당사자 박용신의 증언 (2005년 건국포장 수훈자)

11. 국가 보훈처 발행 독립운동사 : 제4권 제4편 제1장 제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