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40-한국방송공사창립 비화

이장춘 2023. 5. 28. 13:19

 

1. 초대사장 홍경모, 2.현판식을 마친 윤주영 장관, 홍경모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 3.간부 임명장 수여(제공 전영효 회우), 4·5. 공사창립 홍보 ID(제공 고 정규봉)

 

1948년 10월, 국영방송이 된 KBS는 1960년대 급격한 환경변화로 국영방송으로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1971년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이 취임, 1년 여 논의를 거치 1972년 12월 30일「한국방송공사법」이 확정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1973년 1월 10일경 공동팀장 유일봉 기획조사실장 · 민두식 서무과장을 비롯, 모두 10명으로 구성된 특별 팀이 발족되어 공사 출범과 동시에 시행될 기본규정과 예산 편성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필자에게는 본사 라디오 방송과 16개 전 지역 국의 예산을 편성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20여일에 걸쳐 그 임무를 완수했다.

그때 10분의 팀원은 대부분 고인이 되셨고 장용섭·김헌수·필자 세 사람 생존 해 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그날을 되돌아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것,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2월 21일 홍경모 사장, 최창봉 부사장, 노정팔 감사, 조돈준, 이인관, 강찬선 이사가 임명되어 첫 임원진이 구성되었다.

1월, 공사법 시행령이 공포되고 정관은 이사회를 거쳐 2월 24일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공사 창립 일을 3월 1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3·1절 공휴일과 일요일을 지나 3월 3일로 결정되어 역사적인 한국방송공사 창립행사가 있었다.

 

공사창립 팀에서 마련한 직제 등 기본규정이나 예산이 이사회를 거쳐 문화공보부장관의 승인을 받은 것은 3월 9일로 이후 공사 직원 인사 발령이 이루어졌다.

사장을 제외한 네 분의 이사에게 직제에 따라 방송총국장 최창봉 (부사장 겸직) 기술총국장 이인관, 경영총국장 조돈준, 연수소장 강찬선 이사로 보직이 부여되었다.

직원직급은 공무원 직급을 기준으로 본사의 경우 국장은 부이사관, 서기관 중에서 임명하되 부이사관은 1급 갑, 서기관은 1급 을이 부여되었다. 부장은 서기관이나 사무관 중에서, 서기관은 2급 갑, 사무관은 2급 갑과 대부분 2급을 직급이 부여되었다.

 

차장은 사무관, 주사 (4급 갑 상당)중에서 사무관출신은 2급 乙, 주사 출신은 3급이 부여 되었다. 지역국은 부산만 부이사관으로 1급 갑, 나머지 7개 甲地 국은 서기관으로 2급 갑이 부여 되었다.

甲地국 방송부장은 대부분 주사로 3급, 기술부장은 기좌로 2급을, 乙地 국장 사무관은 2급 을 직급이 부여 됐다. 3월 말까지 간부 발령이 끝났고 4월, 일반 사원 발령이 있었는데 존속하는 부서는 현직발령을 원칙으로 했고 직급은 대부분 한 등급씩 올려서 부여 했으나 공사전의 직급을 그대로 이어 받은 직원도 있었다.

 

필자는 4월 1일자로 수원 출장소장 (차장급)으로 갔다가 같은 해 7월 사장직속 기획관리실이 신설되면서 관리부 차장을 맡아 법령, 사규, 정원, 지역방송국, 이사회, 계열사 업무를 담당했다.

공사체제 하에서 방송을 효율적으로 수행 할 수 있도록 제도의 틀을 짜 나가야 했다.

법규의 제·개정, 정원책정, 도 단위 방송 체제 구축, 중계소 방송 현실화, (정원책정 한지 사원 화), 사용 중인 국·공유지 정리 등 어려웠던 일들이 많았다.

전 지역 방송국이나 송 중계소까지 현장조사가 이루어 졌고 각 부서의 의견이 수렴되어야 해서 여러 위원회를 구성 수시로 부서장 회의가 열렸다.

 

기억을 더듬어 하나의 실 얘를 들어본다.

국영방송 시절 제작비 지급은 출연자를 급별로 분류하고 예산 범위 내에서 출연료를 책정 지급했지만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필자는 10년간 방송 현업을 하면서 제작비와 출장여비, 업무추진비 등 현실과 괴리된 여러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국영방송 시절에는 그 어려움을 주로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서 해결 해 나갔다. 그러나 공사 체제에서는 달라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제작비 지급규정을 합리적인 방향으로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마련 해 나갔다.

 

행정을 담당 하던 분 가운데는 너무 파격적이라고 하는 분도 계셨지만 최창봉 부사장님께서 관리부 안에 기꺼이 동의 해 주셨고 현업 쪽에서는 관리부 안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남은 문제가 있었다, 특집 제작이나 틀별 인사를 초청 하는 등 특수한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 해결이 어려워 이사회에서 설명 했더니 홍경모 사장께서 사장 별도결재를 맡아서 하도록 제안 하시어 그대로 의결되었다. 그 뒤에 그 조항의 남발로 행정 쪽에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제도상 공사의 틀이 잡혀가던 1974년 2월 인사규정을 개정하면서 마지막 진통이 있었다. 60세·58세로 되어있던 차장급 이상의 간부정년을 55세로 하고 55세로 되어있던 일반직원들의 정년을 53세로 낮추는 것이었다. (공무원시절 사무관급 이상의 정년은 60세였음)

 

공사발족 때 간부들이 공무원으로 남기를 원했던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혹시라도 이런 경우가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공사창립 1년도 안되어 이러한 결과가 왔다며 한숨짓는 간부들도 있었다.

2월 10일경 이사회에서 인사규정을 최종 의결 하던 날 공사창립이래 처음으로 비밀표결에 부쳐 4:1로 가결되었다. 2월 20일경 지역방송국장과 방송부장 본사 부장급 이상의 합동연석회의가 본사 스카이라운지 회의실에서 열렸다. 새해도 되고 해서 열린 회의였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어둡기만 했다.

3월 1일자로 인사규정이 시행되면 옷을 벗어야 하는 사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지방방송국장은 회의 도중 발언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평생직장을 이렇게 끝내야 하느냐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공사 창립 1년을 맞아 3월 1일자 대폭적인 인사 발령이 있었다. 이 인사에서 3급이던 지역 방송부장이 모두 2급 을의 직급을 받는 등 균형을 잃은 인사발령이라는 비평 속에 이때의 인사로 인해서 전 직원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차장급 이상 전 임직원이 제 1 연주실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홍경모 사장은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는 다는 전제하에 격의 없는 얘기를 해 보자고 했지만 이 일이 있고난 뒤에도 불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공사의 틀이 잡혀 갈 무렵의 마지막 진통이었다.

 

공사창립 1년이 지나면서 공사의 틀은 잡혀갔고 사규도 마무리되어 社規集 발간에 들어갔다. 약 3개월간에 걸쳐 인쇄를 마친 한국방송공사 최초의 사규 집은 그해 6월 말까지 배포되었다.

 

공사 창립당시 어렵던 일을 어렵다 하지 않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밤을 새우며 업무 처리에 열중했던 그때 관리부의 구성원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며 공사의 틀을 마련해서 사규집이라는 거대한 문서 책자에 담아 공사 업무처리의 기본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 자랑스러움을 그때 고생했던 전옥배 부장님 (텔레비전국장, 편성국장, 기획관리실장 역임) 을 비롯해서 김형준(부사장 역임), 이영철 (경영본부장 역임), 손 춘식, 권 의철님 등과 함께 영원히 간직코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