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혜구(제2방송과장), 2.한덕봉(기사), 3. 이정섭(협회 기획과장) , 4. 박경호(협회 과장) , 5. 김억(편성원) , 6. 김진섭(편성원) , 7.이계원(아나운서), 8.송영호(편성원)
일제강점기 오랜 세월 우리말방송을 위해 힘을 기울였던 분들이다. 위 사진설명은 해방당시의 직책으로 해방직후 조선방송협회 (회장 이정섭·기술부장 한덕봉), 중앙방송국 (국장 이혜구·편성과장 김 억·기획과장 박경호·업무과장 김진섭·방송과장 이계원·편성계장 송영호(1947년 편성과장)등 직책을 맡아 해방정국방송을 이끌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참전하고 두만강을 건너 8월 13일 대 출력 청진방송국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14일 밤「해방소식이 들어온다.」 는 말에 이혜구 과장은 문제안 에게 「同盟通信에 가서 본문을 받아오라.」고 했다. 이곳 편집실서 기다리던 중 저녁 8시40분쯤 헌병대에서 지금까지 들어온 내용을 모두 불태우라’는 전화가 오더니, 곧 헌병들이 들이닥쳐. 기자들을 감금 12시쯤에 풀려났지만 항복방송 원문을 입수하는데 는 실패했다.
15일 아침 윤용로 아나운서가 "同盟通信"에서 천황 항복문서 원고를 받아 방송국에 와서 제2방송과 직원 7-8명이 번역, 방송준비를 마쳤다.
12시가 되자 누군가가 외치는「기립」구령에 맞추어 모두 일어나 차려 자세로 항복방송을 들었다. 방송 상태가 좋지 않았고 또 내용도 정확치 않아서 방송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일본이 항복한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어」서 일본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고 조선방송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항복방송이 끝나고 준비된 원고로 방송을 하면서 해설방송을 곁들였다. 조선방송인들은 4시에 스튜디오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이날의 시가지는 조용했고 4시쯤 편성과 임병현 기술과 심상웅 방송과 문제안이 「건국 준비 위원회」를 들렸는데 이곳이 바로 편성과 임병현의 집이었다. (임병현은 해방후 정치인이 되었음)
안재홍 등 독립지사들과 각 학교 학생대표 40여명이 모여 얘기를 나누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8월 16일 아침, 서대문형무소 문이 열리고 애국지사들이 풀려나오면서 태극기를 든 시민들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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