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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첫 3·1절 기념행사와 중계방송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선생님이 소중하게 간직한 역사기록사진! 중계방송석이 식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날 촬영된 또 다른 사진 후면에는 다음 글이 쓰여 있다(원문대로 옮김). 檀紀 四二七九年 三月 一日- 二十七年만에 처음으로 마음노코 마지하는 國慶日 三一節! 이날아침 서울 鐘路의 임경이 울더니 午後 二時부터는 德壽宮 中和殿앞에서 흰저고리 검정치마 입은 朝鮮의 딸들이 三一節을 記念하는 「三一運動의 노래」 를 소리 높여 불으더라. 일제강점기에는 보신각의 관리가 허술했고 종소리도 물론 울리지 못했다. 해방의 날 1945년 8월 15일 울렸어야 할 보신각종을 그때도 미처 울리지 못했고 첫 3.1절 기념행사를 한 이날 정오 12시! KBS중계방송으로 울려 퍼진 민족대표 33인을 상징 하는 33번의..

일제강점기 조선어방송 역대 책임 보직인사

우리나라에서 방송국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27년 2월 16일이었지만 1932년 조선방송협회가 발족하고 二重放送이 실시되면서부터 사업부장 노창성, 제2방송과장 윤백남의 책임보직자 이름이 등재된다. 노창성은 처음부터 방송국설립에 참여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일약 사업부장이 되었고 尹白南 (Yoon, Baek-nam, 敎重)은 연극·영화·史話·레코드 제작 등 당대 문화예술계의 최고 반열에 있던 인사로 원래는 제2방송부장 예정으로 영입된 인사인데 제2방송부장 직제는 끝내 불발되어 제2방송과장으로 약 1년간 우리말 방송초석을 다졌다. 방송국 퇴직 후에도 방송출연 등 해방 후까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野談의 제1인자로 알려졌는데 그의 야담은 다른 분들의 옛날이야기와는 달리 史話라는 말로 표현되어 역사 이야기임..

미국의 소리방송 (VOA-Voice of America) 초기방송인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42년 2월 24일 발족한 VOA에서 한국어 방송을 시작한 것은 그해 8월 29일(국치일 32주년)로 1972년 KBS가 그 중계방송을 중단 할 때까지 우리나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VOA의 對일본 방송 적임인사로 지목된 유학생「황성수」는 한국에 살고 있던 가족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VOA근무를 승낙했다. 4년간 그 방송을 하던 중 1946년 외무부 정보국장으로 국내에 돌아와 국회부의장 등 요직을 지냈다. 1943년 JODK아나운서가 되어 홍일점으로 해방을 맞아 인기절정이었던「호기수」는 1947년 미국유학길에 올라 학생신분으로 VOA아나운서가 되어 1960년대까지 근무했다. 딸이 VOA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어머니가 공산군에게 납북당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