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일제강점기 조선어방송 역대 책임 보직인사

이장춘 2022. 9. 18. 13:41

사진 왼쪽부터 윤백남·김정진·심우섭·이혜구·이정섭·노창성

우리나라에서 방송국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27년 2월 16일이었지만 1932년 조선방송협회가 발족하고 二重放送이 실시되면서부터 사업부장 노창성, 제2방송과장 윤백남의 책임보직자 이름이 등재된다. 노창성은 처음부터 방송국설립에 참여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일약 사업부장이 되었고 尹白南 (Yoon, Baek-nam, 敎重)은 연극·영화·史話·레코드 제작 등 당대 문화예술계의 최고 반열에 있던 인사로 원래는 제2방송부장 예정으로 영입된 인사인데 제2방송부장 직제는 끝내 불발되어 제2방송과장으로 약 1년간 우리말 방송초석을 다졌다. 방송국 퇴직 후에도 방송출연 등 해방 후까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野談의 제1인자로 알려졌는데 그의 야담은 다른 분들의 옛날이야기와는 달리 史話라는 말로 표현되어 역사 이야기임과 동시에 예술품이었다.

예술가이고 언론인이면서 1920년대의 대표적 극작가로 꼽히던 운정 김정진(雲汀 金井鎭) 은 1933년 11월 13일 윤백남 후임으로 제2대 방송과장 부임, 1936년 숙환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재직했다.

제3대 과장은 沈友燮으로 1936년부터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어 방송채널에 일본어를 섞어 방송하라는 총독부 지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1939년 직을 그만둘 때 까지 약 3년간 재직했다. 이때 제2방송부가 신설되어 퇴직하지 않았다면 제2방송부장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소설 상록수 저자 심훈의 장형이기도 하다. (심훈도 방송국에 재직한 적이 있음)

제4대 과장이 바로 이혜구로 노창성이 부임할 때까지 초대 제2방송부장 직무를 대행했고 해방된 후 초대 중앙방송국장이 되었다. 사업부장 재직 중 1938년 5월 초대함흥방송국장으로 부임한 노창성이 제2방송부장으로 부임했지만 얼마 안 있어 터진 방송인「단파방송」일로 퇴직했다가(이때 제2방송부도 폐지됨) 1949년 중앙방송국장 부임, 전시중앙방송국장을 거쳐 방송관리국장으로 재직 중 지병으로 사망했다. 조선방송협회 기획과장 이정섭은 해방 후 조선방송협회장을 지냈고 6.25때 납북되었다. 이 외에 한덕봉이 함흥·평양, 황태영이 이리 기술과장(기술과에서 방송하던 시절)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