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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 수형자 옥중사진

항일단파방송 海內·外 연락운동(이하 단파방송이라 함)이란 일제강점기 말 암흑시대에 미국·중국 등 해외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단파방송을 통해 국내에서 듣고 독립운동가 등에게 전파해서 독립운동의 기폭제로 삼았던 역사적인 지하 독립운동으로 방송사에 길이 남는다. 이 일로 방송인을 포함한 350여명이 경찰에 끌러가 갖은 고초를 겪었고 70여명이 실형을 받았으며 6명의 獄死者를 냈는데 그중 위 세 사람의 옥중사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보존되어 있다. 송진근은 방송국 직원들이 단파방송으로 들은 해외소식을 모아 송남헌 등에게 전한 사람으로 1930년대 이계원과 쌍벽을 이룬 인기 아나운서였고 송남헌은 방송국 아동작가로 활동하면서 방송국 직원들이 듣고 모은 해외소식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한 사람이다. 허헌은 민족변호사로 독립운..

경성방송국과 洪蘭坡 (永厚)

경성방송국 현대음악은 홍난파의 공로가 크고 그의 음악세계는 경성방송국을 통해 더욱 더 빛났다. 경성방송국 개국을 앞두고 그가 주동적으로 창설한 중앙악우회가 1927년 2월 16일 방송국 개국 기념공연을 가졌다. 이원수 작사 「고향의 봄」을 비롯해서 수많은 동요, 가곡이 경성방송국의 전파를 타며 전 국민들이 함께 부르기 시작해서 오늘까지도 국민적 노래로 자리매김 했으며. 미국의 재즈음악을 최초로 도입해서 경성방송국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1931년부터 33년까지 미국유학을 다녀와서는 홍성유·이영세와 함께 바이올린 트리오를 구성 경성방송국에 본격적으로 출연하면서 방송국에 홍난파 자리가 마련되어 1936년 우리나라 최초의 「경성방송국 교향악단」을 창설해서 운영하다가 1941년 8월 늑막염으로 세상을 떴다. 이토..

6.25와 세계 최초 해상 이동방송국

한국전쟁은 방송사상 그 유례가 없는 해상 이동방송을 탄생시켰다. 7월 23일 전선이 목포에 이르자 방송국은 해군 협조를 얻어, 514호 소해정에 50W송신기를 포함한 주요 방송기기를 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배에서도 방송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것이 세계 최초의 ‘해상이동방송’ 시발점이다. 정극모 해군참모총장의 승인을 얻어 정식방송을 실시한 것은 8월 10일로 전·후 3차에 걸쳐 63일간 서·남해안 함정 또는 도서지역을 대상으로 방송을 하면서 9월 인천상륙작전에 까지 참여했다. 이 해상 이동방송이 작전에 임하는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때로는 그 지역 로칼 방송이나 노래자랑 등을 실시해서 방송이 지역주민과 밀착하는 효과도 가져 왔으며 이때까지 방송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분들에게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