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방송역사

미국의 소리방송 (VOA-Voice of America) 초기방송인들

이장춘 2022. 9. 18. 13:26

윗줄 왼 쪽부터 황성수·호기수·황재경·박경호·이계원·민재호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42년 2월 24일 발족한 VOA에서 한국어 방송을 시작한 것은 그해 8월 29일(국치일 32주년)로 1972년 KBS가 그 중계방송을 중단 할 때까지 우리나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VOA의 對일본 방송 적임인사로 지목된 유학생「황성수」는 한국에 살고 있던 가족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VOA근무를 승낙했다. 4년간 그 방송을 하던 중 1946년 외무부 정보국장으로 국내에 돌아와 국회부의장 등 요직을 지냈다.

1943년 JODK아나운서가 되어 홍일점으로 해방을 맞아 인기절정이었던「호기수」는 1947년 미국유학길에 올라 학생신분으로 VOA아나운서가 되어 1960년대까지 근무했다. 딸이 VOA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어머니가 공산군에게 납북당하거나 학살당했다는 안타까운 얘기가 있다.

성악가이자 입으로 천의 소리를 낼 수 있었던 「황재경」은 선교 활동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1947년부터 VOA와 인연을 맺고 오랜 기간 방송을 한 그 특유한 목소리로 한국인들에게 친근한 아나운서다.

JODK 개국 축하방송을 한 「중앙樂又會」연주를 지휘하는 등 음악인으로 활동하다가 해방공간에서 기획과장 등을 역임한「박경호」는 1949년 3월「록팰러 재단」 초청으로 미국에 연수차 갔다가 사위(미 고문관 출신)의 안내로 VOA에 근무하게 되었다. 6.25가 일어나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VUNC)으로 옮겼다가 1956년부터 1960년대까지 VOA에서 근무했다.

해방공간에서 방송과장을 지내고 정부수립과 동시에 발족한 초대기감(기술총수) 직을 수행하다가 퇴직 한 「이계원」은 1951년 10월 VOA 초청받아 근무하다가 1968년 2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민재호」는 중앙방송국 방송과장 재직 중 6.25를 맞아 VUNC에 파견되었다가 1951년 VOA로 옮겨 1970년대까지 재직했다.

위 분들은 개별적인 협약으로 VOA에서 활동하신 분들이고 1959년부터 국가 간의 협약에 따라 장기범·강익수·강찬선·송한규·이광재·김영호 등이 차례로 파견되었다. KBS사우회 사이버 박물관에 여러 편의 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