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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방송 종군기자 한영섭

現職「6.25 참전 종군기자회 회장」韓기자는 95세로 「흥남철수작전」을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산 증인이다. 1949년 2월 공개경쟁시험을 거쳐 KBS 중앙방송국 기자로 들어와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과 함께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국방부를 출입하게 되었다. 6.25가 터지자 방송이 전시체제로 바뀌어 전쟁터를 누비며 취재 활동을 수행했다. 1950년 11월 최전방의 적진을 무너뜨리며 북진하는 UN 한국군 수도사단의 종군기자로 같은 군 트럭에 타고 가던 병사가 적탄에 쓰러져 가는 상황을 체험하며, 자신의 生死를 가늠 할 수없는 속에서 최북단 청진 끼지 진격, 상황을 취재 보도했다. 북진 중 KBS 원산, 함흥, 청진방송국을 보호하며 그 방송시설의 단파방송을 통해 서울 중앙방송국으로 기사를 송고, 어느 종군기..

일생을 방송 드라마와 함께한 한운사님

일생을 방송 드라마와 함께한 한운사님 한 운사님은 우리나라 초기 라디오 TV의 일일연속극을 쓰셨고 작품 속에는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불러 넣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모아가면서 관심을 집중시켜, 라디오시대, TV시대를 거치면서 지난 50년간 방송된 100 여 편의 작품내용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라디오에서 방송된 드라마는 또 영화로도 제작되고, TV드라마로 방송 되었으며 그 드라마의 주제곡을 부른 가수는 정상급 가수로 발돋움 했습니다. 1980년대 역사적인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서 날이면날마다 라디오와 TV에서 울려 퍼지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그 노래는 다름 아닌1964년 KBS에서 방송된 일일연속극 남과 북의 주제곡이었습니다. 196..

방송인물 2022.10.14

방송인 전응덕, 광고단체 연합회 회장

https://youtu.be/j1x8AHRl_yQ 위 주소를 클릭하셔서 유튜브 동영상을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부산 문화방송 개국 때부터 방송하신 이성화 아나운서께서 위 동영상을 보시고 글을 보내오셨기에 올립니다. 춘하추동방송국장님. 어폐를 무릅쓰고 말하고 싶습니다. 62년 전에 일어난 이 사실을 부산문화방송 스튜디오에서 시험지에 날려 쓴 현장 소식을 직접 읽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리 어폐라고 말씀 드린 이유는 이 엄숙 하고 비참한 영상을 감히 예술적 다큐라고 하고 싶습니다. 62년 전 28세 청년 보도과장의 정의로운 심장의 소리를 그때의 영상에 맞게 편집을 하셔서 민주주의의 열망이 얼마나 올바로 강했는지 심장을 두드리는 작품으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단한 사건이 부산 가까이 마산에서 터졌는데..

방송인물 2022.10.10

1기 성우 윤미림이 말하는 그때 그시절 1954년 군방송

대한민국 성우 1기 운미림! 1954년 8월부터 군방송실에서 근무하던중 그해 12월 KBS 방송극 연구생 공개채용 시험을 거쳐 대한민국 성우 1기가 되었다. 님이 써 놓은 글 아픔의 시간은 군방송실 근무시절부터 시작해서 49회 아나운서들 얘기로 끝난다. 이 군방송실 얘기는 아픔의 시간들 (6), (7), (8)회에 걸처 쓰셨다. 그 시절의 전해진 얘기가 별로 없던터에 윤미림님이 겪었던 얘기를 상세하게 기록 해 놓아서 그 시절을 이해하는데 도움도 되고 재미도 있다. 윤미림님과 몇차례에 걸쳐 이메일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말씀하시기를 20년세월 컴퓨터 앞에 있었더니 눈이 많아 안 좋으시다는 말씀을 듣고 연락을 자재 해 오다가 보나 요즈음 연락이 귾겨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행..

기본 2022.10.03

이장춘, 삶의 단상 : 항일단파방송 해내 · 외 연락운동

https://youtu.be/jcGZYVvG9pk 「단파방송 수신사건」· 「단파방송 밀청사건」 필자가 방송국에 들어오면서부터 선배님들로부터 종종 들어오던 말이었지만 깊은 생각 없이 듣고 흘려버렸던 일이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방송에 관한 글을 쓰면서 방송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일임을 깨닫고 나름대로 연구를 거듭해서 40여 편의 글을 KBS 사우회 박물관에 올렸다.랫동안 단편적으로만 전해오던 이 사건은 1980년대 들어 (사) 방우회와 유병은선배님의 노력으로 정리되고 세미나 등을 거쳐 「抗日短波放送 海內 · 外 連絡運動」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 일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의 勿忘碑를 KBS 안에 세워 1991년 9월 1일 제막식을 갖고 해마다 방송인 들이 만나 그 일을 기린다. (..

남산 방송철탑과 타워

1961년 KBS가 TV방송을 실시하면서 남산정상에 처음으로 철탑을 세운이래(본란 27호 참조) TBC, MBC가 TV방송을 실시하면서 이곳에 각기 철탑을 세웠다. MBC·TBC 개국주역 (고)정환옥이 1965년에 결성된 민간방송협회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남산에 모든 방송사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종합철탑건립안을 생각했고 1968년 방송사들이 힘을 모아 「한국 전파 탑 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뜻을 실천 해 나가기로 했다. KBS가 이 철탑을 활용 10Kw출력을 50Kw로 대폭 늘려 방송한 것은 1971년 8월로 이때부터 방송사들은 해발 479.7m, 동양에서 제일 높은 철탑에서 TV·FM 등을 송수신하게 된 것이다.(537m인「모스크바」탑에 이어 세계 2번째, 도오꾜오 타워는 3백33m). 이 타워는 전파..

호출부호 「HL」과 방송의 날

왼쪽은 1947년 10월 2일 최초로 방송마이크에 부착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呼出符號/Call Sign이고 오른쪽은 1964년 10월 2일 최초로 우리나라 국·민영 방송인들이 함께 만나 진명여고 3·1당에서 연 제1회 방송의 날 기념사진이다. 1947년 미국 애틀랜타 시에서 열린 國際無線通信會議-ITU에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무선호출부호가「HL」로 결정됨에 따라 대한민국 방송이 국제사회의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정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64년 10월 2일을 방송의 날로 정해서 해마다 행사를 해 오던 중 KBS 공영방송출범을 계기로 1974년 1월 결성된 「한국방송협회」가 주관하게 되었고 「한국방송대상」도 함께 시행되었다. 1978년 한국방송협회 총회 결정에 따라 9월3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

이승만 국회의장·방송인이 함께 한 헌법서명 기념사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헌법이 제정 공포되던 날 1948년 7월 17일, 이승만 국회의장과 이정섭 조선방송 협회장(우), 홍양명 중앙방송국장 (좌), 송영호 편성과장(뒤)이 함께 한 역사적인 사진이다. 엄복영 회우로부터 강원도 화진포 이승만 별장에 이 사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송현식 회우에게 전했더니 바로 보여주셨다. JODK 마지막 기획과장 이정섭은 해방 후 조선방송협회장(정부수립 후 대한방송협회장)으로 재직하다가 6.25때 납북되었다. 신경(장춘)에서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홍양명(洪陽明)은 군정청 초대 이혜구 방송국장에 이어 1947년 8월 15일 2대 중앙방송국장으로 취임 정부 수립 때까지 재직했고 6.25때 납북되었다. 1938년 아나운서로 입문한 송영호는 (송현식 회우 부친) 해방 후 ..

6.25 마지막 방송과 김현수 대령 순직

1950년 6월 27일 밤 9시 이후의 방송은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며 급박한 상황에 대전방송국에서 보내온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방송·전황·행진곡·애국 시 등으로 이어지다가 12시에 마치고 방송 거부 장치를 했다. 한강건너 영등포 우체국에서 방송 할 예정으로 비상 방송기기를 트럭에 싫고 새벽 2시 10분경 방송국을 출발했다. 2시30분경 한강교에 도달했으나, 이미 자동차가 한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름비가 내리는 칠흑 같은 밤, 자동차에서 내려 8명의 방송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한강교를 막 건넜을 때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울렸다. 그 폭음이 한강 폭파 음이었다는 것을 한 것은 뒷날이었다. 관악산을 넘어 안양에 도착해서 7시경 라디오 다이얼을 맞추니 뜻밖에도 행진곡이 방송..

동요의 기원 「반달」과 방송

2024년이면 우리나라에서 시험방송 전파가 발사 된지 100년임과 동시에 동요 100년을 맞는다. 이 땅에 방송과 동요는 시발점을 같이하고 방정환 선생님의 「어린이 운동」과도 맥을 같이한다. 방정환선생님이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정하고 색동회를 결성하면서(어린이 날 기원이 1923년이라고도 하는데 KBS에서 올해 어린이 날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어서 여기에 따름) 일본 유학중인 윤극영을 찾아 동요 제작과 색동회에 참여 해 주도록 부탁한다. 그로부터「반달」이 탄생하고 방정환 창간 「어린이」잡지에 실려 1924년10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때 어린 학생 이정숙의 목소리로 부른 반달을 사우회 사이버 박물관에서 들을 수 있다.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은 시험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