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1기 성우 윤미림이 말하는 그때 그시절 1954년 군방송

이장춘 2022. 10. 3. 03:31
 

 
대한민국 성우 1기 운미림!
1954년 8월부터 군방송실에서 근무하던중
그해 12월 KBS 방송극 연구생 공개채용 시험을 거쳐
대한민국 성우 1기가 되었다.  님이 써 놓은 글 아픔의 시간은
군방송실 근무시절부터 시작해서 49회 아나운서들 얘기로 끝난다.
이 군방송실 얘기는 아픔의 시간들 (6), (7), (8)회에 걸처 쓰셨다.
시절의 전해진 얘기가 별로 없던터에 윤미림님이 겪었던 얘기를 상세하게
기록 해 놓아서 그 시절을 이해하는데 도움도  되고 재미도 있다. 윤미림님과
 몇차례에 걸쳐 이메일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말씀하시기를
20년세월 컴퓨터 앞에 있었더니  눈이 많아 안 좋으시다는 말씀을
 듣고 연락을 자재 해 오다가 보나 요즈음 연락이 귾겨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행복하심을 빌며 
아픔의 시간들 3회분 군방송길 얘기를 올린다.  
 
 
성우 윤미림이 말하는 그때 그시절 1954년 군방송실
 

그때 그시절의 KBS사옥

 
아픔의 시간들 - (6)


10대 그녀의 담배 히스토리

 
전란으로 서울이 잿더미로 변해 있던
1950년대 초반, 태평로에 인접한, 지금의 코
리아나호텔이 조선일보였고. 거기서 멀지 않은 정동
2번지의 KBS 건물은 벽돌 3층, 그 옆에 딸린 별관은 2층
 목조 건물  별관 아래층 37평을 국방부 정훈부 군방송실이
 빌려쓰고,  하루에 45분을 KBS 전파를 빌려 군장병
상대의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사무실은 둘로 나뉘어져, 한 평도
 안 되는 스튜디오가 있는  안 쪽 사무실은
방송책임자들인 장교들과 고참 문관들이 사용,
나는 그 사무실 입구 옆에 자리가 주어졌다. 건물
출입구 쪽 사무실에는 남녀 아나운서들이 상시 녹음에
 대기, 남자 문관들은 담배를 입에 물고 방송원고 집필에
몰두,  사무실은 온통 담배연기로 자욱하고...글 쓰려면
담배는 필수구나...,... 펜을 놀리고 있는 문관들이
 멋있어 보였다. 남자문관들은 월급은 없지만.
원고 쓰면 원고료는 나왔다.
 
 
나는 나이는 어려도, 군방송실에
정식 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들어갔건만,
사무능력 없다고,    발령도 안 나오고 월급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속에 자존심 하나는 살아서
자신의 신분만은 잊지 않았다,     나, 국방부 문관이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그 문관 하는일이라곤 매일 점심에 가락국수
 식권 직원들에게 나눠주며외부 연기자들에게 도장 받고 방송출연료
 내주는 게 맡은 일의 전부 용돈 한 푼 없고, 월급은 언제 나오려는지...
1955년 1월 하순에는 음력설이 들어 있었다.    홍은원(洪恩遠 : 후에
여류 영화감독) 아나운서도 월급 없는 무료봉사. 홍 아나운서는 30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성. 구정을 이틀 앞둔 주말인 토요일 밤,
토요일 밤에도 직원들은 퇴근 안하고 일하고 있었다. 
 
군방송실 실무책임자 최창봉(崔彰鳳)중위님이
홍은원 아나운서에게는 2천환을, 나에게는 돈은 안 주고,
봉투 대신 다른 선물을 많이 주었다. "미스 윤! 이거 갖다가
 다른 사람들 주라우!"  필터 없는 군인용 막권련이었다. 본청에서
나온 담배가 남은 모양이었다. 이 담배를 다른 사람들한테 주라는
 말에남자 직원들은 재미있다고 웃으며 내 표정을 살폈다.
나한테는 아무 쓸모 없는 그 많은 담배를, 집 바로 옆의
동사무소에 갖다 줄까, 하고 거절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었다. 
 
밤에 집에 도착해보니 연탄불은
 또 꺼져 있었다.  밤늦게 다른 방에서 불씨를
얻어다가 연탄을 피우기는 했어도 새벽녘까지 방은
 미적지근하지도 않고 너무 추워 잠도 안 오고, 얼음 냉방
같은 데서 담요를 두르고 웅크리고 앉았다가  손이 곱아 덜덜
 떨면서 온기가 필요해 입이라도 더우면 나을 것 같아 군방송실
에서 얻어온 담배 한 갑을 뜯어담배가치 하나를 꺼내 불을
붙여봤다.캑캑거리면서 필터도 안 달린 독한 담배, 
몇 대를 연거푸 입에 피워 물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어지럽고 지쳐 잠들어버렸다. 
 
그 날 밤 이후 담배는 나의 난방
보조품이며 친구가 되었다. 나는 집에
사람이 없을 때, 뒷 창문 열어놓고 하늘거리며
공중으로 흩어지는 내 담배연기를 바라보면, 철없는
가슴에 분에 넘치는 꿈이 피어올랐다. 아, 나도 이렇게
담배 피우면서 군방송실 남자문관들처럼 글 쓰고
고료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최창봉(崔彰鳳)님은 평안북도 의주가 고향,
고대영문과 출신,  남북분단으로 이산가족 되고,
6.25 때 치열한 가평 전투에서 살아남은 장교학도병,
제대 후, 방송계 투신, 한국방송 PD 제1호, 문화방송,
 KBS-TV, 동아방송의 기틀을 놓은 방송계 거목. 
친구를
유난히 좋아하며 정직과
청렴결백이 강점인 분.

 
 
아픔의 시간들 - (7)
 
홍은원 아나운서, 이용찬 작가 부부
 
 
신비스런 미스 홍의 매력
-1954년 늦가을, 군방송실 아나운서 미스 홍 이야기.-
  
젊고 자그마한 체구에 두상이 작고
코스모스처럼 연약한 외모, 쪽 고른 다리하며
 균형이 잘 잡힌 몸매, 까만 눈동자에 목소리는 째랑 째랑,
아주 애교 있고 영리해 보이는 미인이었다. 그 아나운서의
말 한 마디 눈 깜박임 하나도전부 신선한 매력을 발산했다.
방송실장을 비롯하여 직원들의 시선은 전부홍 아나운서에게
 쏠렸다. 아래 위 까만 색을 기조로 하는 의상으로, 목에
빨간 줄이 들어있고 앞이 막힌 까만 스웨터에
두 줄로 된 진주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홍 아나운서는 생김과는 달리 성격은
소탈했다. 그렇게 검소한 옷차림이었는데도
 화사한 외모 때문에 화려하게 보였다.    그녀는
어린 딸이 있는 기혼이었으나, 언제나"미스 홍"으로
 불렸다.    군방송실에 부임하는 장교들마다,   미스 홍과
몇 마디 대화를 하고 나면, 영락없이 군복의 손질이 달라지며
바지에는 칼날 같은 줄이 서게 대림질하며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매력 앞에 남자들이 금방 허물어지는 현장이었다. 미스 홍은
 특히 음악에 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간단한 코멘트."역시 피아노는 쇼팽이야." 문화 암흑지역에서 자란
 나는 그 아나운서의 음악지식에 감탄과 존경을 보냈다. 
그이는 후에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라이터로
 활약한 홍은원(洪恩遠)씨였다.
  
그 무렵 유행하던 가요 중에
나애심(羅愛心)씨의<미사의 종>이
 있었다. 빌딩의 그림자 황혼이 짙어갈 때
.성스럽게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 걸어오는
 발자욱마다 눈물고인 내 청춘.죄 많은 과거사를
 뉘우쳐 울 적에.아! 싼타 마리아의 종이 울린다
우수에 가득 찬 큰 눈의 나애심(羅愛心)씨가
시원한 허스키로 그 노래를 부르면 무언가
이국정취를 느끼게 하며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나애심(羅愛心)씨는 홍(洪)
아나운서를 따라한 번 군방송실에 들린
 일이 있어나도 가까이서 그 유명한 가수를 직접
 봤다.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착하디 착한 눈빛이 인상적
이었다.  나애심(羅愛心)씨가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매섭게 추웠던 어느 날 오후였다. 연탄 난로 하나로는 난방이
 시원찮아추운 사무실에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것도
 고마워지는 오후, 가수 나애심(羅愛心)씨가 온 일도
 없는데  갑자기  조용한 사무실에  그이의
<미사의 종>이 반주 없이 흘러나왔다.
 
이게 웬 일인가 하여, 놀란
직원들의 탐색하는 시선이 일제히
노래 나오는 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나애심
(羅愛心)씨의 노래가 아니라, 마이크가 켜진
 베이비스튜디오 안에서 미스 홍(洪)이 부르는 노래
였다. 예쁜 눈을 내려 깔고 스테이지에서처럼 제스처를
써가면서 나애심(羅愛心)씨와 아주 똑같은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미인 아나운서. 너무 잘 불러
아무도 감히 칭찬조차 할 수 없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미스 홍(洪)은
상해에서 가수로 무대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현대적 감각뿐만 아니라 노래까지도 잘
 부르는 매력 있는 여성에게나는 완전히 반해버렸다..
미스 홍이 감기만 들어도 나는 슬퍼 KBS본관 남녀공용
 화장실로 가서 눈물을 닦고 왔다. 인간관계는 오묘하다.
그로부터 7,8년 후, 내가 그분 남편이신이용찬(李容燦)
방송작가님 연속드라마에  중요한 역으로 출연
하게  줄이야 누가 꿈엔들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계속)
 
 
아픔의 시간들 - (8)
 
드라마 출연
 
 
군방송실에서 월급이 안 나온다는
것은그만 두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으나
함께 들어간 남자문관들도 그대로 참고 있고,
그렇다고 다른 데 갈 곳도 없는 나는, 이러다가
머지않아 허무하게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어렴풋이 느꼈다.
  
월급 한 푼 못 받으면서도
그만두라는 소리안 듣는 것만 다행으
로 여기면서 매일 출근했다. 퇴근하여 종로3가
 집이냐고 들어가면, 무주택자들이 바글바글 그 작은
한옥은 옛날 어느 양반댁 소실 마나님 소유었다.
주인은 아직 피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양반
(兩班) 댁과 성씨만 같으면 다 모여든 집
  
동사무소에서 배급받는 안남미와 19공탄,
연탄은 밤낮 꺼지고 안남미 밥은 맛없어 정말
못 먹겠고, 날은 추워오는데 입고 출근할 옷도 없고,
구두 뒷축은 다 떨어져나가고, 헌 미군담요를 몸에 두르고
밤을 지내다보면 밤새도록 콜록콜록...풀리지 않는 생활고를
 타개하려고 어느 날 오후 군방송실에서 멍청하게 창 밖을
바라보면서돈 벌 궁리를 열심히 하고 있던 내
귀에 충격적인 말이 들렸다.
 
"야아! 지금 저쪽 서울방송국 위층의
민구하고 아래 있는 장민호하고 얘기하는데,
오늘 남해연이는 네 프로나 했대! 중앙방송국은
출연료가 6백 환인가, 8백 환인가?" "그럼 줄잡아도
2천 4백환 이상은 벌었다는 얘기 아냐? 쌀 다섯 말 값이
넘잖아? 이 오뉴월 가뭄에 그게 어디야? 잠깐 동안
방송하고 그렇게 벌다니…." 출입문으로 통하는
옆 사무실 남자문관들의 대화였다.
 
뭐, 하루에 쌀 다섯 말 값을 벌어?
나는 번개 맞은 것처럼 움직이지도 못하고
떨리는 입술만 깨물었다. 남해연(南海燕)씨는
30대 초반의, 눈이 크며 인물이 좋은, 당당한 체구의,
 당대 최고의 방송연기자.아, 그렇다~~~! 나도 남해연이
처럼 돈을 버는 거다~~!!!라디오드라마 한편 제대로
 된 것 들어본 일도 없으면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조금은 있었다.
 
군방송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인가
 10분 드라마가 나갔다. 하루는 악극단 출신
여배우가 오지 않아, 군방송실에서 급하니까 나를
 대타로 소년역을 시켜주었다."오케!" 하는 한 마디였다.
연출자가 시키는 대로 해봤다. 그랬더니 사무실에서 모두,
참 잘한다고 용기를 주어, 그 이후 두어번 더 애들 역으로
출연하고 출연료 500환씩 받고 감격했던 일이 있는데, 
경험을 근거로 나는 혹시 그 방면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군방송실에서
보면  악극단 출신 배우들은  좀 대우가  안
좋았다.고상한 직업이 아닌 것 같았다.
  
부끄럽더라도 2년만 눈 딱 감고
방송배우로 돈 벌어그 일 그만 두고
대학 다니는 거다~~!!! 당시 5급 공무원의
세금공제하기 전 봉급이 6 천환 대, 하루 방송만
하고
 2,400을 번다면, 금시 부자가 될 수 있는 수입,
여하간
2년만 방송으로 돈을 벌어대학을다녀야겠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내 머리에 박혀움직이지 않았다. 
남들이 대학, 대학, 하니까,나도 대학을 생각한
것이지, 
사실은
 대학을 다녀야 할
목적도 없었다.

 
대학이란
단어도 서울 와서
처음 들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방송
연기가 무엇인지, 
그 일이 내 적성에 맞는지,

나처럼 원시 생활권에서 살아온 인간에게
그게 얼마나 비참한 고비들을 많이
 넘어야 하는 직업인지
 
방송에서 당해야 할 고난을
전혀 상상도 못하면서, 그저 마음만
먹으면 되는 걸로 간단히 생각했었다.
무지는 만용, 세상물정에 캄캄했으므로
오직 생존을 유지하려는 본능에 따라
허황되게 미래를 결정하고 있었다.
 
그런 무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서울 출신자들보다 방송연기 배우기가
몇 배 더 힘들었다.  마침 1954년12월
22일, KBS 전속극단원 모집이 있어,
시험보고 KBS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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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 윤미림
http://blog.daum.net/jc21th/17782329

성우 윤미림님, 최초의 멜로드라마 청실 홍실 출연기
http://blog.daum.net/jc21th/17780749
 
임택근 아나운서 그때 그 목소리, 대한민국 성우 1기 윤미림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2417

아픔의 시기간들 더보러가
 
   
  1959년 남산 스카이 라운지에서
있은
성우 송념모임에서의 추억의 사진이다. 
왼쪽부터 장민호, 이혜경, 김수일, 홍은순, 이미경,
방송관리국장
이규일, 구민, 고은정, 최길호, 한분건너
전성천 공보실장,
    한분건너 최을선,     이경희,
방송과장 노정팔,   최옥경,     
천선녀,
오승룡,
중앙 방송국장 이운용님.

 

 
KBS 1기 성우들이 함께 한 사진
앞에서 부터 윤미림, 이창환, 김옥경,
 김소원, 박용기, 심영식, 고은정, 신원균,
김수일, 남산에 옮기고 그때 그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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