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8 28

최초의 편성원 최승일

최승일(崔承一)은 경성방송국 시험방송시절 이옥경이 입문하기 전까지, 오직 한사람밖에 없던 방송요원으로 최초의 편성원이자, 아나운서, 방송극 작가 · 연출가였다. 최초의 공모 아나운서 마현경의 남편이고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를 있게 한 주인공으로 5남매의 큰오빠이며 그 시절의 아나운서 김영팔은 둘도 없는 친구로 그를 아나운서로 영입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최고 반열에 있던 文士로 그가 쓴 많은 글들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오고, 최승일이 제작한 최초의 방송극 「새벽종」에 출연했던 복혜숙의 회상기 등이 있어서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동생 최승희, 妹弟 안막 등과 월북 북한 핵심부에서 활동했다는 아쉬움이 있고 그로 인해서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녀..

한덕봉 초기사진

한덕봉은 한국인 최초의 사설무선 전신통신종사 1급 자격을 취득한 (1922년 7월8일) 무선기술자로 일본 무역선을 타고 세계를 누비던 항해사였다. 그런 한덕봉이 1924년 12월 수많은 인사들의 환영을 받는 가운데 제물포항을 통해 입항하면서 앞으로도 배를 더 타겠다고 했지만 다시 출항하지 않고 시험방송을 하던 경성방송국 설립에 참여해서 1950년 6.25전쟁으로 납북 될 때 까지 방송기술을 이끌었다. 위는 1933년 새로 준공된 연희송신소 옥상에서 촬영한 사진이고 아래는 1931년 12월14일 무선통신사1급 자격검정합격증(일본 체신성)이다. 필자가 사우회 부회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 전영효 회우로부터 한덕봉 후손이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KBS박송박물관 준비요원으로 있던 서용석학예사에게 얘..

우리말 전담방송 초기방송인들

二重放送 실시를 위한 인원을 확충하고 1932년 10월 경성방송국 현관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당대 최고 문화예술인 반열에 있던 윤백남이 「제2방송과장」으로 영입되고 이혜구·異하윤·최아지·김문경이 공개시험을 통해서 채용되었다. 사진 중 박충근 · 남정준은 1931년부터 근무하던 아나운서이고 그 외의 인물은 일본인이다. 이혜구는 연예, 이하윤은 교양프로그램을 편성제작해서 지금으로 보면 프로듀서 역할을 했다. 이혜구는 김성호 회우의 인물탐구에서 자세히 설명되었고 이하윤은 방송국 퇴직 후 오랜 세월 학계에서 명성을 떨쳤다. 최초의 방송과장 윤백남과 축구중계방송의 원조 박충근은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쓸 예정이다. 「KBS사우회 사이버박물관」 참조

최초의 방송소 (송신소) 연희와 二重放送

1933년 4월 26일! 고양군 연희면에 새로운 방송소를 설립, 출력을 1Kw에서 10Kw로 대폭 올리고 우리말·일본어 방송을 각각 다른 채널에서 방송하기 시작한 날이다. 이 사진은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엽서다. 처음 1,400 여대가 보급된 라디오를 기반으로 방송을 시작했지만 수신기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청취범위가 좁고 수신기 값이 비쌀 뿐만 아니라 조선어 방송에 대한 차별편성으로 조선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등의 요인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특단의 조치로 50만원의 기채를 받아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전국적인 조직「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로 개편하고 출력증강과 二重방송을 실시하면서 부산, 평양, 이리, 함흥 등 전국적인 방송망 확장에 나섰다. 이때 설립된 연희 송신소는 1971년 3월 ..

대한민국 최초의 아나운서 李玉景

우리나라 방송의 시발점 1927년 2월 16일 1시, 첫 방송을 내보낸 최초의 아나운서라는 역사적인 인물로 1926년 6월 시험방송시절부터 1928년 둘째 딸 노라노(본명 노명자)가 태어나기 까지 약 2년간 아나운서 생활을 하면서「요술상자」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는 등 숱한 話題를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년 12월 3일 이옥경 둘째 딸 노라노 여사님 제공으로 이사진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그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사진이 없었음은 물론 李玉景 한자 이름을 비롯, 그에 관해 잘못 전달된 내용이나 보충할 내용들이 많아서 필자가 초안을 작성하고 둘째 딸 노라노여사가 최종수정, 보완「노라노가 쓴 최초방송인 노창성, 이옥경」이라는 제목(http://blog.daum.net/jc21th/1778007..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

1926년 7월 1일 기공, 동년 12월 5일 준공되었다. 1927년 2월 16일 1시, 출력 1Kw, 파장 345m로 정규방송이 시작되어, 1950년 6.25로 잿더미가 될 때까지 약 23 여년, 이곳에서 방송을 내 보냈다. 방송국 흔적이 사라진 이 터는 조선일보와 덕수초등학교에 편입되었고 1987년 한국방송인 동우회(방우회)가 덕수초등학교 교정에 첫 방송터 유허비를 세워 해마다 4월이면 이곳을 찾아 기념식을 갖는다. 태조 둘째 왕비 신덕왕후의 무덤 정능 터, 정동 1번지,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의 李왕실 땅 190평을 빌려 지하1층, 지상 2층 건물과 45m안테나 2기를 세우고 송신기는 지하에 설치되었다. 개국당시에 촬영된 이 사진에는 그 이전에 세워진 영국공사관, 덕수초등학교, 영국성공..

방송의 기원 최초의 시험방송

1924년 12월 9일 11시 30분! 京城府 本町 一丁目 三越 吳服店!(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 이곳 3층에 설치된 기이한 나팔형 전기 확성기에서 기계적인 소리로 전해진 인사말과 더불어 양악, 국악, 피리소리 등이 흘러 나와 백화점 고객과 지나가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의 광화문에 있던 무선국 실험실에서 보낸 「무선전화방송!」 우리나라 「방송의 기원」이다. 이에 앞서 11월 29일에 첫 시험방송이 있었지만 담당 관리들이나 기자들을 상대로 한 비공개 시험방송이어서 공식적으로는 이때의 시험방송이 최초다. 곧이어 12월 17일, 18일, 19일 3일간에 걸친 조선일보사의 시험방송이 있었다. 시험방송은 「近世科學의 一大驚異」,「驚異의 눈!」,「驚異의 귀」등의 제목을 붙여 크게 보도되었고 이후 시험방송..

항일 독립 애국지사 성기석

필자가 이사진 설명을 듣는 순간 숨이 막일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한국방송사에서 가장 소중한 기록의 하나 「항일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의 주역 성기석을 광복의 역사적인 날, 그 역사적인 곳에서 역사적인 모습을 보인 사진설명을 들어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 조선·동아일보를 비롯해서 모든 민족지들을 폐간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했으며 모든 단파수신기를 몰수 하는 등 해외소식을 단절시키고 일본의 일방적인 선전만을 늘어놓았다. 그 시절 성기석은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었던 미국, 중국 등지에서 들려오는 세계정세와 독립운동 소식을 단파수신기로 듣고 극비리에 독립 운동가들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다가 발각되어 1942년 12월 28일 경찰에 끌려갔다. 사상범으로 몰려 미결수로 10개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