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 이사 이장춘 1337

경성방송국 이중방송과 한국어 전담방송실시

경성방송국 이중방송과 한국어 전담방송실시 1933년 4월 26 일! 경성방송국에서 한국어방송 전담 새로운 채널이 탄생한 날 입니다. 제2방송이라고 불리던 출력 10Kw, 주파수 610Kz 이 채널은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를 지키고 우리말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공공기관에서 우리말 사용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우리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곳이 경성방송국 제 2 방송과였습니다. 1927년 2월 16일! 라디오 1400대정도가 보급되었던 시절에 방송을 처음으로 내 보냈습니다. 경기도와 그 주변에서만 청취할 수 있었던 1Kw출력의 방송으로 청취범위가 제한되었고 또 일본어를 우선으로 한 방송편성으로는 우리 동포들이 방송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라디오 값 턱없이 비싸고 청취료도 비싸니 일..

경성방송국 드라마와 그때 모습 그 목소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경성방송국 드라마와 그때 그 모습 그 목소리 방송드라마는 방송극이라는 이름으로 시험 방송 때부터 있어 왔습니다. 소설가이고 극 연출가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님의 큰 오빠이기도 한 최승일님이 방송국에 근무 하면서 김영팔님 (뒤에 방송국 아나운서가 됨), 신학박사로 여러 분..

스포츠 중계방송의 개척자 박충근 아나운서

스포츠 중계방송의 개척자 박충근 아나운서 박충근님은 남자 아나운서로는 두 번 째로 1931년에 경성방송국에 들어와 특출한 스포츠 중계방송으로 스포츠 열기를 확산시킨 주인공이고 특히 축구 중계방송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습니다. 남자 아나운서는 남정준 아나운서와 두 사람밖에 없던 시절에 밤, 낮없이 바쁜 생활을 하셨던 박충근 아나운서가 떠난 후 방송국은 한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1907년생인 박충근아나운서는 경성법학 전문학교시절 축구와 야구 선수였고 육상 단거리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1931년 공개 채용시험에서 32명 응모자 가운데 한명을 선발한 아나운서 시험에서 합격해 들어오셨습니다. 이 얘기는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님이 그때 경성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을 보아 필기시험에서 1등을 했지만 음성시험에..

방송인물 2010.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