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방송국 제 3 대 제2방송과장 沈友燮님
천풍 심우섭 선생님은 경성방송국
제 3 대 제2방송과장으로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계셨습니다. 1890년 12월 11일 생으로 방송국에 오실 때는 46세였고 방송국에 들어오기 전 중견 언론인으로 또는 문학가로 널리 알려지셨던 분입니다. 교육계, 언론계에 오래 계셨던 선생님은 조선 총독을 비롯해서 주요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이광수선생님 장편소설 무정에 나오는 신문기자 신우선의 모델을 심우섭으로 할 만큼 춘원과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초대 제2방송과장 윤백남 선생님과 매일신보에 기자생활을 같이 하신 분이고 여운형, 최남선, 노창성(최초의 방송인)등과도 서울 계동 100변지, 이웃에 살면서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상록수로 널리 알려진 심훈의 큰형님이며 최초의 동요 반달로 널리 알려진 윤극영 선생님의 고종사촌 형님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이 제2 방송과장을 하실 때는 일제의 교육을 받은 아나운서들이 우리말에 서투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에게는 방송에서 잘못된 문법이나 발음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방송국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말을 바르게 써야 조선인들이 바른말을 이어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는 물론, 집에서나, 술자리에서나 늘 방송을 들으면서 잘못된 방송을 할 때는 전화를 걸어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경성방송국에서 선생님을 모셨던 이혜구 선생님은 (2010년 1월 102세 사망) 1970년에 발행된 그의 저서 문채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심 선생님의 한자 읽기에 대하여 하도 심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에 그 후 아나운서들은 자전을 방패로 방어했다. 하루는 서순원 아나운서가 “팽대를 하사 하셨다” 는 뉴스를 방송하고 나서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 아니나 다를 까. 과장이 얼굴은 안보이지만 전화 틀 속에서 “너 지금 그 팽대란 것이 무엇이냐?” 질문 반 꾸지람 반조로 물었다.
아나운서는 태연하게 대답하여 왈 “상처를 감는 헝겊 말입니다.” “아! 붕대 말이로구나! 그게 붕대지 팽대라면 알 수 있나?” 서 아나운서도 지지 않고 항거 하였다. “아닙니다, 확실히 팽대입니다” “그건 붕대라고 해야 해” 아나운서는 얼핏 자전을 방패로 내세우고 그 밑에 머리를 감추었다. “자전에는 분명히 팽대라고 쓰여 있는데요!” 이튿날 그것이 화제가 되어 鏰 자를 자전에서 찾아보았더니 과연 팽이라고 쓰여 있어 누가 옳고 그른지 몰라 모두 서로 눈만 바라보았다. 과장은 집에 한가히 있을 때는 물론 금천옥에서
우리하고 안주잔을 들때에도 7시나 9시 반 뉴스시간이
되면 라디오를 틀어 놓고야 우리 좀 들어보자. 하고 조용히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동안 주흥이 깨지는것은 물론이었다.
다 듣고 나면 대청 기둥 전화통 앞으로 가서 담당 아나운서를
전화통 앞으로 불러내고“ 야 너 오늘 잘 했다. 끝마치고 술
먹으러 오너라.” 하고 칭찬하던지 또는 “ 오늘 여기
여기는 틀렸다” 고 틀린 점을 지적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식은 술을 빨리
데워 오라고 재촉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일제 강점기 중에서는
심과장 시절이 가장 재미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중일전쟁이 격화되던 1939년 이때는 경성중앙방송국의 직제가 개편되어 우리말 방송을 하던 제 2 방송과가 제 2 방송부로 승격되던 해였습니다. 우리청년들을 끌어다가 전쟁에 활용하려던 일본은 말이 통하지 않아 우리 동포들에게 일본말을 가르치기에 혈안이 되었고 그 방편의 하나로 우리말 방송에서 일본어를 섞어 방송하도록 지시를 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엄격한 지시였지만 선생님은 이를 묵살하고 결국 그 자리를 물러나셨습니다.
이 무렵에 제 2 방송부는 발족했지만 그 전에 방송국을 나와 그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고 이혜구 선생님이 제2방송부 편성과장으로 발령 받으면서 잠시 직무대리를 하다가 함흠방송국장으로 계시던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선생님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던 제 2 방송부장을 하셨습니다.
심우섭 선생님은 방송극 퇴사후 1941년 8월에 다시 매일신보로 돌아가 이사대우의 편집고문릏 하셨고 43년에는 고문으로, 44년에는 이사대우(촉탁), 55세인 45년에는 이사대우로 계셨고 1646년 1946년 3월 6일 서울 계동 자택에서 사망하셨습니다.
국사 편찬위원회에 천풍 심우섭선생님에 관한 글이 비교적 자세히 수록되어 있어서 종합 해 보겠습니다.
1890년 12월 11일 京畿道 始興郡 北面 里石里 176에서 3형제중 큰 아들로 출생, 제 1회 京城 徽文義塾 졸업하고 1912년 보통 문관 시험에 급제해서 1913년 鷺果津 恩露學校 교사가 되었다가 5개월만에 퇴직하고 每日申報 기자가 되어 지방부장을 지냈고 1919년 퇴사할 때는 29세였습니다.
1920년에는 계명구락부 활동을 했고, 1921년 4월 불교협회 설립을 위한 발기인 총회에서 평의원으로 당선도 됐습니다. 1924년 경성부 안국동에 보통학교 강습원을 설립하고 자택에 낙천사(樂天舍)라는 학생 기숙사를 경영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그 가옥을 당시 3만엔에 매도하고 조선여자교육회의 고문이 되었습니다.
1927년 4월 제3회 경성부 학교 평의원 선거가 실시돼 유권자 5612명 중에서 2613명이 투표해 당시 계명구락부 회원이던 심우섭외 19명이 당선됐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4월 3일자)
키 5척 3촌으로 얼굴이 긴 편이고 하얀 피부에 코가 높음, 배일사상을 품고 때때로 정치에 관계된 일을 언급고 과격한 언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매일신보에 쓴 선생님의 글들이 정리되어 있어서 옮겼습니다. (글쓴이 성명미상).
○소설 연재물
1.형제-1914년 6월 11일~7월 18일(32회) 2.주(酒)-1914.9.9~9.16(7회) 3.산중화-1917.4.3~9.19(127회)
○수 필ㆍ기행문ㆍ기타
1.영동기행-1916.6.17~7.5(8회) 2.일단집 신년-1917.1.1 3.해인사 수행기-1917.4.24~26(3회) 4.정호기-1917.11.17~12.7(13회) 5.수감소록-1917.11.25 6.정호여록-1917.11.28~12.1(3회) 7.대정수리과 불이농장을 참관하고-1918.6.1~2(2회) 8.석농선생이 가시도다-1921.5.28 9.백두기행-1921.8.12 10.백두산기-1921.8.28~9.7(9회) 11.심양소화-1921.12.28, 1922.1.3
○좌담회
1.창간 이래 34년-본사 선배의 좌담회-1938.5.5
○춘원과 관련
1.오도답파여행-1917.6.29~7.30
○육당 관련(심이 일본 갈 때 육당이 붙이는 글)
1.송천풍심군 남정서-1917.3.9~10(2회)
○신소설 간행
1.형제-1921.11.25. 영창서관 발행함
○기타
1.조선의 풍자와 해학을 말하는 좌담회(잡지 조광 1941년 5월호)
1920년 3월 26일(금요일) 일기---
전날인 25일은 심훈 이혜영 부부의 4회 결혼 기념일. 오늘이 형식군이 졸업하는 날이라 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갔다. 식이 비롯된 뒤에 '군O대'를 하는데 대단히 불쾌하였다. 어째 그런지 졸업식이라고 그리 정숙한 맛이 솟지 않고 다만 이따금 이따금 황천으로 간 매부의 생각이 날 뿐. 월탄, 유 양군과 대관원으로 가서 요리 3원어치를 같이 먹었는데 15전이 부족되어 창피하였다. 돌아와 일과표를 써놓고 밤에는 희승군에게 한글을 배우고 돌아오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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