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경성방송국과 시노하라 쇼죠(蓧原 昌三)

이장춘 2010. 3. 20. 05:37

 

 

 

 

경성방송국과 시노하라 쇼죠(蓧原 昌三)

 

경성방송국이라는 이름이 있기도 전

우리나라에서 방송을 해야 되겠다고 해서

 최초로 선임된 분이 체신국 공무원 시노하라였고

이때 합류한 분이 노창성님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은 이 두

분의  손을 거치면서 현실화되기 시작

했습니다. 시노하라님이 일본인이었기에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쓰려는 마음으로

 시노하라에 관한 글을 씁니다.

 

 

매년 3월에 NHK방송개시 기념일이

성대하게 열리고 있는바 방송 발상지인 시바우라

 (芝浦) 방송소를 새파란 시노하라가 명을 받들어 견학하게

된 것이  조선의 방송 무선전화의 요람시대를

열게 된 동기가 되었다. 

 

 1981년  조선방송협회 회상기에

시노하라가 쓴  발간 사의 일부분입니다. 

시노하라는 일제강점기 체신국 공무과에 근무하는

 기술자였습니다.  1920년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방송을

 실시하면서 일본에서도 방송국 설립 관심이 높아져 ,

1924년 전후 시험방송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일본을 찾아  방송시설을 견학하고

 방송국 설립 실무적인 구상을 하면서 기계를

 들여오고 시설을 하고 시험방송을 시작 하신분이

 시노하라와 노창성님이었고 정동방송국 건립을

전후해서 한덕봉님이 기술자로

참여 하셨습니다.

 

시험방송기를 거쳐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이 개국 했을 때

시노하라님은 기술부 주임으로 기술책임을  

맡았습니다.  해방되어 경성방송국이 사라질 때 까지

기술책임 직책은 변함이 없었고 1943년 항일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으로 경성방송국장이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겸직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경성방송국장과 조선방송협회

기술부장,  이사를 겸직하면서 이 땅의 방송을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2차 대전

패망으로 일본의 경성방송국이 사라지면서 남은

임무는 방송국을 한국인에게 안전하게

넘겨주고 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1943년에 경성방송국에

들어와 6,25직전까지 KBS에 간부로 근무하셨던

 언론학자 고 이덕근님은 1971년 6월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방송 50년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방송국장 겸 기술부장이던 시노하라는

전국 각 지방방송국을 향해 -여러분 이제 한국은

 독립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설을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한국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하고 과학자다운

 말을 했다.  이덕근님의 글이었습니다.

 

1945년 9월 한국인들로

방송 인수책임자가 선임되었고

조선방송협회의 한국인 간부가 선임되면서

조선방송협회 일본인들은 필수요원 일본인

아나운서 한사람만을 남기고 모두

해임되어 돌아갔습니다.

 

일본 각지에 흩어져 살던 이분들이

 1972년 조선방송협회를 결성하고 해마다

모임을 가져 왔으며, 모임을 거듭하면서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서 방송을 하던 얘기며 살았던 얘기,  또 패망 후

우리나라에서 철수 하던 얘기, 일본에서 살아온 얘기들을

엮어 1981년, 조선방송협회 회상기라는 책을 발간했고

이런 일은 시노하라님이 주도적으로 했습니다.

 

 

시노하라님이 패전 후 처음으로

 1971년 6월,  우리나라를 다녀갔을 때

우리 방송인들은 일본인과 서로간의 사상과

입장은 달랐지만 인간적인 정은 나누었습니다.

조선방송협회 회상기 글을 옮깁니다.

 

서로 비운의 눈물을 흘리며

해어진 경성의 거리, 조선 동료들 얼굴은

언제까지나 뇌리에서 살아지지 않는다. 그리운

경성과 옛 종료들과 감격의 재회가 1971년 6월

실현되어 숙원을 이룰 수 있었다.

 ........중 약..............

 

그날 (6월 28일)밤은 옛 정무총감

자리에 세워진 영빈관인 코리아 하우스

 환영회에 참석했다. 26년 만에 만나는 옛 동료들의

환영을 받으며 감격의 건배와 추억담을 나누며

옛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종전과 동란을 겪은 혼란 속에서

서로 왕래가 없었던 많은 옛 동료들이 나의

 방한을 계기로 재회해 이야기꽃을 피우며 JODK

당시를 회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며 앞으로

 서로 왕래하며 친교를 다져 가자는 약속을

 하게 된 것이 이번 나의 방한 최대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시노하라님은 조선방셩협회

회상기가 발간 될때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를 나녀 가셨다고 했고  처음 다녀가신  

그 다음해, 1972년에  조방회(조선방송 협회)가  결성

되었습니다.  늘 한국을 마음속에 안고 살았던 시노하라님은

1986년 급성 폐염으로 향년 90세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딸 미야사카 미사오 (宮坂 節 -예명 蓧 慧子)씨가 써서

2006년애  발간된  환상의 방송국 -JODK- 

글을 인용합니다.

 

"1987년 9월 3일 서울에서 한국방송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시노하라 쇼죠(蓧原 昌三)가 급성

폐염으로  타계한 다음 해의 일이었다.   장소는 정동의

조선방송협회 자리였고 비에는 그(시노하라)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오빠 부부가 대신해서 출석했고 함께

참석한 그때의 아나운서 고가 도에(高賀 登惠)가

그때의 글을 써 주어서 고마움을 표합니다. 

 

 

 

1972년에 구성된 조방회와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방우회)는

오랜 기간 교류를 갖다가 조방회의 많은 회원들이

 세상을 뜨시면서 조방회의 자료를 비롯한 제반 사항은

사단법인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에 이관했고 조방회의

 실무적인 일을 맡아 보던 사무국장 나가노 후꾸 오님이  2007년 

4월 19일  세상을 뜨심에  조방회는 사실상 해체

되었습니다. 글을 계속 보완 하겠씁니다.

 

 
 
*. JODK는 경성중앙방송국의 호출 부호이고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는 우리나라에 있던 모든 방송국을
어우르는 방송기구였습니다.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는
1948년 9월까지 있었고 1948년 10월부터 방송국이  
국영화 되면서 조선방송협회는 대한 방송협회로
이름이 바뀌어 존속돠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세쩨 딸 미야 사카 미사오(宮坂 節, 예명 蓧 慧子)와 함께 한 사진입니다(1961년 촬영).
미야 사카 미사오는 1933년생으로 2006년 환상의 방송국 -JODK-를 썼습니다. 
 
위사진은 1971년 시노하라님이 우리나라에 오셨을때
방우회 원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가운데 검정양복잏으신분이
시노하라님이고 그 왼쪽에 당시 문공부의 기감 이인관님, 전 방송관리국장 이규일님,
HLKZ창시자 황태영님, 방우회 회장 문시형님이 보입니다. 뒷줄 왼쪽 두번째 한기선님,
유병은님, 이종훈님, 오른쪽 맨끝분은 성기석님 다른분들은 한, 두분을
제외 하고는 방송국에 계셨던분들이 아닌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