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중계방송의 개척자 박충근 아나운서박충근님은 남자 아나운서로는 두 번 째로
1931년에 경성방송국에 들어와 특출한 스포츠 중계방송으로 스포츠 열기를 확산시킨 주인공이고 특히 축구 중계방송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습니다. 남자 아나운서는 남정준 아나운서와 두 사람밖에 없던 시절에 밤, 낮없이 바쁜 생활을 하셨던 박충근 아나운서가 떠난 후 방송국은 한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1907년생인 박충근아나운서는
경성법학 전문학교시절 축구와 야구
선수였고 육상 단거리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1931년 공개 채용시험에서 32명 응모자 가운데
한명을 선발한 아나운서 시험에서 합격해 들어오셨습니다.
이 얘기는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님이 그때 경성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을 보아 필기시험에서 1등을 했지만 음성시험에서 박충근에게
밀렸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밀린 심훈님은
3개월 후에 방송국에 들어와 교양 프로그램을 담당 하셨지만
사상문제가 있어서 그만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박충근 아나운서가 방송국에 들어올 무렵
스포츠열기가 대단 했습니다. 이때 마침 조선어
전담방송 채널 제2방송을 실시하게되어 제2방송은
거의 날마다 스포츠 중계방송을 편성했고 야구와
축구 중계방송이 많았습니다.
일본의 각 방송국에 비해 경성방송 제2방송의 스포츠 중계방송 비율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이것은 스포츠
열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양방송 이라는 미명아래
황국 신민화를 기하려는 조선총독부 시책 에 대한 반발을
잠재우고 회유책이기도 했습니다. 이때스포츠중계에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사람이 박충근 이었습니다.
한국방송 50년사 글을 인용합니다.
스포츠 시즌만 되면 당시 조선 축구협회가
주최한 전 조선 축구대회가 해마다 열려 연희전문,
보성전문, 경성의전 경성, 평양, 함흥, 측구단들이 열띤
리그전을 벌렸으며 이밖에 경성, 평양, 함흥 세도시 대항
축구전과 경평대항 축구전이 번갈아 개최되어 일요일과
그밖의 공휴일에는 하루 네 시합의 연속 중계방송을
하는 하는경우가 많았다. 이때 스포츠 중계방송
아나운서는 법학전문 학창시절부터 아나운서
흉내 내기로 여흘 할때마다 박수를 받던
박충근이 비범한 수완을 보였다.
그때만 해도 조선말로 각종 운동경기를
중계방송 하는데는 많은 애로가 있었습니다.
스포츠 용어가 제정되지도 않았고 또 일반적으로
대중화가 되지 않아 아나운서가 독자적으로 방송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향이 많아서 방송을 가늠하기 어렵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어쨋던 박충근 아나운서의 초기
중계방송은 일본인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멈추게 했습니다.
스포츠 중계방송의 선구자 박충근 아나운서는
축구와 야구 권투중방송에 있어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고
그끄때까지 중계방송은 이 세 종목에 국한되었습니다. 1964년
8월 1일자 공보부 방송조사 연구실에서 발간한 방송 제 4호에
박충근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이때의 글은 언론학교수
정진석박사가 조사 연구실에 근무할때 박충근
아나운서와 인터부로 실린 것입다.
그글을 요약 인용합니다.
박충근 아나운서의 인상적인 권투 중계방송은
필리핀의 보비월스와 일본의 多賀一郞 선수와의 경기가
가장 화려했던 것으로 당시 보비월스는 살인적인 펀치력을
가진선수로 그 시합 얼마전에 일본 권투선수를 KO시켜 KO당한
선수가 사망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이번 시합은그 복수전이기도
해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중계석이 링에바싹 붙어 있어서
복싱으로 이가 빠져 뱉은 피가 중계석까지
튀어와 옷을 버리기도 했었다.
그는 권투 중계방송을 성공키 위해서
조선 권투구락부에 들어가서 몸소 규칙을 배워가며
모든 규칙에 정통케 되어 심판도 볼 수있는 정도가 되어야
중계방송을 할 수있는 것이라고 후배들에게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노정팔 선생님의 한국방송과 50년의 글을 인용합니다.
박충근은 학창시절부터 말솜씨가 뛰어나 여흥이나 좌담하는 자리에서 사회 보는 것을 즐겼고
스포츠를 매우 좋아해 야구,축구 등의 교내선수로 뽑혀
활약 할 정도였다. 아나운서 흉내 내는 것을 좋아해
경기진행 중 실황중계 하는 시늉을 하면서
아나운서 수련을 쌓았다.
이러한 것이 인연이 되어 끝내 아나운서가 되었고 소질을 발휘하여 명아나운서가 되었다.
이 때는 방송초기인지라 스포츠 중계 교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끌어주는 선배도 별로 없어 일본 방송중계를
유일한 스승으로 삼아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워낙 스포츠 만능에 말재주가 있어 쉽게 중계방송에 익숙해 질 수 있었다. 권투중계 때는 일부러 권투 클럽에
가입해 일부러 선수 노릇을 하면서 중계방송을 연구 했다.
이 얼마나 열성적 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부문이다. 노정팔님의 글 이었습니다. 조선일보 1934년 19일
박충근 아나운서가 방송국을
떠난것은 정확치 않습니다. 위 기사를
보면 1934년에 떠난 것으로 보이지만 1935년
부산방송국개국 초기에 그곳에 근무 하다가 1936년
9월 7일 방송국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고 어느
신문사 체육부장을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註:조고게란 신문사를 말하는
것으로 필자가 생각컨데 이때 방송국을
떠난 박충근은 신문사로 갔다가 부산방송국 개국
아나운서로 복귀해서 1936년 9월까지 근무한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가 보유한 박충근 사진에
1936년 7월 29일, 'JODK'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면 그의 이력서에 있는
1936년 9월 7일까지 근무한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박충근님의 증손이라면서 댓글을
써 놓은적이 있는데(뒷 부문에 원문이 있음)
앰파스 불로그가 폐쇄되면서 연락이 없습니다.
박충근 아나운서에 관한 얘기를 아시는 분은
말씀 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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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중계방송의 개척자 박충근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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