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경성방송국을 창설한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님

이장춘 2010. 3. 14. 18:56
 
 
 
경성방송국을 창설한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님

 

노창성님은 우리나라에 방송국 설립을

구상하던 1924년 초 부터 방송에 힘을 기울이신

 분입니다. 시험방송을 위한 기계를 들여오고 시설을

했으며 시험방송을 했습니다.   님은 한국인

최초로 전파에 그 목소리를 실었습니다. 

 

경성방송국의 개국기간에  라디오방송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알렸고,   라디오 제작과 

보급을 통한 방송국 경영개선에 앞장섰습니다.  

조선방송협회의 사업부장, 함흥방송국장, 우리말  

전담 방송  제2방송부장, 6.25전시 중앙방송국장,

방송 관리국장등 우리나라 방송초창기에

방송을 이끌어 오신 분입니다.  

 

 

 
 
1897년에 3월 25일 테어나 고아로 자란 님은
만주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나왔고 일본 구라마에(藏前)
공과대학 전기과를 졸업하신 분으로  전자공학에 조예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방송국 설립을 위해서 총독부 체신국에서 채용한 분으로 직책은
공무과 기수였습니다.   1924년 초 부터 일본인 시노하라 쇼죠님과 함께 
(시노하라의구라마에 2년 후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방송국 설립에
 임했고 2년 3개월간 시험방송을 했습니다.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문을  열때는 기술부 직원으로 출발 하셨습니다. 
 
라디오 만드는데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님은 라디오 청취자에 대한 서비스 제도를 제일먼저
창안했고 요즘의  애프터 서비스제도로 필요한 곳을 돌아 다니면서 
고장수리나,  안테나 설치도 해주고 라디오  상담소를 설치해서 
궁금증을 풀어주었습니다. 라디오 연구회를 창설해서
라디오에 관한 지식과, 제작기술을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방송국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방송초기  라디오 보급을 맏던 가입부는
총무부로  통폐합 되었지만 이때 가장 급선무였던
 라디오 보급업부는 더 힘을 기울여야 해서 기술부에
근무하던 님은 총무부로 옮겨   라디오에 관한  지식을 
전파하고  방송국에서  라디오를 직접 만들어 보급하거나  
라디오 제작기술을 가르치는 등의 일을 중점적으로 하면서
 경영개선에 힝을 기울이셨습니다.   이때 라디오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전자회사를 만들거나 라디오 기술학원
또는 학교를 세워 이나라 전자 산업의
기초를 쌓기도 했습니다.
 
 
1932년 이중방송 실시를 앞두고  
조선방송협회 안에 사업부가  새로운 직제로
도입되면서 초대 사업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선인으로
 부장이 되는 것은  파격적인 것이었고 아울러 님은
경성방송국의  보직을 갖은 최초의
방송인이 되셨습니다.
 
 
이중방송 실시후 방송국 운영이
어느정도 정착되었을때 1938년 5월에는
함흥방송국 건립책임을 맡았고 그해 10월 30일
함흥방송국이 개국 되면서 한국인 최초의
방송국장이 되셨습니다. 
 
얼마 안 있다가 1939년 직제가
개편되어 조선어 방송을 전담하는 제2방송부가 
새로 마련되어 제2방송부장이 되었습니다.  님이 제2방송부장
재직중 방송사에 가장 큰일로 받아 들여진 항일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해서 이에 관련된 350여명의
인사가 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겪었고 75명이
실형을 받았는가 하면 옥중에서 사망하신분도 6분이나
되었습니다. 그때 일본인 경성방송국장과 함께 님께서도
방송국을 물러 나셨고 제2방송부는 폐지 되었습니다.
 
해방되고 이혜구선생님, 홍양명님, 
 이관희님등이 중앙방송국장을 이어 가다가
1949년 8월 이혜구님이 다시 중앙방송국장을
하셨지만  3개월 후인 1949년 11월 노창성님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다음해 1950년 6.25가 일어나고
방송국이피난을 가면서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 
중앙방송국장을 하시면서 피난지에서 방송도 하고
제주, 남원에 방송국도 세우고, 대전, 대구에 출력을
 대폭올려 500W를 10Kw로 확장 했으며 전쟁으로
파괴된 방송국을복구해서 방송을 실시하는 등
 방송국을 잘 이어 가셨습니다.
 
1953년 환도와 함께 정부직제가
개편되어 공보처 방송국이 방송관리국으로
되었고 노창성님이 첫 방송관리국장이 되셨습니다.
우리나라 방송을 제 괴도에 올려 놓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시다가  1955년 1월 9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1956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어 제적등본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55년

 1월에 세상을 뜨셨다해도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더 학인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1943년 항일 단파방송으로 방송국을
떠나신 뒤 사업을 하시다가 어려움을 겪으셨고
1955년판 대한 연감에는 동양전선 주식회사
생산부장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님의 둘째딸 노라노
(본명 노명자)님의 글을 올렸습니다.
 
 
 
 
 아버지 노창성에 관한 얘기/ 노라노  

 

 

아버지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다행이 만주에서 큰 여관을 경영하는 일본인 여사장의

 구원을 받아 만주에서 학업을 시작 할 수 있었다.  대학 진학은

 조선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게 됐다.

 

우수한 성적으로 구라마의 공업대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총독부에 취직이 되어  체신부 소속으로

 방송 기술과 시설에 힘을 기울였다.  1924년 12월 처음 시험방송을

 할 때만 해도 여기에 참여한 한국인은 오로지 아버지 한 사람

뿐이었다. 시험방송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한덕봉씨가 

기술자로 참여했고,       후에  방송 제작 연출가로

최승일씨(무용가 최승희씨 오빠)가 합류했다.

 

어머니(이옥경)가 아나운서로 취직 했고

 뒤를 이어 마현정씨가 개국을 한달여 앞두고 합류했다.

방송 구상 단계부터 시험방송, 개국까지 일본인 시노하라씨와

나의 아버지 두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기계를 사다가 설치하고

 그리고 방송을 해야 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세워가며 방송국 살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1926년 문을 열려던 방송국은 그해 말

일본천황이 세상을 뜨는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소

미루어져 1927년 2월 16일에서야 개국을 할 수 있었다.

방송은 우여곡절 끝에 시작 됐으나 방송국을

 운영하는 재정적 뒷받침이 문제였다.

 

라디오 청취료로 방송국을 운영해야 하는데

 당시 라디오 대수가 통틀어 2,000대에도 못 미쳤었다.

 아버지는 기술부에서 총무부로 발령이 나서 라디오 보급 업무를

맡게 됐다. 미국제 좋은 라디오는 한 대에 쌀 50가마니 값을

더 주어야 하는 때라 일반 사람에게는 라디오를

소지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던 때였다.

 

아버지는 라디오 보급을 위해서

우선 라디오 강습회를 주기적으로 열어서 라디오를

 싸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한쪽으로는 라디오 상을

열게 해서 라디오를 싼값으로 보급이 되도록 힘을 썼다.

아버지는 청취자에 대한 서비스 제도를 착안했고

오늘날의 AS 애프터서비스 제도를 마련했다.

 

 필요한 곳을 돌아다니며 고장 수리나

안테나 설치 등 라디오 상담소를 설치해 많은 효과를

보게 됐다. 그러나 라디오 보급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방송국에서는 방송을 일본인 위주로 해서 보급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고 새로이 조선어 방송 채널을 마련 해 조선방송협회가

 발족했다. 회장 직속으로 사업부가 생기면서 아버지

노창성은 사업부장으로 임명됐다.

 

그 후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방송국 재정이 많이 좋아져 방송 제작비 걱정은

끝이 났다. 정동에 있는 경성방송국 옆에 따로 방송협회

건물이 섰고 연구소와 사무실을 분리해서 쓰게 되고 또 명동

증권 거래소에 있던 사업부도 새 협회 건물에 합치는 등

 모든 것이 정리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1938년 5월 아버지는 함흥 방송국장으로

 발령이 나 함흥에 방송국을 새로이 설치하러 함흥으로

 떠났다. 사업부장이 방송국장으로 임명되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았으나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방송국장으로

 임명된 조선인은 그 후 김학만씨 한 분 뿐이었다.

 일 년 남짓 후 조선어 전담부서로 제2 방송부가 생기면서

다시 아버지를 본부로 불러들여 제2 방송부장으로 임명했다.

 아버지는 2차 대전 중에도 조선말이 위축되지 않도록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여 고문으로 앉히고 반일운동으로

직장을 잃은 그들을 보호하며 민족문화

계승에 힘을 기울였다.

 

정비석, 백철, 한운사 모윤숙 여사 등이다.

러나 2차 대전이 말기로 치닫고 있던 무렵 방송국의

큰 일이 벌어졌다. 당시 단파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단파 방송으로 내외 연락운동을 하던 독립지사들이 검거됐다.

1943년 일 년 동안 관련자들이 끌려가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됐다.

 

 

방송국 직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라디오 상회 기술자들 허헌, 송남헌, 홍익범 등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고 56명이

형을 받았으며 6명이 옥중에서 사망했다.

 

항일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

(抗日短波放送 海內外 連絡運動) 이란 미국의

 VOA, 중국 중경의 단파 방송을 듣고 해외 소식에 어둡던

국내 애국지사들을 비롯해서 뜻있는 사람들에게 해외 소식을

전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 독립 운동사의 큰 사건으로

기록 된다. 당시 직원으로 근무하던 모윤숙 여사(시인이자

제2방송부 편성원)도 투옥 됐는데 아버지의 

노력으로 무사히 풀려 날 수 있었다.

 

 

모여사가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나를 보시고

 “그래 노국장이 감옥으로 나를 풀어주러 밤늦게 오셨었지.”

하며 옛날을 회상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이 사건으로 제2 방송부가

 폐지되고  아버지는 책임을 지고 퇴직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정부가 수립돼

일 년이 넘었으나 방송국을 이끌어 나갈 인물이 없어서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직접 아버지를 불러 방송국을

 재건 할 것을 부탁했다. 1949년 11월 KBS 중앙방송국장으로

 임명된 후 채 자리를 잡을 시간도 없이 6.25가 발발해

피난방송국을 이끌고 서울에서 대전으로,

대구로, 부산으로 이동했다.

 

 

1953년 정부가 서울로 돌아와 전국의

방송국을 총괄하는 관리국이 발족해 방송관리국장을

 지내게 됐다. 6.25전쟁 중 이동방송국을 이끌고 전국을 누비며

과로하신 탓으로 환도 후 발병 해 1955년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희망과 꿈은 다른 나라처럼 우리나라 방송이

 민영화 되는 것, TV방송국을 설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찍이 종로 지금의 보신각 자리에 있던 

TV방송국 HLKZ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설치되었으나

 뜻하지 않은 화재로 얼마 안 돼 문을 닫게 됐다. 아버지가

 좀 더 생존하셨다면 우리나라 방송이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됐을 것으로 믿는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