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정항구 방우회 사무총장님 영면하심에, 명복을 빕니다.

이장춘 2024. 6. 6. 18:55

 

 

이 글은 2024년 5월 24일 정항구 선생님이 영면하심에

춘하추동방송에 올라 온 글을 정리했습니다.

 

 

 

정항구 선생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그토록 일생을 잠시도 쉴 사이 없이 바삐 사시며 방송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신 정항구 선생님이 2024년 5월 31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 시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 선생님은 저 세상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이 글이  선생님 생전에 제가 쓴 마지막 글이 되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님의 생전에 제가 쓴 마지막 글을 함께 올려드립니다.

「정항구님, tv방송국에 충계차가 없어 옛날 이동방송차를 tv중계방송차로 만들어 10 여 년간 tv중계방송을 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FM방송 서울 FM방송국이 있었어요. TBC로 갔다가 지금도 KBS에 그 채널이 있습니다. 정항구님이 설계해서 세운 방송입니다. 말씀으로는 겪었던 모든 얘기들을 다 하시는데 그런 얘기를 기록으로 못 남기신다는 거예요. 왜냐고요? 글 열 줄만 쓰면 앞에 쓸 말 뒤에 쓸 말이 뒤죽박죽이 되어 다른 분들은 그 내용을 모른 다는 거예요. 제가 가끔 그분의 말씀을 인용해서 글을 써 올렸는데, 어느 날 저에게 「네이버에서 정항구를 검색 해보니 54건이나 되더라.」는 겁니다.」

저는 6월 1일 전화도 받지 않고 카톡도 매세이지도 받지 않고 있다가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문자 매세이지를 통해서 님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음을 알고 빈소로 찾아가 영전에 명복을 빌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못 이룬 꿈 저 세상에서 이룩하시옵소서!

 

 

머리에 있는 이 사진은 2011년 12월 31일!  KBS -TV 창립 50주년 특집 생방송의 서막 남산 TV송신소에서 생방송으로 5분간 방송 TV방송 개국요원 황우겸 선생님과 정항구님,  황우겸 선생님은 KBS-TV 초대 아나운서실장이었고, 정항구님은 최초의 TV중계방송차를 조립했습니다.

 

님이 직접 쓰신 글 한편 올려드립니다.

 

우리나라 最初의 FM放送局
               서울FM放送 株式會社
資本金 \3,000,000.- 으로 發足
南山의 鐵搭建設時 \6,000,000.-으로 增資

放送許可條件
  1. 送信周波數는 103.5MHz, (送信輻射出力은 1KW)
  2. ST-LINK는   89.1MHz,  (送信輻射出力은 50W)
  3. 뉴스는 KBS를 中繼한다

設立의 主催는 劉萬俊 (KBS 延禧送信所出身 當時는 納品業者로 協同이란 企業體를 運營)과 最高協力同伴者로는 李承雨 (KBS江陵技術課長時 企劃하고 任地에서 辭職)

李圭一 (公報室 放送管理局長 出身으로 推戴로代表理事에 就任)
崔신욱? (김신옥?) 公報室 出身 監事에 就任
株式發行은 \500.- 券 6,000株 發行
株式配分은 劉萬俊     30%   資本金 增資後    15%
           李承雨     25%                    12.5%
           李圭一     25%  (功勞株)          12.5% (功勞株)
           최신욱     10%  (功勞株)           5% (功勞株)
           劉萬俊夫人 10%                     5%
事務擔當   金承鎬 (公報室 放送管理局 出身)

其他 李鐘錄? (KBS延禧, 警察, 外務部 外信課 出身)
技術總括責任은 李承雨 (制作工場, 送信所 送信機 製作)
演奏所 建設工事 責任은 鄭恒坵
工事參與者 李鳳和, 金弘經, 車崎福, 楊弘悅, 申元鎬, 李秀榮 

처음 準備時는 鐘路에 所在한 한청빌딩으로 記憶함.
演奏所는 영안빌딩5층에 設置 그 理由는
루네상스라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많은 RECORD LIBRARY를 所有  한 音樂感想室이 6層에 있었기에 初創期에 도움이 必要했고 當   時 送信機는 STEREO로 準備되어 있었기에 

周波數가 바뀐 事由
當時에는 FM Tuner란 國産이 없었고 美軍 PX로부터 나오는 것이 전부 였던바 어떤것은 美國標準周波數帶 (88MHz ~ 108MHz)와
日本標準周波數帶 (75MHz ~ 90NHz)로 主送出周波數103.5MHz는
美國式 Tuner만이 受信可能하므로 當局에 陳情 主周波數 89.1MHz
輻射出力1KW, ST-LINK 周波數 103.5MHz 輻射出力 50W로 된것임.

韓龍熙 (KBS 編成係 主事出身)
       放送編成員으로 入社 (一次不渡直前)
曺應天 (美國 Indiana 大學에서 眞空管의 三定數 理論로 物理學          博士 學位를 받은 분으로 平壤에서는 崇實中學에서 物理          敎師로 在職 當時弟子로 康贊宣 桂壽慶 (이들은 同期同          窓으로 後者는 陸軍通信將校 中領出身) 朴能祥 解放後           軍政廳 首都警察廳通信課長을 다시 陸軍中領으로 任官           陸軍通信監 遞信部次官 光云電子工大 初代學長을 歷任하          였던분 個人的으로는 本人의 論文 飜譯을 指導한 분으로          特히 本人의 結婚式 主禮를 맡아주신 잊지 못하는 한분          임 그리고 電子界에서는 尊敬받는 大先輩임)
        顧問으로 就任
鄭馹模 (KBS 延禧送信所出身으로 陸士七期로 陸軍通信將校로
       通信次監인 陸軍大領出身)
       放送局 發起와는 無關하며 처음은 副社長으로 就任하였으         나 後에 社長으로 그리고 李圭一氏를 監事로
金慶元 (倭政下 元山放送局 KBS 延禧送信所出身으로 海軍通信將         校로 海軍通信次監인 海軍中領出身)
       理事로 就任.
申鳳淳 (倭政下 大田放送局 KBS 延禧送信所出身으로 陸士八期로         陸軍通信將校로 陸軍中領出身)
       企劃室長에 就任.

當時 FM (Frequency Modulation = 周波數變調)이라는 것은 理論은 그전부터 있었으나 美軍의 軍用裝備가 FM이 있었고 HLKZ TV局으로 因하여 TV의 音聲 CHANNEL이 FM이므로 FM을 들었기에 音樂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FM放送을 渴望하였고 特히 AFKN (Armed Force Korean Network)에서의 FM放送은 魅力的이였고 이웃나라 日本은 放送은 勿論 個人的인學校放送 (東海大學)도 있어 本人도 現在의 光云電子工高에 類似한 放送局을 開局코저 學校屋上에 鐵塔을 準備하였고 裝備를 準備하고자 하였으나 4.19의 政變과 더불어 5.16까지 지나는 사이 計劃데로 안되어 失敗한 經歷이 있어 KBS出身 Engineer가 다모여 放送을 開局하는데는 뜻이 있다하여 몇 年間 生活費는 생각지않고 沒頭한 事實이 아직도 後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記錄이나마 있었다고 放送歷史에 남겼으면 하는 所望입니다. 勿論 本人이 關與하지 않았다 하여도 HLKZ-TV도 말압니다.

參考로 AM (Amplitude Modulation = 振幅變調)
FM (Frequency Modulation = 周波數變調)하는데 周波數 帶域으로 說明하면 中波 (MW = Medium Wave 525KHz ~ 1,650KHz) 短波(SW = Short Wave 1,650KHz ~ 30MHz) 超短波 (VHF = Very High Frequency 30MHz ~ 300MHz) 極超短波 (UHF = Ultra High Frequency)等等이 있으며 當時 우리의 技術水準은 40Mega Band를 始作으로 南山에서 延禧까지 45.3MHz 貞洞에서 水原까지는 44.1MHz 貞洞에서 春川까지는 46.3MHz이라고 記憶되고 中繼車는 88MHz로 中繼하였으나 이것은 FM이 아닌 PM (Phase Modulation = 位相變調로 FM을 數學에서 微分이라고 하면 積分에 該當되며 이 PM方式을 2-CHannel을 各各 135도 位相差를 두어 合成하면 AM 卽 振幅位相變調 (APM = Alplitude phase Modulation)가 되어 電力을 半으로 줄이는 AM方式 送信機가 誕生됩니다.

지금 現在 우리가 使用하는 높은 周波數帶는 GHz (Giga Hertz)이므로 隔歲知鑑을 느끼게 합니다.
結論的으로 말하면 AM FM APM 等은 變調方式으로 現在 放送用語로 使用된 AM FM 等은 正誤를 말한다면 틀린 것입니다.

美國에 가신지가 한 열흘 가까이 되어 時差 適應이 어느 程度되었다고 봅니다 몸조심하시고 健康하게 만납시다.

 

KBS-TV (2011년) 50년 특집 다큐멘터리 촬영장면

 

 

정항구 엔지니어, 전영우 아나운서 국회 개원식 실황중계 1960년,  두분은 경복고등학교 선 후배임. 전영우 아나운서가 1년선배임 박종세 아나운서와는 동기이시고요

 

 

영면하신 정항구 선생님은 사단법인 한국방송인 동우회 현 사무총장으로 1970년대부터 방우회 이사 또 사무국장,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사) 방우회를 위해 힘을 기울여 오신 분입니다.  그야말로 방우회의 산 역사이시지요.   선생님은 방우회의 대명사라고 할 만큼 인연이 깊으시기에 제가 그 얘기를 하지 않아도 아실 분이지만 그 얘기가 빠졌다고 하신 분이 계셔서 보완했습니다. 
방우회가 어떤 단체인지는 잘 아실 줄 압니다.
참고로 글 한편 연결했습니다. 

 

방우회 (사단법인 한국방송인동우회)

https://jc21th.tistory.com/17782432

위 글에 방우회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방우회는 1966년 5월 16일 방송계의 별이라고 불리던 윤길주 선생님이 세상을 뜨시면서 비롯되었습니다.  초대회장은 1938년에 방송국에 들어 오셔서 그 어렵던 농구중계방송을 처음으로 실시하셨던, 이현선생님이셨고 그 후임에 문시형 회장님으로 이어졌습니다.  문시형 회장님 시절부터 정항구님이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이 카톡 방에는 오랜세월 방우회를 이끌어 오신 97세의 한영섭 전 회장님  (6.25참전 종군기자회 겸직)  을 비롯해서 권영원 부회장님,  정근춘 부회장님, 이용실이사님, 김성배 이사님, 김규홍 이사님, 한이수 이사님, 안평선 이사님,  김상준 이사님이 함께 하시고 저도 20년 가까운세월 방우회 이사로 재직 중입니다.  전영우 선생님도 오랜세월 방우회 부회장, 바른말 보도상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방우회는 1965년 방송계의 별이라고 불리던 윤길구 선생님이 세상을 뜨시면서 비롯되었습니다.  초대회장은 1938년에 방송국에 들어 오셔서 그 어렵던 농구중계방송을 처음으로 실시하셨던, 이현선생님이셨고 그 후임에 문시형 회장님으로 이어졌습니다.  문시형 회장님 시절부터 정항구님이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1980년대 방우회 봄소풍에 참여하신 분들의 면면을 봅니다.

 

 

 

1987년 첫 방송터 제막식 모습, 참여하신 방우회 성함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방우회는 각 방송사 사우회나, 언론인회, 문공회 등이 발족하기전 유일한 언론사 결사체였습니다.   아래 사진에 보시듯이 각 방송사 출신 방송인들이 참여 하셨습니다.  

 

이토록 활발하게 활동하던 방우회 세월이 지나, 각 사별로 사우회가 발족하고 많은 방우회 회원님들이 세상을 뜨시면서 그리고 또 연세가 드시어 활동이 옛날같지 않음에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 글을 올리고 있을때  방송인이자 국회의원이었고

아나운서 클럽회장을 지내셨던 박찬숙회장님이 글을 올리셨습니다.

 

가는세월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자주 만나서  옛얘기  하면서___

 

가는세월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방우회가 하던 일이 있습니다. 박회장님 말씀대로 가는세월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러나 방우회가 하던 일은 소중합니다. 어떻게 든 이어져야 합니다.  그 방안을 방송인 모두가 모색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방우회를 지키시겠다고 마지막까지 힘을 쏟아 붓던 분들마저 가십니다. 그러나 방우회가 하던 소중한  일은 이어져야 이어쟈야 합니다.      사우회 하는 일,  문공회가 하는 일, 한국아나운서 클럽이 하는 일 우리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합니다.   이나라 언론사의 첨번째의 결사체 방우회, 이나라 방송역사를 지키고 이나라 방송인들의 자존심을 지키며 진로를 모색 해야 될 줄압니다.  너무 긴말 써올려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정항구님과 관련된 사진 몇장을 골랐습니다.

 

 

위 사진은 오랜세월 방송기술에 헌신하신 박능상 TV기술과장님께서 이민을 하시게 외어 권혜경,김익모, 박능상, 정항구, 박준병님 등, 송별회 장 사진입니다.

 

조정판 앞에서 정항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