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6년 방우회
50주년을 계기로 쓴 글이라 사진 등이 많이 손상 되었습니다 기회 되는 대로 보완 하겠습니다. 사단법인 ★한국방송인동우회★! 약칭으로는 「방우회」라고 부른다. 퇴직사원들로 구성된 방송관련 단체가 없던시절 1966년 퇴직방송인들의 중심체로 출발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흔적도 없던 대한민국 첫 방송터를 기리는 유허비를 세우고 일제강점기 항일 단파방송 독립운동에 몸과 마음을 바친 분들의 뜻을 기리는 물망비를 세웠으며 바른말 실천을 위해서 바른말 보도상을 마련 했다. 방송역사를 정립하고 방송의 발전을 위해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반세기 50년을 이어왔다. 방우회 (사단법인 한국방송인동우회) 1966년 방송계의 별! 윤길구선생님이 세상을 뜨면서 그 동기가 되어 결성한 방우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방송과 함께 해 오신 이혜구, 이현, 황태영,민재호, 정환옥, 송영호, 신경석, 성기석, 조종국, 이인관, 한기선, 문제안, 유병은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나라 방송계에 몸담고 헌신해온 150여명의 원로방송인들이 뜻을 모아 출발했다. 2010년 102세가 되어 세상을 뜬 이혜구 선생님은 1932년 조선어방송 전담방송을 실시하면서 선발된 방송인이고 문제안 선생님은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이시다. 정환옥 선생님은 최초의 상업방송 부산 MBC, 서울 MBC, 라디오서울 RSB창설의 주역이시다. 한분, 한분 그 성함 앞에는 자랑스러운 수식어가 붙는 분들이다. 춘하추동방송에는 그 분들의 방송 발자취가 일일히 기록되어 방송인믈 편에 올라있다. 1938년에 아나운서로 들어와 그 어렵던 농구중계방송을 최초로 실시 했고 단파방송사건으로 방송국을 물러난 이현님을 첫 번째 회장으로 해서 출범한 방우회는 방송인들의 친목도 친목이었지만 이 나라 방송역사를 발굴, 정리, 보존하는데 힘을 기울여 왔다. 1977년 방송 50년을 맞아 KBS가 우리방송사를 집대성해서 처음으로 「한국 방송사」(일명 한국방송 50년사)를 펴낼때 그때까지 지엽적이고 산발적으로 기록되어 있던 자료 들을 모으고 정리하는데는 이 나라 방송과 함께 해 오신 분들의 모임 방우회 회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오랜 기간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 오신 유병은선생님이 편찬위원회 초대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그 틀을 확립했고 이혜구 선생님이 쓴 "문채록(文債錄)" 이덕근 선생님의 중앙일보 기고문 “남기고 싶은 얘기들” 그리고 그때까지 각종 신문이나 잡지에 수록된 방송에 관한 얘기는 대부분 방우회 회원님들이 남긴 글, 자료들이었다. 1977년에 발행된 한국방송사는 우리나라 방송사의 근간이 되어 그 뒤로도 10년 주기로 1987년에 「한국방송 60년사」 1997년에 「한국방송 70년사」가 쓰였다. 방우회 핵심 원로회원 유병은 선생님은 방송역사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서 청원박물관을 열고 운영하면서 "항일 단파방송 독립운동사"를 체계화 해서 KBS를 통해「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책자를 발간했고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1991년 방우회가 KBS안에 물망비 (勿忘碑)를 세우는데 그 역사적 사실의 입증과 이론적 바탕이 힘이 되었다. 방우회는 해마다 9월이 되면 그 물망비 앞에서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을 기린다. 방우회는 6.25전쟁으로 이 나라 첫 방송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아쉬워 하다가 1987년 회원님들의 뜻을 모아 옛 방송국이 있던 자리에 「유허비 (遺墟碑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 」를 세우고 방송역사의 현장을 보존 하면서 해마다 그곳을 찾고 있다. 그때만 해도 일제 강점기부터 이 나라 방송을 지켜온 많은 분들이 방우회에서 활동 하던 때라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 상당한 성금을 모으고 방우회 회원이자 조형미술의 선구자 최만린 선생님의 설계와 헌신적인 노력으로 뜻을 이룬것이다. 두 번째 방우회장을 지낸 문시형선생님은 이 나라 방송에 혁혁한 공적을 남긴 방송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한국방송인물사」 27편을 써서 1980년대 말부터 월간 방송지에 실어. 이분들의 행적이 길이 보존될 수 있도록 했다, 2001년부터 실시한 한국 영상 산업진흥원의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에 기초자료가 되었다. 그 글중 CD로 보관되어 있던 13편은 당시의 방우회 사무총장 정항구 선생님이 전해주셔서 춘하추동방송에 올라았다. 방송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가 방송을 통한 바른말 실천이다. 방우회는 이 일을 위해 1990년부터 23회를 이어오며 해마다 각 방송사의 바른말 실천에 공헌한 방송인을 선발해서 시상하고 있다. 2014년까지 70명에 달하는 수상자들 가운데는 방송계에서 활동하는 분도 계시고 또 각계 각층에 진출해서 바른말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이밖에도 방우회는 지난날 각 방송사의 방송을 모니터 해서 방송의 방향과 내용을 바로 잡아 주기위해 노력했으며 각종 세미나를 개최했고, 출판사업 등을 통해 방송발전에 기여해 왔다.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다가 해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모임인 조방회와 상호 교류를 했고, 1993년, 오사카에서 있었던 21번째 한,일 합동 조방회 모임에서는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곤욕을 겪으셨던 분 가운데 이미 세상을 뜨신 분들의 명복을 비는 「천도 제」를 올리기도 했다. 방우회는 초대 이 현 회장이래. 문 시형, 한기욱, 강정도, 한영섭 회장으로 이어오면서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현 한영섭 회장은 1949년, 방송국에 들어와 1960년 10월까지 기자로 활동 한분이고 KBS보도실장을 끝으로퇴직 하신 분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종군기자이고 현 6.25 참전종군기자회 회장직도 맡고 있는 분으로 흥남철수작전을 증언 할 수 있는 생존하는 유일한기자이기도 하다. 반세기 50년 이라는 길고 긴 세월 방우회가 방송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셨다. 방우회를 이끌어 온 역대회장 이 현 (1966 - 1986) 문시형 (1987 - 1995) 한기욱 (1996-1998) 강정도 (1999-2001) 한영섭 (2002-현 재) 방우회를 처음 구성 하던 때 1966년 5월 16일! 이날이 방우회의 기원이다. 그날 방송계의 큰 별! 윤길구선생님이 세상을 뜨셨고 그 빈소에서 만난 방송인들의 뜻이 모아져 가칭 철탑(鐵塔)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윤길구 선생님이 방송국 생활 20년을 포함 24년의 공직생활을 했어도 모아놓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장례를 치르기 조차 어려웠을때 그 자리에 모인 방송인들은 선생장례식을 벙송인장으로 하고 이것을 계기로방송인들이 친목모임을 갖자고 한 것이 오늘의 방우회 기원이다. 방송인 장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6년 5월 16일 그 자리에서 가칭 철탑(鐵塔)회 창립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한국방송인협회 문시형 상무이사의 추진으로 발기취지문이 채택 된 것은 5월 24일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매달 준비총회가 열렸고 , 9월 총회에서는 임시로 쓰던 철탑회 명칭을 방우회로 하기로 해서 그 이름 오늘에 이른다. (철탑회 그 이름은 때마침 방우회 핵심회원정환옥선생님이 남산에 거대한 철탑을 세우고 있을때라 문득 그 이름이 떠 올랐던 것이다. 정환옥 선생은 그 철탑이 완공 된 뒤 체신부에 넘기고 의정부에서 조용히 지내시다가 세상을 뜨셨다. 아래는 정환옥 선배님을 찾으신 방우회 회원님들 가운데 앉은 분 정환옥 왼쪽부터 이정오, 강창우, 한분건너 박경환, 김성배 최인열, 김성배 방우회 탄생에 물심으로 힘을 기울인 원로방송인 이 현님을 초대회장으로 추대하고 부회장에 이규일, 박화목, 상임 이사에 문시형님을 임명 해서 실무적인 일을 담당했다. 창립당시의 고문으로는 이혜구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서구, 권태웅, 정완규, 이하윤, 신경석 등 일제강점기 이나라 방송을 지켜온 쟁쟁한 인사들이 추대 되었다. 이사로는 송영호, 양재관, 노정팔, 최창봉, 황우겸님,감사로는 이덕근, 이관희님이 맡아 주셔서 일제 강점기 부터 이어온 이 나라 핵심 방송인들이 모두 참여했다. 처음에는 방송인과 그 가족의 원호사업, 상호친목을 목적으로 했지만 차츰 범위를 넓혀 방송 사료의 수집, 연구, 개발, 보존 이밖에 방송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일을 해 나갔다. 1967년, 방우회가 주축이 되어 모든 방송관련 단체의 집합체로 사단법인 「한국방송회관」 설립을 추진해서 그 이사장은 방우회장이던 이 현 선생님이 맡았다. 사단법인 방송회관은 그 시절 방송에 많은 공헌을 했다. 춘하추동방송 블로그는 이런 방우회의 뜻을 받들어 정보화 시대, 디지털 인터넷 시대에 누구든지 방송역사를 쉽게 접근해서 자세히 알 수 있고 또 활용 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여 사진, 음향물, 영상물을 포함한 생생한 자료를 모아 정리하고 또 글을 써서 필요로 하신분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든지 포탈사이트 검색창에 “춘하추동 방송” 을 쳐 넣으시면 춘하추동방송 블로그에 연결되어 생생한 방송역사 기록에 접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분들이 찾아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셨고 수정 보완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며 성원과 격려를보내 주셨다. 모은 글들은 카테고리 별로, 기본테마, 방송인물, 단파방송독립운동, 일제강점기 방송, 해방공간의 방송, 6.25와 방송, 남산시절의 방송, 민영방송, 지역방송, 역대 대통령과 방송, 방송음악 100년 (방송으로 자주 방송 되었던 옛 노래), 회원님과 함께, 춘하추동 여행기, 춘하추동단상, 등으로 나누어 정리되어 있다. 아직 미흡한 점이 많지만 힘이 미치는데 까지 이 일을 계속 할 예정이다. 방송인 한분, 한분의 활동상이 곧 이 나라 방송역사라는 점을 이해 하셔서크던 작던 방송을 통해서 확보된 자료를 제공 해 주시고 또 기회 되실 때마다 말씀 해 주시면 이 나라 방송역사를 써 나가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부탁 올립니다. 소장하신 사진, 동영상, 음향, 글 등 모두 모두 제공 해 주시면 성심성의 껏 관리하며 방송역사를 정리하는데 큰 힘이 되겠습니다. 화 보 위에서 다 못 쓴 내용은 사진설명과 함께 씁니다 1927년 2월 16일 우리나라에서 첫 전파를 발사한 경성방송국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KBS 중앙방송국으로 이어졌지만 6.25 전란으로 완전히 폭파되어 흔적마저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 나라 방송을 지켜온 방송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역사적인 자리에 첫 방송터 유허비를 세우기로 마음을 모아 1987년 5월에 첫 삽을 뜨고 그 해 방송의 날 9월 3일을 기해서 제막식을 가졌다. 첫 삽을 뜨던 그때 그 장면이다 1927년 2월 16일 처음부터 방송국에 근무하신분은 방송, 기술인 다섯분과 업무요원 몇분이 계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우리말 전담방송 제2방송 체널이 생기고 지역방송이 확장되면서 우리방송인들도 늘어나 방송국 설립후 18년이 지난 해방 될 때까지 우리방송인들은 상당수에 이르렀고 이분들이 우리 방송을 이어왔다. 그때는 방송국이 출발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라 방송인들은 대부분 40대 미만이였다. 6.25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고 세월이 흘러 1960년대에 이르자 오래된 방송인들은 연세가 들었거나 또는 다른 여러사정으로 방송계를 떠나시는 분들이 늘었으며 또 세상을 떠나신분도 종종 계셨다. 이런 가운데 방송인들 모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을때 윤길구 선생님이 세상을 뜨면서 그 자리에 모인 방송인들이 자연스럽게 얘기가 진행되어 출발한 단체가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이고 이 방우회를 중심으로 퇴역 방송인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또 방송역사 보존이나 방송발전을 위한 뜻있는 일을 벌리기도 했다. 그때는 각 방송사별 사우회가 없었을 때여서 모든 퇴역방송인들은 방우회 한 깃발 아래 모여 뜻을 같이 했고 첫방송터 유허비도, 물망비도 함께 세웠다. 첫 삽을 뜬지 3개월 여가 지나 옛 방송터에 유허비가 서고 1987년 9월 3일 방송의 날에 많은 방송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막식이 있었다. 제막식에 나와 주신분들의 성함을 옮긴다 박규진, 박경환, 남상국, 김석호, 이춘사, 강정도, 왕종현, 임석규, 이현, 최만린, 유해룡, 송영수, 김창희, 최순용, 김영우, 최수진, 김영효, 강신철, 문제명, 민중기, 이병인, 000, 이용선 이인관, 시노하라 아들 부부, 고가 도에, 문제안, 김봉렬 김성배, 조한승, 권오진, 이해상, 곽진상, 김용택, 김영완, 서규석, 최당, 조종국, 이상만,문시형, 이인영, 성기석, 김익진, 배준호, 장두원, 이수열, 강찬선, 김영진, 서명석, 박근주, 한희동, 전옥배, 정항구, 김집, 김덕수, 강신조, 최종채, 김소원, 조남두 , 김인태, 조돈준, 박한준, 유경환, 권혁래, 김정현, 천영조, 김명희, 이덕근, 송영호, 김성재, 최학수, 손석주, 최영신, 남학현, 김창구, 김성열(렬), 박찬숙, 박종민, 황우겸, 임택근, 유병은, 최삼경, 이준순,김상헌, 조부성님등 86분의 퇴억 방송인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그때 첫 방송터 건립에 뜻을 같이 하신 분 가운데 위 사진촬영에서 빠지신분들의 성함을 올린다. 강신조, 강영숙, 권오룡, 김광모, 김덕수, 김봉렬, 김석호, 김순철, 김익모, 김익진, 김재연, 김준문, 남상국,남정휴, 남학현, 노정팔, 도태흥, 라은선, 민유동, 문제안, 박영선, 박종민, 박한준, 박호준, 배준호, 서규석, 서명석, 손영호, 신정휴, 심구섭, 이계원, 이범신, 이상만, 이성철, 이시우, 이용실, 이용선, 이용찬, 이인재, 이준순, 이춘사, 이해상, 이혜구, 임석규, 임한구, 장기범, 장두원, 정구호, 정환옥, 조규택, 조병희. 조종국, 조한승, 천영조, 최덕수, 최삼경, 최수진, 최순용, 최장섭, 최창봉, 최학수, KBS ANN실, 한기선, 한영섭, 한운사, 한희동, 함영복, 홍두표, 홍순구, 황병찬, 황선필, 황태영, 고 노창성, 고 시노하라, 일본 조방회, 실로 일제강점기부터 1987년 그 시절에 이르기가지 모든 퇴역 방송인들이 참여했다. 유허비의 뒷 면에는 위 성함이 새겨진 동판이 있다. 제막식에는 그 전에 세상을 뜬 경성방송국 설립자이자 마지막 방송 국장이기도 한 일본인 시노하라 쇼죠 대신 그의 아들 부부와 경성방송국 마지막 일본인 여자 아나운서 고가 도애꼬도 참여 했다. 유허비에는 시노하라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당시의 방우회장 문시형님이 남긴 글 비문에 남긴 깊은 뜻을 되새겨 볼 필요도 없겠으나 겨레의 마음을 싣는다는 큰 뜻을 우리는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매 오늘의 방송인 특히, PD의 좌우명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첫 방송터' 기념비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한가지만 더 강조해 보고자 한다. 너비 5m 30Cm, 가로3m가 넘는 기념비 건립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퇴역방송인의 자발적인 성의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출연금에 대한 상한선도 없고 하한선도 없었다. 단 한가지 조흥은행 계좌번호 344-1-008009 방우회란 저금통장 하나가 방우회 회원 들에게 알려졌다. 단돈 5,000원에서 백만원에 이르는, 형편에 따라 '첫 방송터' 기념비 건립 기금이 모아져 그 금액이 무려 1,200만원에 이르렀다. 연인원 122명의 퇴역방송인이 뜻을 모은 것이다. 방우회장이라기 보다 한 PD의 아이디어가 퇴역방송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참여의식을 고취시킨 결과이다. 1991년, 여의도 KBS안에 물망비를 세웠다 방우회 회원들과 유족 그리고 KBS 사원들은 해마다 이곳에 모여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을 기린다. 제 2 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일본이 일방적인 선전만 하던 암흑 세계에서 방송인들은 단파수신기로 외부 세계의 방송을 듣고 독립운동가들에게 또는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려 나가던중 경찰 감시망에 걸려 350여명이 끌려가 곤욕을 당하고 75명이 형의 선고를 받았으며6명의 옥사자를 낸 지하 독립운동이었다. 일컬어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 방우회는 그 일을 재조명하기 위해 1988년 6월 3일 프레스 센터 기자 회견실에서 세미나를 가졌다. 이 세미나에는 토론자로 그 때 그 일로 형을 받으셨던 분을 비롯해서 손보기 교수, 원우현 교수님등이 참여했고 많은 방송인들이 참여해서 이 역사적인 일의 뜻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KBS안에 물망비를 세웠다. 그리고 단파방송 해내외연락운동을 주도적으로 벌려나갔던 성기석, 조종국, 박용신, 홍익범, 이근창, 이준순, 김동하, 선생님에게는 국가로부터 훈, 포장이 수여 되었다. 1991년 9월 9일 물망비 제막식에는 방우회 회원님들은 물론 서기원 KBS사장님, 최창봉 MBC사장님을 비롯해서 현직사원들도 참여했다. 1991년 9월 9일의 물망비 앞에서 기념사진. 바른말 보도상 방우회는 방송을 통한 바른말 쓰기를 생활화 하기위해 1990년부터 바른말 쓰기에 앞장서온 방송인을 선정, 바른말 보도상을 시상하고 있다. 방우회 출판사업 방우회는 해마다 난시청 전계강도 책자를 발간 하고 독도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출판물을 발간하는 등 방송관련 출판사업을 벌려 왔다.다음은 우리나라 TV방송이 실시된지 20년이 되던 1976년 5월 12일과 1986년 5월 12일을 기해서 그때의 사진 기록물을 모아 "눈으로 보는TV 30년"이라는 제목으로 책자를 발간하고 출판 기념회를 가졌을 때의 사진이다. 초기 TV방송의 면면을 보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시의 이 현 방우회장님을 비롯해서 최초의 TV방송국 HLKZ를 창설하신 황태영선생님, 출판을 주관한 문시형선생님, 원로 방송인이자 영화배우 황정순여사를 비롯해서 많은 원로 방송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방우회 주추최로 서울신문회관에서 열었던 1979년 "하이 미스터 위" 출판기념회! 위 사진에는 위진록님, 문시형 방우회 회장님을 비롯 배준호, 김창구, 방흥안, 정항구, 이상만님 등 원로방송인들이 함께 했다. 이때 국내판은 문시형방우회회장이 직접 운영하는 광보문화원에서 3,000권이 발행되고 곧이어 박정희 대통령 영애 박근혜님이 이사장장으로 있던 새 마음회에서 60,000 권을 주문 공급키로 했지만그해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 서거로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이 미스터 위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복혜숙, 황정순, 위진록님(위 사진) 아래는 박종세, 강찬선, 위진록, 장기범, 임택근, 황우겸, 이수열 아나운서 위는 하이 미스터 위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왼쪽부터 이근삼(극작가),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한원조 평양사범동창, 김규환(작곡가), 위진록, 안봉빈, 이치순, 신인섭, 안중원님이고 아래는 1993년 4월 28일서울 신문회관에서 연 "잃어버긴 노래" 출판기념회로 왼쪽 두번째부터 고은정, 이은주(경기민요 인간문화재), 최창봉, 이혜경, 김소원, 박용기, 이경재님이 함께 한 사진이다. 1981년 10월 24일 우이동 야유회장에서 만난 퇴역방송인들의 모습이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오늘은 뵈일 수 없는 분들도 많으시다. 사진 뒷면에 성함과 도면이 있어 여기에 옮겨 보았다. 왼편에서 부터 김영철, 서명석, 이범신, 윤기범, 문시형, 박광서, 박중서, 하용득, 최수진, 전옥배, 김창구, 김포천, 송영수, 문돈식, 한재수, 최선욱, 임학송, 박규정, 성기석, 정경순, 박용명, 송정기, 곽진상, 임한규, 이인영, 이두희, 이달형, 정영규, 심재영, 방흥안, 이병섭, 허환, 김기호, 신상운, 신병운, 이현, 김홍태, 이준순, 조병희, 신현석, 김영진, 권혁래, 조규택, 박찬응, 배준호, 김광모, 강찬선, 송영호, 한승은, 양한석, 김석모, 강기경, 한영수, 강래식님등 우리나라 방송을 키워오신 원로방송인들이다. 1990년 10월 10일자 연합통신에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다. 위의 사진은 1981년 10월 24일 촬영했고 그 뒤 1990년에도 우이동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연합(聯合)) 원로 방송인들의 모임인 방우회는 13일 하오1시 서울 우의동 청산휴게소에서 야유회를 개최한다. 이날 야유회 에서는 희수(喜壽)와 고희(古稀)를 맞은 원로 방송인에 대한 경로잔치도 베푼다. 희수와 고희를 맞은 방송인은 다음과 같다. 희수 : 이인관(李寅觀), 박종명(朴鍾鳴) 고희 : 유 호(兪 湖), 조종국(趙琮國), 권혁래(權爀來), 정경순(鄭慶淳), 김영진(金永鎭), 이보라(李寶羅), 조성길(趙星吉), 양중석( 梁重錫), 조영휘(趙永輝), 김성재(金聖在), 여기 모이신 방송인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은 못하셨어도 방송과 함께 하셨던 방송인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날의 우리나라 방송이 있게 되었다. 그 발자취를 더듬어 방송역사의 흐름을 안다. 그때 있었던 그 일들 하나 하나가 이나라 방송역사의 기초다. 많은 선배 방송인들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지금도 그때를 예기 하실 수 있는 선배 방송인들이 계시고 또 사진이나 영상물등 기록을 가지신 선배님도 계실 것이다. 한건이라도 더 소중히 다루어 후세에 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방송박물관의 꿈이 조속히 이루워져 이런 기록물들이 집대성 될 수 있었으면하는 마음 간절하다. 괌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방우회와 한국방송역사, 역대 방우회 회장 http://blog.daum.net/jc21th/17781048 흥남철수작전 그때 그 현장 취재 종군 한영섭기자 증언 http://blog.daum.net/jc21th/17782439 라디오 방송 전성시대, 방송의 별 윤길구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311 농구 중계방송 개척자 이 현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0312 방송과 함께한 문시형님의 일생 http://blog.daum.net/jc21th/17780313 한영섭 종군기자 한http://blog.daum.net/jc21th/17780314 윤후현(팔방미남)선생님 한국 방송사에 영원한 발 자취를 남길"
사단법인 한국 방송인 동우회(방우회)!"의 눈부신 활약상과 방송 발전을 위해 애쓰신 성과에 대해 깊은 찬사를 보내 드립니다. 첮 방송터의 기념비 제막식( 1987.9,3)과 물망비, 제막식이 인상적입니다. 이제 큰집이(방우회)이 완성 되었으니 선 후배 방송인들이 잘 협력하고 조 화를 이루셔서 보다 더 알찬 방송의 새 역사를 창조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그 많은 사진속에서 방우회 이사, 이신, 이장춘 사장님!이 들어 있는 "이사회를 마치고(2012.4)" 제일 마지막 사진이 유난히도 돋 보입니다. 이장춘 사장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기다린 보람이 있었습니다. 방우회!의 무궁한 발전과 회원님!들의 건승도 함께 기원 드리면서, 소식 전해 주신 춘하추동 방송, 이장춘 사장님! 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0^ ^0^ ^0^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방송을 위해 일하시며 현재까지 방송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그 마음의 시동을 다시 거실 분들이 여기에 다 계시군요. 방우회가 생기게된 이야기는 참으로 인상깊습니다. 힘들면 힘든대로, 어떤 사회에건 좋은 생각과 취지라면 용기와 열성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시는 분들이 계셔서 힘이되고 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힘들 때 바른 역사와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앞장서신 여러 어르신들께서 건강하게 버팀목으로 계셔주시면 좋겠습니다 2012년 4월 이사회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이다. 왼쪽 앞줄부터 한영신, 오승룡, 박종세, 한영섭(회장), 이철호, 장도형, 김영효, 이장춘, 권영원, 뒷줄 왼쩍 부터 이정오, 엄복영, 고흥복, 정항구이사님 .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고문과 해방-1.w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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