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머리 동영상은 KBS 라디오에서 1992년 다큐맨터리 드라마「광복 20년」을 쓴 김교식과 총신대학교 대학원장이자 부총장 유준기 박사가 출연, 5회에 걸쳐 방송한 15분 프로그램 「역사탐구」연 75분을 18분으로 편집해서 올렸다.
박정환! 항일 독립운동 애국지사 호남의 만석꾼 독립운동 자금줄 일제 강점기 독립군 자금줄의 큰 맥 영남의 경주 최부자로 불리는 최준! 호남 만석꾼 박정환! 경주 최부자는 세상에 널리 알려있어도 박정환은 월은 호가 말해주듯 달 뒤에 숨어 독립운동을 도왔고 그러면서 재산이 탕진되어 후손들에게 물려준 재산이 별로 없었기에 부호로는 알려지지 않았다. . KBS 음악프로듀서 박창학으로부터 방송 史料를 받아 정리하는 과정에서 독립애국지사 박정환이 박창학의 할아버지로 호남의 만석꾼 이었고 면직물공장 등 근대기업을 일으키는 한편 어린이 교육을 위해 근대 유치원, 중 학교 등을 세워 교육에 힘들 기울였으며 서울에서 「3·1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그 면직물공장에서 태극기를 제작 하는 등 영광 3·1운동 주역 으로 힘을 기울였다. 박정환의 면직물공장 독립운동을 위해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며 은밀히 임시정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의병장, 독립군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 독립운동을 도왔다. 이로 인해서 일제감시의 눈초리는 더 옥죄어졌고 재산은 사라져갔다. 서울 계동에 집을 두고 서울과 영광을 오고가며 활동하던 박정환은 서울에서 영광으로 오던 중 광주 송정리 에서 테러를 당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한 체 1930년 8월 2일 38세의 젊은 생애를 뒤로 하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 재산을 별로 물려받지 못한 후손들은 부호로서의 명성은 이어가지 못했을지라도 선대 박정환의 공적을 자랑자랑스러워 하며, 나라에 공헌하며 자랑 스럽고 뜻있는 삶을 이어 가고 있다. 1942년에 찍은 이 사진이 박정환의 핏줄을 이어받은 가족이다. 뒤쪽 남자분이 박창학의 아버지 박재남이고 중앙 아이 안고 있는 분이 박정환의 부인 장천년 여사이며 안겨있는 어린아이가 오늘날의 박창학 PD다. 오른쪽 부인이 박창학의 어머니 이화파 여사, 좌측 소녀 박창학 피디의 고모 박동순이다. 박정환 선생의 막내딸 박동순은 박정환 선생이 건립한 영광 유치원 원장 지내고 영광 가정 양재 전문학원을 건립 영광 가정 양재 전문학원 제 4회 졸업생 졸업식날 제자들과 찍은 기념 사진이다. 중앙 가슴에 꽃을 단 분 박동순 여사 박정환의 2대독자 박창학 (예명- 박정준)은 알아주는 음악프로듀서로 KBS국장을 지냈고 그가 보존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춘하추동방송 글을 쓰게 한 주인공이다. 그는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살아오며 통일의 염원을 담아 「7천만의아리랑」,「보문사」등 노래가사를 써서 노래로 불리고 민주평화 통일자문회의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위원으로 활동하며 외교안보포럼 상임이사, 독립기념관 임원 겸 임원추천위원 등 여러 일에 참여 활동한다. 박창학의 사위 앤드루 유, 유승조 박사는 미국 워싱턴대학 교수로 세계적인 생명과학자이며 위 사진은 유승준 박사가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과 악수하는 장 면이다. 자세한 글은 박창학 방송사료 글에 있다. 벅정환의 손녀 박은덕의 남편(박창학과 남매지간) 서동열은 공군대장으로 1988년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위, 아래사진은 공군참모총장에 취임 하던 날 취임식을 마치고 총장공관에서 촬영한 사진 이다, 위 사진 왼쪽부터 박창학 PD, 이화동 박사(신경외과 전문의로 박창학 PD외삼촌)서동열 공군참모총장, 아래사진 왼쪽부터 박창학 PD, 이화동 박사, 이화파 여사(박창학 PD 어머니이자 서동열장군 장모) 박은덕 (박창학 PD 여동생), 서동열공군참모총장 부인, 박은선 (박피디의 누나 이화동 씨 부인) 박창학 PD는 이토록 명문가를 이룬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조상의 음덕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 했다.
더 자세한 사항은 국가보훈처 홈에 있는 「독립운동자 공훈록」 과 영광 향토 연구가 이정현님이 쓴 글을 인용하고 관련 글을 연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자 공훈록 성 명 박정환 생몰년도 1892. 8.15 ~ 1930. 8. 2 출신지 전남 영광 운동계열 국내항일 훈격(연도) 건국포장 (95) 공적내용 전남 영광(靈光) 사람이다. 3·1운동 때 전남 영광면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의 소식을 접하면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운영하는 직물공장 (織物工場)에서 농민회 회원 및 청년회 회원, 학생들을 모아 태극기를 제작하고 선언서를 인쇄함으로써 만세시위 준비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제의 경계를 피하여 성공적으로 준비를 마칠 수 있었으며, 거사일인 3월 15일 오후 1시에 그가 경영하는 직물공장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에 참가한 군중은 1천여 명에 달했다. 그 후 독립 달성을 위한 강구책으로써 교육 방면에 힘을 쏟기로 결심하고 사재를 털어 1921년 9월 영광읍에 유치원 을 설립하여 자라나는 어린 싹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는 한편 1923년 12월 사립학교 영광중학 (靈光中學) 기성회의 총무를 맡으며 학교의 부흥을 도모했다. 일제의 압력으로 1926년 영광중학 기성회가 해체되자, 그는 사재(私財)를 내어 군서면(郡西面)에 교실 4칸의 본관과 부속건물 2동을 신축하여 정명학교 (正明學校)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때 교장은 영광의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른 바 있는 박태엽(朴泰燁)을 초빙하였다. 그리하여 정명학교는 설립초기에 민족교육의 도장으로써 활발하게 운영 되었는데, 끝내 운영난에 봉착하여 개교 3년 만인 1929년 10월에 폐교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 (1919. 8. 7 대구복심법원) ·옥당골의 전통문화 (영광군) 134면 ·영광군지(영광군지편찬 위원회) 1049·1053면 ·동아일보 (1921. 9. 7, 1923. 12. 13) 이정현 님 글 (요약분) 영광군 향토연구가 박정환 선생은 영광군 군서면 녹사리 554번지에서 이 지역 대부호의 가정에서 아버지 박주섭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에서 1892년 태어나 유아 그 가르침 속에서 자란 충효의 사상이 뚜렷한 분으로 「위정척사사상」 (衛正斥邪思想-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 다는 유교적 정치 윤리 사상) 이 기본인 가문인데다가 1912년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한국인 지주들을 중심 으로 토지 조사 사업이 번 격화되자 선생은 일제에 반감을 갖으면서 재산신고에 협조하지 않고 재산을 공개하지 않았다. 3·1 운동 당시에는 서울과 연계 극비리에 삼일만세운동 계획을 세울 때 본인이 설립한 영광 남천리 소재 면사직물공장 내에서 영광 청년 회장 정인영과 서순채, 박병문, 노동 회장 김은환과 유두엽, 박정순 보통학교 훈도 (선생님) 박태영, 이병영 등과 함께 3·1독립 만세 거사계획을 주도하고 태극기와 애국가를 인쇄하여 1919년 3월 15일 국민 1,500여명을 공장 앞에 모이도록 해서 만세 삼창을 하고 영광군청을 향해 시위를 벌리다가 수많은 애국 동지들이 체포 부부, 구금됐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지역 유지가 본인은 공장 내에서 3·1만세운동을 모의 실전 했다는 것은 재산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에도 선생은 감옥에서 출옥한 애국 동지들이 살길이 막막하자 일정에 삼엄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을 본인은 사업체 또는 본인과 관계되는 기관의 취업토록해서 애국 동지들은 물론 그 가족들 생계를 돌봐주었다 1919년 기미 년 7 월 모친 회갑 기념으로 선대위 재실 건립 시 제각 영모정 (본채 단층, 대문 2층) 누각 지붕 처마 기와장과 대문에 태극문양을 그려 넣은 일제에게 노골적 으로 반감을 표명한 분이었다. 이 당시 사회 분위기는 3·1 운동이 발생한지 4개월 밖에 안 되는 시기로 일제가 태극기 말살정책을 펴든 때로 태극기 또는 태극 문양만 보아도 일제가 과민반응을 보였고 독립 운동가들 계속 잡아 드리던 시기였던 때여서 대단한 결단이었다. 이처럼 눈에 띄게 일제에 정면 도전을 하자 일제는 선생의 사업전반에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끝내는 3·1운동 발상지였던 직물공장을 강제로 빼앗아 국가소유 만들어 버렸고 고종의 교육입국초서를 근간으로 문맹 퇴치와 농촌계몽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세웠던 정명학교도 자금 압박으로 마침내 1929년 10월 폐교당하고 만다. 이처럼 박정환 선생의 사업체에 대한 감시와 압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독립군들과의 접촉 자금줄 추적, 물자 공급 추적 등 의심을 품지 않는 곳이 없게 되자 무역을 통해 만주 안동(현)으로 독립군 자금을 지원하는 일을 추적당하면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 되거나 침몰했다. 고 허위신고를 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1920년 영광군의 주요사업은 농업으로 미곡과 면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근해에는 법성포가 있어 수산물 집산 근거지로 성어시기에는 크게 번성하여 상거래가 활발한 지역으로 당시 영광과 법성포 백수 등에는 신흥 일본인 대지주들이 집대성 하고 있었다. 선생 또한 1920년대 고종 황제를 비롯해서 몇 안 되는 미제 차 「비크」 자가용을 탄 호남의 대 부호로서 서울 계동에 거주하고 고향 영광의 초현대적 직물공장을 설립하고 농업, 임업, 무역 등 개화기 다양한 사업체를 벌린 젊고 참신한 대기업가였다 아래 사진은 박정환 자동차이다. 나이 23세에 부친의 사망으로 선대로부터 받은 막대한 자산을 담보로 동양척식 회사로부터 상당액을 융자받아 사업을 벌렸는데 1920년대 그가 벌린 사업을 보면 호남물산(주), 월은농산, 전남농산, 영광유치원 설립영광중학교 설립 기성회 총무이사. 영광 불갑 제방 수리조합 이사, 사립 정명 학교 설립. 영광창고금융, 약국 호연당 대주주, 인쇄소, 이발소, 영일자동차사업, 월은농장, 임업개간사업, 토지매매/ 소작인에 대한 대부/ 개량개척, 권번학교 (국악인 또는 기생양성소) 대동단 학원 (대한제국 재건비밀단체). 무역업 등 그가 손대지 않는업종이 없을 정도로 그이 기업은 광범위 했으며 번창 했다. 이와같이 번창하던 대사업자가 1919년 삼일절 운동 이후 약 12년 사이에 급격히 몰락 패가한 원인은 당시 전체 경작지의 절반가량이 소작농이었는데 일본인 대주주 또는 친일파 지주들이 소작료 5할을 받을 때 선생만은 유일하게 1할을 받거나 어려운 사람에게는 아예 받지를 않아 일본지주들로 부터 미움을 받고 선생에 대한 감정이 나중엔 극에 달했다. 이에 일제는 정부에 대한 도전적인 항세 抗稅 저항운동 이라며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지주로 낙인 찍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봄, 가을 농번기에는 온 동네 농악 잔치를 벌여 각설이 차림으로 변장한 애국지사들이 자연스럽게 와서 먹고 마시며 접촉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또 두 사람만 모여도 뒤를 밟는 친일 앞잡이 형사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권번학교 (기생양성소)를 만들어 풍류를 핑계 삼아애국자들과 내통을 원활이 한 사실도 당시 독립 운동을 했던 동지들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도 영광군의 유지이며 대부호였던 그가 때로는 밤이슬 맞고 산에서 자고 내려온 일이며 때로는 보부상으로 가장하고 서울 왕래한 일이며 그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서 이 시대를 살아온 원로들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호가 말해 주듯 月隱선생은 구름 뒤에 숨은 달처럼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은밀히 독립운동을 배후조종 지원했던 이지역의 큰 인물로 뭇 사람에게 존경과 추앙을 받던 인물이다. 박정환 재판기록 그러나 선생은 1930년 8월 2일 서울 집에서 자가용으로 주행하던 중 송정리에서 태러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당하게 된다. 만석재산을 바쳐 일제 치하에서 국내외 항일 운동을 펼치다가 일제의 암살계획에 의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유언도 못하고 인사불성 되어 집으로 옮겨와 38세 젊은 나이로 요절 객사하기에 이른다. 월은 박정환 선생은 3·1 운동과 920년 1930년대 초 식민지 암흑시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우리 고장의 큰 인물임에 틀림없다 김해곤 선생님 글 박창학 PD님이 이렇게 훌륭한 가문인줄 몰랐습니다. 제가 방송 심의실에근무 할때 박창학 PD님이 가요심의 하실 때 제가 행정적인 일을 해서 박창학 PD님을 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분인 줄 몰랐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그립습니다. 박창학님 글 김해곤님의 글을 고. 한때 심의위원실. 위윈으로 일했을 때를 회상하며. 해곤님의 얼굴을 떠올려 니다. 부족한 저에 대한 관심을 가저주신것에 뒤늦게나마 감사의 인사드닙니다. 샤롬!
홍복남 선생님(시인) 글 애국지사님들이 안계셨다면 우리가 지금 행복 할 수 있었을까요 감동받은 메라니 언제나 님의 글에 님의 카폐에 즐감으로 다녀갑니다. 요즘 책임지는 소일거리로 행복하신지요. 건강도 궁금해요
산란 메라니글
박창학 선생님, 2019년 4월 26일 미국에서 보내온 글
얼마 전에 이장춘 이사님께서 춘하추동방송에서. 소개한 바 있는. 막내사위. 워싱턴대학. 유승조박사 댁에 집 사람과 함께 와 있습니다. 집 사람 몸이 자주아파. 죽기전에센트루이스에사는막내딸집에 가는것이소원이라고해서오게된것입니다.그러고보니. 백악관에 초청받고. 오바마 미국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까지소개해주셨는데. 고맙다. 는 인사도 못 드렸군요. 뒤늦게나마 인사를드림을. 양해 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 또 감사합니다. 이장춘이사님!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박창학 (박정준)KBS 음악 PD, 방송 가요이야기 음악인생 음악프로듀서 박창학 방송사료 2 강화도 보문사 普門寺 탐방 노래와 사찰 석모도 강찬선 아나운서 편 「그 시절 그 노래!」 (강경화 외교부장관 아버지) 대담, 박창학 PD http://blog.daum.net/jc21th/17783279 역사탐구 KBS라디오 녹음장면 1992년 왼쪽부터 유준기박사, 박창학 PD, 김교식 작가 박정환 내외분 묘,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묘비 뒷면에는 아래 글이 새겨져 있다.
박창학이 국제외교안보포럼 상임이사로 있을 때 연사로 초청한분 가운데 가장 소중한 분 최서면 옹, 당시 87세 2008년 3월로 기억된다. 앞 줄 우측에서부터 박긍식 과학기술처장관 공주 갑사 주지승 세 번째 김현욱 국제 외교 포동 이사장, 네번째 최서면 선생 최열곤 전 서울시 교육감, 유기남 전 자유시민연대 대표, 전규호 한국 외국어대 명예교수, 백성길 수원 백병원 원장 뒷줄 좌측에서 다섯 번째가 박창학 PD 국제외교안보포럼 상임이사, 최서면 선생에 대한 설명은 춘하추동방송 다른 글에있어 생략한다.
박창학 PD가 국제외교안보포럼 상임이사직을 맞고 있을 때 찍은 사진 2010년 한나라당 원래 총무 김무성 씨를 조청연사로 모셨다. 왼쪽 첫 번째 황수연 대한 체육회 학교체육 위원장 두번째 유기남 전 자유시민연대 대표 세 번째 김현욱 국제외교안보포럼 이사장 당진 4선의원 네번째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 다섯 번째 박긍식 전 과학기술처장관 원자력분야 1호 박정희 대통령 때 여섯 번째 김유혁 박사 단국대학교 종신 명예교수 뒷줄 일곱 번째 중앙에 박창학 P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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