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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서울시민회관화재 (mbc10대가수 청백전) · 세종문화회관

이장춘 2019. 7. 3. 04:17

 

 

 

 

 

1972년 12월 2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문화방송 창립 11주년 기념공연으로 10대

가수청백전이 끝나고 큰 화재가 발생,  이남용

관장을  비롯,     51명이 사망, 76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시민회관은 사라졌다. 남진 · 나훈아 전성기

불꽃 튀는 경합벌리던 화려한 무대는 화염으로 변하고

울음바다가 되었다. 50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그때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시는 분들이 생존한다.

공연 현장 중계방송을 했던 차인태 아나운서 (현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 MBC사우회

회장) 회고담을 들어본다.

 

 

 

부민관·서울시민회관화재 (mbc10대가수 청백전)·세종문화회관

 

-부민관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

 

 

 

차인태 아나운서 회고담

 

 

이미 그때 아주 먼 나라를

저는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12월,

몹시도 추웠습니다. <mbc10대가수가요제>

남진과 나훈아가<가수왕>자리를 놓고

뜨거운 경합을 벌인 서울시민

회관 무대였습니다.

 

*연말 최고의 가요축제의 MC는

변웅전 · 현장 실황중계아나운서는

차인태였습니다.  *무대 윗 쪽 Set 전기

장식에서    Finale부분에서 시작된  불로,

너무나 많은 분들  (관객과 연말 결산업무를

철야작업으로 하고 있던  서울시 공무원 등)이

삽시간에  화재와 연기질식, 압사 등으로 희생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참사

였습니다. *이렇게 기록 한다는 것 자체도

저로서는 몹시 힘들고 또 힘듭니다.

 

 

그로인해 세상 떠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2019년 6월 차인태

 

 

차인태 아나운서 근황 (MBC사우회 회장, 한국아나운서클럽회장)

 

 

 

 

1956년 이승만대통령 시절

우남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기공을

해서 나라사정이 여의치 않던 시절

5년여가 지나 박정희 최고의장 시절에

이르러 1961년 11월 7일! 시민회관

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마땅한 공연시설이

없던 시절 대형행사는 바로

 여기서 열렸다.   1963년·1967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 축하공연여기서

있었다.        박찬숙 아나운서가 그때

박정희 대통령 취임공연 사회를 보았던

추억을 떠 올리기도 한다.

 

 

 

 

1966년 10월 26일 1주일 계획으로

개막된 「살짜기 옵서예」가 열화 같은

호응에도 불구하고  마침 그때  존슨대통령

방한 행사장소가 마땅이 없어 공연은 4일간으로

단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화도 있다.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참으로

격세지감이 있다.

 

 

 

 

이 시민회관이 있기 전

우리나라의 최초 공공 대형 공연장은

부민회관이었다. 1926년 지금의 시청 자리에

일제하의 부민 청을 짓고 그 옆에 1934년 그때로서는

최신형 대형 공연장 부민회관을 지었다. 이 공연장이

시민회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시민회관이

문을 연 뒤에도 시민회관 별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부민회관을 지을 무렵

우리나라에는 영화가 상영되고

최승희님의   무용이나 현대음악의

공연이 잦아지고   큰 행사들이 자주

있었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소공동에 경성 공회당이 있었고

개인이 운영하는 광무대나 원각사 등이

있었지만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런 필요에 따라 경성부청 옆에 경성부민을 위해

마련된 시설이 바로 부민관으로 1934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35년 12월에 준공을 보았다. 부립으로

건설된 이 시설이 공연장으로서는 가장 큰 시설

이었고 현대적인 건물로. 큰 공연이나

행사는 여기서 했다.

 

 

 

 

1936년 지금으로 말하면

공개방송의 일종이었던 경성방송국

대규모 방송 실연대회가 연린 것도 방송국과

지근거리에 있던 이곳 부민관이었다. 지금은

서울특별시이지만 그때는 경성부 시절이라

부민관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시민관

이라는 이름과 같은 것이었다.

 

 

 

 

해방되기 20일전 이 부민관

폭파사건이 있었다. 일본 친일 대의당

당수이고 일본 중의원 의원이던 박춘금이 

총독부 요직 인사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본의 전쟁승리를 위한 결전을 부르짖고

있을 때 여기서 폭탄이 터졌다.   「의열단원」이던 

조문기 의사를 비롯해서  유만수, 강윤국의사가 폭탄을

터트린 것이다.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행사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곳에는 그 일을 기념하는 작은

석비가 있다. 이 일이 있고 바로 해방이 되어 국립극장으로

사용되다가 6.25후에 국회 의사당이 되었고 국회가 여의도로

옮긴 뒤에는 시민회관 별관으로  사용되기도 해서 세종문화

회관을 짓고 있을때는  시민회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시울시 의회 의사당으로  활용되고  있고 

역사의 사연을 담은 문화제로 등록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그 시대에 함께 건립된

영국 성공회가 있다.  

 

 

 

 

 

부민관이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면서    또 다른 현대적인

새로운 대규모 공연장의 건설 필요성을

느끼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호와 연계시켜

우남회관이라는 이름으로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현대적인 공연장이 계획되어 1956년 6월

공사를    시작했지만 나라 사정이 어렵던 시절이라 길고

긴 세월 4.19와 5.16을 맞으면서 그 이름도 서울 시민회관

으로 바뀌어   1961년 11월 7일 이 회관의   문을 열었다.

크고 웅장하던 시민회관이 10연 년 만에 문화방송 11주년

기념특집 10대기수 청백전이 열리던 날 대규모의 화재가

발생해서 이남용 관장을  비롯해서    51명이 사망,

76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시민회관은 사라졌다.   

 

 

 

 

 

이때 순직하신 관장 이남용님은

1932년부터 방송의 기틀을 다지신 분으로

해방된 후 국립경찰이 창설될 때 경무관으로

경찰간부가 되셨다가 서울시 공무원이 되어

이날 순직하셨다. 명복을 빕니다.

 

 

 

 

타버린 건물의 뼈대를 다시

활용하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

터전위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6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1978년

4월 오늘의 세종문화회관이

문을 열게 되었다.

 

 

 

 

1978년 4월 오늘의 세종문화회관 개관

 

 

 

 

 

 

세종문화회관 기공식(기공식을 할때는 시민회관 신축기공이라고 했지만

그간에 이름이 바뀌어 세종문화회관으로 준공되었다.

 

 

  

 

 

세종문화회관이 개관한지

40여 년 동안   다소의   변화는

있었지만 큰 변동 없이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의 문화 중심적 역할을 수행 해 왔다.

세종문화 회관에서 있었던 주요 행사나

공연모습을 사진으로 올린다.

 

 

1961년 시민회관 개관 기념공연 모습

 

1964년 8월 3일 서울시

소년 · 소녀 합창단 창단 기념식

 

1964년 9월 15일 서울시

국악 관현악단 창단 때

 

 

1978년 정경화양 바이어린 독주 공연

 

1978년 영국 로얄 발래단 백조의 호수 공연

 

1985년 2월 7일 창단된 서울시 오패라단 창립

 

1988년 9월 1일 서울 올림픽 결단식

 

한 . 미 우정의 콘서트에 참석한

클링턴 미국 대통령과 동생 로저 클링턴

 

 

1988년 러시아 볼쇼이 발래단 공연

 

1999년 제 80주년 3, 1절 행사

 

 

컨밴션센타를 리모델링해서 2006년

8월 5일 개관한 세종체임버홀 개관 기념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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