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오재경과 방송

이장춘 2019. 4. 28. 22:01

 


 

  

이 땅에 실질적인 TV방송을

있게 한 주인공 오재경, 그가 바로

남산 방송시대를 연 주인공이다. KBS교향

악단을 창설했는가 하면,  오늘날 방송대상의

근원이 된       방송문화상을 최초로 제정했다.

민간 레코드 회사가 없어 어렵던 시절 레코드까지

만들어 보급하면서      국민정서 함양에 힘을

기울였는가. 하면     남양 500KW 대 출력

송신소를 건설, 대북방송, 대일방송

방송 가청권을 넓혔다.

 


오재경과 방송


 

공보실장, 공보부 장관,

두 차례에 걸친     방송총괄

책임자로서 우리나라  방송역사상

가장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사람을 들라면 오재경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1956년 7월! 38세의 야심 찬

젊은 오재경이 공보실장에 취임하면서

방송에 관한 두 가지를 실현시키려는 꿈이

있었다. 하나는 부산 피난살이에서 돌아와

오랫동안 건물에서 하고 있던 방송을

청산하고 현대적인 새로운 방송국을

세워 보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텔레비전 방송국을

세워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민간 TV방송이 있었지만 명목뿐이어서

TV방송국 다운 방송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 두 개의 큰 꿈 중      라디오방송 청사를

짓는 것은 첫 번째 공보실장시절에  실현했고

TV방송국은   두 번째 장관시절에 실현시켜

남산방송 시대를 열었다.    정부직제는

공보실장,  공보처장,  공보부장관

으로 바뀌었었지만 부를 때는

다 장관이라고 불렀다.

  




위 사진은 이승만대통령과 함께

남산 라디오청사 준공 테이프 커팅 장면

이고 아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함께

TV방송국 개국 식에 참석했을 때의 사진으로

송요찬 내각수반,     임택근 아나운서

모습이 보인다.   또 한사람의

군인 경호실장 박종규.

  



 

1919년 황해도 옹진군에서 태어나

1941년 일본 입교대(立敎大) 경제과를

졸업한 오재경은  1956년 7월 공보실장에

취임했다. 이때 KBS는 공보실 소속의 한 개

국으로 있을 때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정동방송국은 6.25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방송국 옆에 있던 조선방송협회 사무실로

쓰던 건물에     임시로 방송시설을

갖추고 방송을 하고 있었다.

 



 

스무고개나, 노래자랑, 관현악단

연주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방송은

동화백화점이나 (지금의 신세게 백화점)  명동

캐도릭 회관 또는 극장 등을 돌아다니면서 녹음을

하는 등   많은 불편을 겪었지만 모든 것이

여의치 않던 시절이라 방송국 세우는

일이 실현되지 못았다.


 

 

방송중흥을 제1목표로 내건

오재경은 즉시 이 일에 착수하도록

했다.   연수차 미국에 가 있던   기술인

한기선에게 연주소 건립을 전제로 선진시설을

자세히 보고 오도록 연락을 취했고      한기선은

연수에서  돌아오면서 이 일에 착수해서 1957년 12월

10일 개국했다. 이에 앞서 공개방송 스튜디오 문제를

해결코자 대한공론사 (지금의 신문회관을 짓기전

그자리)   3층에 스튜디오를 만들어 57년 7월

 23일부터 이곳에서 공개방송을 실시했다.




위 사진은 그때의 대한공론사

(지금의 프레스 샌터) 건물로 1957년 7월

이 건물의 3층에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공개방송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아래 대한공론사

공개홀 개관시에 출연한 김씨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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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경 장관은 방송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 보려는 의욕을

가졌다. 방송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넣기 위해

방송문화상 제도를 신설했고 방송의 기술적인 질을

높이기 위해 암팩스 녹음기 등    최신 기기를 들여

왔는가 하면, 레코드판이 없어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

레코드 제작기계를  직접 도입해서 대량  제작보급

하기도 했다.  이승만 박사 미국의 소리 레코드를

제작 보급한 것도 이때의 일이고 낮방송을 연결

해서 종일방송을 한 것 도    이때의 일이며

제 2방송이 처음 생긴 것도 수원송신소가

준공을 본 이때부터였다.

 


 

오지(시골) 난청지역 주민들에게

방송혜택을   주려는      생각으로

이동방송차를 도입해서 전국 이동방송을

실시했고  그 이동방송국은 속초, 포항

여수방송국 설립의 근간이 되었다.

 

 



1954년 이래 서울 지방방송국이라


불리던 서울방송국 이름을 서울중앙방송국

으로 바꾸고,        지역은 그 지역명칭을 넣어

부산 방송국, 대구방송국 등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1959년 1월 오재경이   그 자리를 떠남에 설계서까지

마련해 놓은 TV 방송국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나   다시 공보부장관이 취임, 군사정부가 

 국민에게 민심을 끌기위한 가시적인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제일먼저 TV방송을 실시해야 된다는

 구상을   내놓고 실천에 옮겼다.


 

 

이러 저런 이유로 그렇게도

어렵고 힘들었던   TV방송 구상이

받아 들여져 그때 뜻밖에 들어온 돈 20만

달러를 여기에 쓰기로 결정해서 오재경 장관이

취임하고 5개월 여만인 1961년 12월31일 KBS-TV

방송국이 문을 열고 특단의 조치로 20,000대의

TV수상기를 들여와 TV시대를 열어갔다. 이로서

1956년 취임 때부터    품은 오재경의 꿈이

실현 되었다.   TV개국은 다른 곳에서

많이 썼기에 이하 생략한다.

 

공보부장관을 떠난 후에도

1970년부터 1974년까지 재단법인

기독교방송 회장을 지내면서 방송과 인연을

가졌고 83년부터 85년까지 동아일보사 사장을

지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옛 방송인들을

포함한 문화공보부, 근무하다가 퇴직한

분들의 모임인 문공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오재경 전 장관이 2012년

6월 27일 세상을 뜨셨을 때

그해   8월 KBS사우회보에 실린

추모의 글을 옮기고 더 자세한

일은 약력과 관련 글을 연결

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오재경 장관께 특별히 부탁해서 받은 사진, 부인 신재덕 여사와



오재경 선생은 1956년
7월 부터 1959년 1월 30일까지

공보실장, 61년 7월 7일부터 62 년 6월

17일까지 공보부장관 을 지냈다.  6·25로 상처

받은 방송국이    정동 임시 연주소에 머물고 있을 때

남산에 새 방 송국 터를 마련하고 1957년 공사를 시작해

그해 12월에 완공했다.       20년간 이어졌던 KBS의

남산시대를 연 분이 바로 오재경 선생이시다.

당시 KBS 남산 연주소는 서울관광의 필수

코스일 정도로 멋진 건물이었다.

 

선생은 체계적 방송연구를 위해

방송문화 연구실을 만들어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프로그램을 분석 연구했다.   또

「방송」지 등 방송   간행물을 최초로 발행했고

1958년   방송 문화상을 신설했는데 이는 오늘날

방송 대상 등 각종 방송시상제도의 바탕이 되었다.

국민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자 1956년

9월 1일 KBS 교향악단 창단, 전속 가수단

제도 시행 등으로   당시   전후(戰後)

피폐해진 국민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은 이 땅에

TV시 대를 연 KBS TV의 개국일 것이다.

공보실장 시절 KBS TV방송 개국을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5.16직후 7월 7일 다시

공보부장관에 취임하면서 제일 먼저 문서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TV방송 실시

계획안을 꺼냈다.

 

때마침 뜻하지 않은 돈

20만 달러가 정부에 들어온 것을

알고 그 돈을 관리하던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설득했고 결국 TV방송국

설립을 받아낸 것이다.

 

개국예정일 12월 24일 보다

1주일이  늦은 12월 31일  그해의

마지막 날,     첫 방송을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TV방송 역사의 시발점이자

KBS TV의 개국일이다. 편성된 예산도 없이

TV방송국을 만들어 낸 역사적인 일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 두 차례 재직기간동안

스스로 계획하고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얘기를 나누며 실천했다.

빈소에서 만난 70-80대의 노 방송인들은

50여 년이 지난   그때의 추억을 되살리며

고인을 애도했다.    이처럼 두 분의 업적을

언급하자면 끝이 없다. 필자는 부음을 듣고

곧바로 빈소를 찾아 명복을 빌었다.

 

두 분이 우리나라 방송을

위해 헌신한 공로에 감사하면서…

또 마지막 떠나는 두 분의 모습을

동영상에 담아 인터넷에 올리면서

부디 영면하시기를 빌었다.

 

추모의 방송 에피소드

방송계 두 큰 별이 지다 -

 

문제안, 오재경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이장춘 회우

 

 


 



죽포 오재경 (吳在璟)선생님 약력

(죽포 (竹圃)OH CHAE KYUNG)

 

1919년 6월 2일생 (황해도 옹진군)

 

본관 : 동복

좌우명 최고는 못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경영관 점.선.원(點.線.圓)

가훈 平凡을 非凡으로

감명 깊은 책 성경

애창곡 사랑의 미로

즐겨하는 운동 청소

좋아하는 색깔 무지개

좋아하는 꽃 장미

 

학 력

 

~ 1941 일본 입교대(立敎大) 경제과 졸업

1977 ~ 계명대 명예문학 박사

 

경 력

 

1956.7 ~ 1959.1 공보실 실장

1959 ~ 대한여행사 이사장

1960 ~ 舊황실재산 사무총국 총국장

1961.7 ~ 1962.6 공보부 장관

1962 ~ 장미회 회장

1963 ~ 태평양지역관광협회 회장

1964 ~ 관광공사 총재

1968 ~ 지역사회학교후원회 이사장

1970 ~ 대한체육회 부회장, 고문

 

1970 ~ 1974 기독교방송 운영이사장

1970 ~ 국제광고협회 한국회장

1972 ~ 세방 명예회장

1973 ~ 실명예방협회 회장

1974 ~ 현 언어교육연구원 이사장

1977 ~ 1983 동아일보 이사

1977 ~ 한국 관광장학재단 이사

1980 ~ 국제로타리 한일친선연락위원장

1981 ~ 1987 장애자재활협회 부회장

1982 ~ 국제로타리 홍보위원장

1983 ~ 1985 동아일보 사장

1984 ~ 장애자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

1985 ~ 국제로타리 한국총재단회의 의장

1985 ~ 1989 RI서울국제대회 국내준비위원장

1987 ~ 1990 문공회(문화공보부,공보처 친목단체) 회장

1989 ~ 한국종이접기협회 회장

1992.6 ~ 현 대한민국 삼일회 총재

1993 ~ 1995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 이사장

~ 현 우남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1993.11 ~ 현 아·태관광협회 종신회원

1993 ~ 유엔아동기금 한국위원회 준비위원장

1996.5 ~ 2000 플랜인터내셔널한국위원회 회장

1997 ~ 현 한국종이접기협회 명예회장

 

저 서

 

수상22년(수필집)/1973

죽포문집(수필집)/1977

THE HANDBOOK OF KOREA/1968

죽포 칠십이자 술/1989

죽포 오재경 문선집

 

 


유경환 여사님 글 (유카리나)

2019.04.29 07:40

 

국장님의 이 블로그를 통하여

비로소 이런 훌륭한 분이 계셨었구나.

알게 된 분이시지만,   그분의 좌우명처럼

'최고는  못되어도   최선을 다 하자'는 정신을

확고하게 실천하며 사신 분이시군요.   하지만,

장관까지 지내셨으니, '최고'의 고지에도 오르신

분이십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블로그 속의 엄청난 분량의

자료들을 사이버 방송박물관이 개관

되면, 유용하게 쓰이도록 다시 한 번 검토

하시고 관련 자료들이 있는  주소를 찾아

필요한 부분을 첨부하여    재편집하시는 

 노고와 열정을 느낍니다.    두고두고

유용한 방송역사의 史料로 널리

쓰이기를 기대합니다.




관련 사진 모음 




오재경장관이 남산준공후

남산 스카이 라운지에서 전국방송국장,

직할 송신소장 회의를 개최하고 찍은기념 사진

오른쪽에서 네번째 앉은 분이 오재경, 오른쪽 방송

관리국장 이규일, 왼쪽 기감 이인관, 그 옆에 이운용

KBS방송국장. 김진영, 황기오, 배준호, 한기선,

노정팔, 김광형, 이태구, 신경석, 권오진,

김서봉, 성기석, 윤치호, 김상헌 등

31명 참석

 


 


남산시대를 여는데 힘을 기울이였던분 들

앞줄 가운데 분은 오재경 공보실장, 그 오른쪽

이인관, 박수한, 왼쪽 이규일, 한기선, 정순일

뒷줄 두번째부터 이범흥, 최당, 노정팔,

정남조, 이용실, 남학현, 조병희.


 

남양송신소 세울 때 오재경



암펙스 녹음기 테잎 커팅 1957년 7월 25일로

오재경 장관, 이규일 방송관리국장, 이안관기감


 


LP제작기기를 들여온 후 레코드 제작과정을 돌아보는 모습

 








 

1950년대 공보실장 (공보부)시절, 설날에 공보실장을

찾아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방송인들 강정수, 황우겸

(강정수 왼쪽)임택근, 강익수, 이상만, 한기욱,

이상희, 송재남, 박호준님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TV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 그 얘기 ( 1 )

http://blog.daum.net/jc21th/17780061

 

KBS TV 개국 (1961년 12월 31일)을 위해 힘쓴 사람들

http://blog.daum.net/jc21th/17780988

  

CBS 기독교방송과 오재경 전 공보부장관

http://blog.daum.net/jc21th/17780427


<추모의 글> TV방송 창설자 오재경,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 문제안

http://blog.daum.net/jc21th/17781360



KBS TV 창설자 오재경 전 공보부장관 별세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