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1C7-A-cHvI4 아나운서 임택근 1950년대 60년대 대한민국 국민이면 임택근 아나운서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뉴스, 공개방송 사회, 스포츠를 비롯한 각종 중계방송 등 주요방송프로그램에서는 으레 임택근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골에서 서울여행을 하시는 분들은 방송국을 찾았고 임택근 아나운서를 볼 수 있다면 더 없는 행운이었다. 임택근의 공개방송 사회를 보는 날이면 방송국 앞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서 마라톤 등중계방송은 목숨을 거는 것이었다고 임택근 아난운서는 회고한다. 중계방송 차 위에 올라타고 마라톤 선수들의 뒤를 따르며 생으로 중계방송을 할 때는 그 주변 상황까지도 모두 생방송으로 묘사되었다. 무슨 대본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쉼 없는 말을 이어가며 방송시간을 공백 없이 매꾸어 나갔다. 3.1절 행사 등 유난히도 시가행진이 많던 시절 그 상황을 묘사하며 하는 방송을 듣는 청취자는 임택근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중계방송을 들었던 시절이다. 위 휘문고등학교 졸업 때의 사진 아래 초기 임택근 아나운서 부산 피난시절 임택근 입사무렵의 사진 1951년 6.25전쟁 중 부산에 가 있던 중앙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선발했다. 대학을 졸업해야 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던 시절 부산피난시절 임택근은 연세대학교 1학년 재학 중이었다. 감히 아나운서 꿈을 꿀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지만 19살의 대학교 1학년 학생 임택근은 노창성 중앙방송국장을 찾아갔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목소리를 한번만 이라도 들어 보아 달라는 임택근의 간청에 노창성 국장은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험에 응시 할 수 있도록 특별 배려했다. 대학교 1학년 어린학생 임택근은 그 시험에 합격해서 아나운서로서의 방송을 시작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몇 달이고 뒷자리에 앉아서 콜사인만 넣어야 했던 시절에 바로 마이크 앞에 설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던 것이다. 1953년 방송국이 서울로 오면서 그의 역량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동화백화점 (신세계백화점)에서 노래자랑공개방송 1955년 대한민국 땅에서 최초로 노래자랑 공개방송이 있었다. 방송국 스튜디오가 좁아서 동화백화점(신세계 백화점)을 빌려 공개방송을 시작했다. 이때 동화백화점에서는 스무고개와 노래자랑 공개방송이 있었다. 첫날 노래자랑은 선배 장기범 아나운서가 담당했고 스무고개는 임택근 아나운서의 몫이었다. 그로부터 중앙방송국의 중요한 공개방송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던 노래자랑과 스무고개는 장기범, 임택근 아나운서가 번갈아 가면서 사회를 맡았다. 오랜 세월 송해가 인기를 모으는 노래자랑 원조사회는 장기범 · 임택근이었고 젊고 잘 생기고, 목소리 아름답고, 말 잘하는 임택근을 보기 위해 방청객들은 줄을 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 할 때는 노래 부를 사람이 없으면 어쩔까? 방청객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를 걱정하며 시작된 노래자랑은 인기리에 오랜세월 이어져 오늘날 대한민국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다. 1956년 호주(오스트레일리아) 에서 제 16회 멜버른 올림픽이 열렸다. 많은 선배 아나운서들을 뒤로 하고 장기범 아나운서, 김성열 엔지니어와 함께 올림픽 중계방송 장도에 올랐다. 권투에서 송순천선수가 아깝게 금메달을 놓치고 은메달에 머물렀던 그로부터 60년이 더 지난 그 대회다. 그 대회 올림픽 중계방송에 임한 모든 아나운서 중에서 가장 젊은 24살 임택근의 목소리는 만천하에 울려퍼졌다. 필자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는 확성기를 통해서 그 중계방송을 전교생에게 들려주어서 그 방송을 들었던 필자의 머릿속에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때 마라톤에 출전해서 4위를 기록한 이창훈 선수는 오랜 세월 선수와 중계방송아나운서로 인연을 맺었다. 위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마라톤 4위 이창훈과 함께 한 사진이고아래는 2년 뒤 임택근 아나운서 중계방송한 제3회 아시안께임에서 1위로 골인지점을 향해 달리는 이창훈 선수의 모습이다. 여기에 관해 윤미림 성우가 쓴 자세한 글이 있다. 위는 1960년 로마올림픽 중계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이고 아래 1964년 동경올림픽 축구경기장 중계방송 장면 그로부터 임택근은 1960 로마, 1964년 동경, 1968년 멕시코 연 4회에 걸친 올림픽 중계방송을 해서 전무후무한 4회연속 올림픽 중계방송을 한 기록을 세웠다. 1964년 MBC로 옮겼기에 1956년과 60년은 KBS 아나운서로, 1964년, 68년은 MBC아나운서로 참여했다. 1964년 MBC 동경 올림픽 중계방송은 강영숙 아나운서 가 여성으로는 처음 올림픽을 중계 방송 기록을 세웠다. 강영숙 아나운서와 함께 MBC 시절 KBS아나운서실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임택근 아나운서가 1964년 4월 MBC로 옮겼다. 발령일자는 2월 26일 이었지만 실재로 근무한 것은 4월 부터다. 그 시절 MBC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재력가이자 부산 MBC사장이던 김지태의 재력을 바탕으로 이어가던 서울 MBC가 갑자기 5.16장학회로 넘어가면서 인력과 재력면에서 위기에 봉착했다. 서울 MBC창립인사들은 'RSB 라디오 서울' 창립에 참여 하면서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자 인력 공백상태에 이르고 자금줄이 끊겨 어려움이 극도에 달했다. 임택근 아나운서가 그 어려움을 타개하는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다. 직책은 방송부장, 방송분야를 총괄하는 자리였고 아나운서 실장은 KBS에서 최세훈을 영입했어도 중요프로그램은 여전히 임택근 몫이었다. 김기수 선수와 인터뷰하는 임택근 아나운서 동영상에서 틀리는 목소리 1966년 6월 25일 서울특별시 장충 체육관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2-1(72-69 68-72 74-68) 판정승으로 꺾고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을 때 중계방송 목소리다. MBC에서 임택근의 방송, 임택근의 목소리와 함께 청취자가 늘어나고 경영은 차츰 호전되어 1969년 8월 8일을 기해서 텔레비전방송도 함께했다. TV개국과 함께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진행자의 이름을 넣은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임택근 모닝 쇼’ 임택근은 MBC 상무가 되어 방송 경영 일선에서 활동했지만 여전히 방송현업에서 그의 명성은 이어졌다. 전무시절1980년 격동기에는 사장직무대행을 맡아 업무로 수행했다. 위 1962년 방송문화상 수상 서울시 문화상 1966년 아래 1977년 옥관문화훈장 수훈 임택근은 방송공로로 방송인으로는 최초로 1961년 녹조 근정훈장 수훈을 비롯해서 1962년 그 시절 방송인으로는 최고 영예의 상 제5회 방송문화상을 수상했다. 1966년 서울시 문화상, 1969년 방송 유공자 표창, 1977년 옥관 문화훈장, 방송인으로는 최초로 2,000년 7월 13일 대한 체육회 창립 80년 공로패를 받았다. 그리고 2009. 3월 27일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더 자세한 이미 써 올린 글과 약력으로 대신한다. .
임택근 아나운서 약력 1932년 12월 8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출생 1939년 서울 수송국민학교 입학 1945년 휘문중학교 입학 1949년 5월 1일 시공관에서 공연한 연극 낙랑공주와 마의태자-왕건역-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연희대학교 압학 1951년 중앙방송국 아나운서 (학업, 방송 병행) 1953년 연희대 연극반인 연희 연극 예술연구회 창립 대표 1954년 축구 중계방송 시작 1955년 5월 서울 환도후 최초의 스무고개 공개방송 사회 1957년 노래자랑 장기범 아나운서와 번갈아 가며 진행 1956년 호주 멜버른 올림픽 중계방송, 장기범 아나운서와 1959년 제 4회 아시아 여자 농구대회 중계방송(마닐라) 1959년 제 3 회 아시아 경기대회 중계방송 (일본) 1960년 이태리 로마 올림픽 중계방송, 이광재 아나운서와 1961년 5. 16 지지 육군 사관생도 시가행진 이동 중계방송 1961년 KBS 아나운서실장 1961년 12월 31일 KBS TV 개국식 진행 실황중계방송 1964년 4월 MBC 방송부장 1965년 7월 1일 문화방송 이사 1966년 2월 문화방송 상무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중계방송 1969년 MBC개국 프로그램 임택근 모닝쇼 진행( 진행자의 이름을 넣은 최초 프로) 1974년 방송협회 운영위원장 1974년 11월 1일 문화방송 경향신문 방송부문 전무 1980년 문화방송 사장 직무대행 1980년 7월 5일 무화방송 퇴직 문화방송 퇴직후 방송 문화 진흥회 이사, 대한교육보험 상무, 연세대 동문회 상근 부회장겸 사무총장, 코스모스 악기 고문, 아나운서 클럽회장, 한국복지재단 이사, 두리비젼 회장 등을 역임 상훈 1958년 공로표창-공보실장- 1961년 녹조 근정훈당 1962년 제5회 방송 문화상 1966년 서울시 문화상 1969년 방송 유공자 표창 1977년 옥관 문화훈장 2,000년 7월 13일 대한 체육회 창립 80주년 공로패 2009. 3. 27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액 화 보 . 1961년 12월 31일 KBS-TV개국 실황중계방송 이승만 대통령 장기범아나운서와 함께 오른쪽분 임택근 아나운서 5.16 지지 육군사관학교 시가행진 중계방송 KBS-TV초기 방송프로그램 MBC 아나운서들 청화대 방문 멜버른 올림픽 중계방송 장도에 오르던 때장기범(좌), 김성열(둥) 과 함께 한 임택근 아나운서(우) 사울시 문화상 시상식장에서 오른쪽 최창봉 MBC여의도사옥 기공 4.19 직후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과 임택근 아나운서 관련글보기 MBC 문화방송 아나운서 그 이름(명단) 그 얼굴 사진http://blog.daum.net/jc21th/17782218 멜번 올림픽과 임택근 아나운서 방송추억 http://blog.daum.net/jc21th/17780286 1950년대 KBS 전국 순회 이동방송 보고서/ 정읍, 순천, 여수http://blog.daum.net/jc21th/17781628 임택근 아나운서 그때 그 목소리, 대한민국 성우 1기 윤미림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2417 김상근 아나운서님 글 (박사·교수) 임택근. 올해 83세. ‘임택근’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가수 임재범과 탈렌트 손지창의 아버지라는 정도로 알고 있을 뿐, 한때 대한민국을 웃고 울리던 명 아나운서였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 하는 듯 하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6.25 전쟁 중인 1951년 9월, 당시 대학 1학년의 학생 신분으로 역시 부산으로 피난 와 방송하던 KBS-서울 중앙방송국에 아나운서 공채 시험에 합격해 방송에 첫 발을 들여 놓는다. 워낙 성실하여 철저하게 방송 준비를 하는데다가, 우렁차면서도 부드럽고, 청량하면서도 신뢰감이 있는 목소리에 마스크 또한 대한민국 표준 미남형이어서 그의 인기를 따라 갈 사람이 없었다. 그가 거리에 나서기라도 하면 새파란 중고생들이 “야! 저기 임택근 간다”고 소리쳤다. 택시 기사들은 임택근을 태운 게 영광이라며 요금을 받지 않았다. 임택근이 숙직하는 날이면, 어떻게 알아 냈는지 일류 요정이나 음식점에서 밤참을 보내오곤 했단다. 1957년 8월 15일 방송문화연구실에서 아나운서 인기도를 측정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최고 대중 잡지 <희망>, <아리랑>, <신태양> 독자 투표 란에 임택근이 단골로 1등을 찾아 했다. 그는 뉴스는 물론 당시 인기 최고의 라디오 프로그램 <재치문답>, <퀴즈 올림픽>, <스무고개>, <퀴즈 열차>, <노래 자랑>등 수많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을 전담하다 시피 했다. 당시 대다수 국민은 6.25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 문화다운 문화를 향유할 수 없었다. 오직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방송을 듣는 게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한 시대 상황에서 임택근은 거의 국민적 우상이었다. 그가 진행한 <퀴즈열차>는 오프닝에 “안녕하십니까? 여객전무 임택근입니다”라는 멘트가 들어 가는데, 그 말이 당시 크게 유행 되어 널리 회자되기도 했단다. 지금으로 치면 개그 콘서트의 “느낌 아니까” 이상의 유행어 였다. <스무고개>는 출연자들에게 문제해결의 힌트를 던져 준 뒤 스무 번의 문답이 끝나기 전에 답을 찾게 하는 포맷이다. [비밀의 문]에서는 사전에 답이 공개 되어 청취자는 답을 알고 있는 것을 게스트가 풀어가는 걸 듣는 프로그램인데, 각 고개 마다 힌트가 들어가기도 한다. 이를테면 “동물성 입니다”식이다. 대학가에서는 이걸 차용해 야유회 때 퀴즈로 쓰기도 했다. 지금의 상공회의소가 있는 소공동의 공회당 강당에서 공개방송 녹음이 있었는데, 임택근을 보기 위해서 구경 온 사람들로 혼란이 일어 경찰 기마대가 군중을 정리하곤 했단다. <노래자랑>은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아마추어들의 신청을 받아 주말 예선을 거쳐 매월 주 장원끼리 겨루는 프로그램이었다. tv N에서 방송되고 있는 <슈퍼스타 K>, sbs <K 팝 슈퍼스터 2>의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전 포맷이면서,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의 할아버지 뻘 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지금의 프레스 센터가 있는 대한공론사에서 진행하다가, 워낙 사람들이 몰려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이 있는 동화백화점 자리로 옮겨 제작 되었다. 그래도 새벽부터 줄을 섰지만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많았고, 다혈질의 팬들이 유리창을 깨는 사고도 있었다. 그리고 공개방송 녹음이 끝나면 수 십명의 팬들이 임택근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고 한다. 아이돌 팬 클럽의 원조 격이다. 이후 임택근은 스포츠 중계를 섭렵하기 시작한다. 축구, 배구, 농구, 레스링, 마라톤 등에서부터 심지어 국군의 날 공군 전투기들이 벌이는 <에어쇼>까지 중계 방송을 했다. 방송을 독식하다 시피하다 보니 아나운서실 내의 시기도 많았고 선배들의 타박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력으로 그의 방송을 따라 갈 사람이 없기에 시기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VIP가 나오는 상당히 어려운 의식 중계방송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그에게 당시 방송과장이 “임군, 정말 수고 많았어. 아마 자넨 방송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라고... 감격하여 그를 얼싸 안았다고 한다. 방송국 간부들도 그의 완벽한 방송에 경외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야구중계 만큼은 하지 않았다. 그의 동기 아나운서 황우겸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야 그래도 내가 명색이 야구 명문 동산고등학교 출신 아니냐? 야구만은 내가 할테니까 넌 얼씬거리지 마. 야구는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라고 한 술자리에서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한다. 임택근은 1956년 11월 22일부터는 호주에서 개최된 멜버른 올림픽 중계방송을 했다. 당시 그의 선배 아나운서겸 인솔자인 장기범 아나운서와 기술자 등 3명이 갔다., 우리나라가 해외에서 벌어진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3명의 거대(;) 중계 요원을 파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겨우 일어선 우리나라의 당시 형편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택근의 스포츠 중계는 마치 그림을 설명하듯 상세하고 생동감 있게 전하면서도, 어떤 때는 산천초목이 흔들릴 만큼 큰 소리로 사자후 (獅子吼)를 토해 내며 승리의 감격을 전해 와 온 국민을 하나로 묶는 위로와 에너지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슴 저미는 목소리로 온 국민의 가슴을 흔들어 놓기도 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들 딸들이 멜버른 올림픽 스타디움에 서서히 들어서고 있습니다. ··· 기나긴 전쟁의 포연 속에서 꿋꿋이 살아난 우리 젊은이들이 세계의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마주하며 걸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 임택근의 볼에는 자기도 모르는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고, 이를 듣고 있던 고국의 온 국민의 가슴에도 촉촉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임택근은 1959년에는 쿠알라룸푸르에서 벌어진 아시아 여자 농구 대회에서 우승한 전 경기를 중계방송하고 귀국했다. 유독 일본을 싫어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을 이기고 돌아 온 선수단과 임택근을 경무대로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임택근을 가리키며 “임 변사, 앞으로 나와. 자네 참 수고 많았네. 어떻게 그렇게 말을 빨리 하고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것 같이 생생하게 중계를 하나? 용하구먼” 했단다. 2020년 3월 15일자 임택근 아나운서 특집글 . 임택근 아나운서 삼가 명복을 빕니다. [박찬숙] [오전 6:45] 생전에 큰별이셨던 대선배님. 하늘나라에서도 큰 별로 빛나실겁니다. 머리숙여 명복을 빕니다~~~ [이계진] [오전 6:48] 춘하추동 빙송국 이장춘 사장님, 위 영상 자료는 백 마디 말이 필요 없는ㅡ 고인을 위한 마지막 최고의 선물입니다.... 잘봤습니다.... [정흥숙] [오전 6:54] 이장춘이사님! 감사합니다! 고인과 살아있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귀한 선물입니다! [정석균] [오전 7:30] 감사합니다 저와의 인연이 긴세월이 아니었지만 존경했던 선배였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귀한 자료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최철미 (Rachel Choi)] [오전 7:13] 삼가 명복을 빕니다. [최철미 (Rachel Choi)] [오전 7:14] 유가족분들께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같이 하시길 기도합니다. [맹관영] [오전 8:30] 기어이 가셨네요! 冥福을 빕니다. [정흥숙] [오후 9:35]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재헌] [오후 9:44] 사진 [박재헌] [오후 9:44]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전옥수] [오후 9:54]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현정주] [오전 7:25]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최철미 (Rachel Choi)] [오전 7:13] 삼가 명복을 빕니다. [최철미 (Rachel Choi)] [오전 7:14] 유가족분들께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같이 하시길 기도합니다. [황인우] [오전 8:30]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성선경] [오전 9:04]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병열 성선경 [김주혜] [오전 9:50] 생전의 그 모습, 멋진 음성 그립습니다. 애절한 맘으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채영신] [오전 10:02] 감사드립니다 이장춘대표님 [김경숙] [오전 10:18] 국장님감사합니다 어느자손이 생전에 이런기록을 하겠습니까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이렇게 좋은일하시니 다시한번감사드립니다 기쁜일많으세요따뜻해지면 임회장과함께 뵙겠습니다 오늘영상고맙게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강미란] [오전 10:51] 아나운서의 영원한 큰별! 고인이 되신 대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김무생] [오전 11:11] 삼가 명복을 빕니다. [Robert Kim 김정수] [오후 4:00] 감사합니다 이장춘선배님 전송주신소식을 미국에 한인방송사와 전직방송회원들께 카톡으로 전송과 이메일로 알려드렸습니다. [조길자] [오후 2:46] 백년에 한명 나올까 한 아까운 선배님이 가셨네요. 명복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이정부] [오후 6:34] 아나운서의 자부심을 대신했던 이름, 임택근 대 선배님 하늘에서도 무지개 같은 나날 되시길 빕니다. 유카리나 2020.01.12 08:32 한 시대의 역사를 모두 뒤로하고 영면에 드셨군요. 명복을 빕니다. 산란 메라니 2020.01.12 13:47 좋은 세상을 등짐지듯 떠나신 님의 모습을 이제는 편히쉬십시오. 라고 말씀올리고 갑니다 영원한 영면의 세상에서도 님은 빛을 발해주실거라는 믿음이갑니다 케이양 2020.01.13 17:08 임택근 아나운서 님의 명복을 빕니다 ㅠ~~ 고통과 아픔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쉬세요 ㅠㅠㅠ~~ KimMooSaeng 2020.01.14 03:32 고 임택근 대한민국 방송의 대선배님, 삼가 명복을 빕니다. 1951년 아나운서가 되신 이래, 참 어려웠던 시절 이른바 "장인정신"으로 대한민국의 방송현장을 지켜오셨던 분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특히 스포츠 중계 현장에서는 "고국의 계신 동포 여러분"의 대명사이시기도 하셨죠. 1956년 처음 중계됐던 호주의 멜버른 올림픽 때는 박진감과 생기있는 음성으로 대한민국 선수들의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퀴즈열차,스무고개,노래자랑>등의 프로그램도 진행하시면서 국민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 분의 방송 실수담 중에서 인상깊게 들려오고 있는 것 하나는 옛 시절 고 이승만 대통령이 월남에서 귀국할 당시 귀국 중계를 하실 때 "활주로에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굴러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될 말을 그만 "지금 대통령이 굴러들어오고 있습니다." 라고 실수를 해 "대통령 모독이 아니냐?" 라며 질책을 당하고 시말서를 쓰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이 분을 TV에서 퍽 인상깊게 뵌 기억은 1974년 겨울(1월달) 제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준비를 하던 시절 같은 동네 살던 한 아저씨가 고개 너머 마을로 이사를 했는데 그 집에 볼 일이 있어 들렀을 때입니다. 그 집 TV 화면에 처음으로 진행자의 이름을 넣어 프로그램 이름을 정했다는 "임택근 모닝쇼"가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은 신사 중의 신사이셨고 부드러우면서도 나긋나긋하게 그러면서도 따뜻한 음성으로 편안하고 퍽 여유롭게 그리고 참 멋있게 진행하셨습니다. 그 때의 그 멋진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지금도 선명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2015년부터 해마다 한 번씩 성묘하는 마음으로 서울 덕수궁길(서울 덕수 초등학교)에 있는 <첫방송터>를 찾고 있습니다. 작년(2019년)에도 다섯번째로 찾아 유허비의 오물을 닦고 주변을 청소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첫방송터>를 찾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방송의 대선배님들의 상징물인 <첫방송터> 통해 어려웠던 시절 <장인정신>으로 방송현장을 지키신 대선배님들의 그 <장인정신>을 배우고 가슴에 새기며 그것을 방송인 뿐만 아니라 모 든 사람들에게 알려서 각자의 삶의 기준점을 정하는 촉진제로 삼아 보자는 것입니다. 고 임택근 대선배님, 당신께서 남겨주신 대한민국 방송의 그 뜨거운 <장인정신>을 되새기겠습니다. 고 임택근 대한민국 방송의 대선배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하시는 여러분 2020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건강과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춘하추동방송>을 이끌어 가시는 대한민국 방송의 상록수 이장춘 대선배님 늘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김무생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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