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유호(유해준)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이장춘 2019. 5. 7. 08:47


 

 

 

1945년 행방을 맞고

KBS전속작가가 된 유호선생님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수많은 대중가요,

군가 등을 쓰고 60년대, 70년대 최고의 드라마

작가로 그 시대에 살던 분들의 벗이었던 유호선생님!

오랜 세월!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말이 들리더니

2019년 5월 6일 부음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방우회(한국방송인 동우회)

회원이십니다.



유호(유해준)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김영수, 유호

두 분의 작가분이 KBS 편성과에 입사

했습니다. 똘똘이 모험 등 드라마를 비롯해서

여러 글을 쓰셨습니다. 그 무렵에는 일제강점기

부터 부르던 대중가요를 부르다가 해방이 되어서

우리민족의 정서에 맞는 노래가 적었습니다.

KBS는 우리정서에 맞는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48년 3월 최초로 공모한 드라마 작품 심사를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으로 그때의 방송국 드라마나 편성등에 힘을 가울이시던들의
모습입니다.   뒷줄 왼쪽분이  유호님이 차례로 김희창, 이백수,  노정팔
앞줄 왼쪽부터 송영호, 김진섭, 윤백남, 이계원님입니다.

 


 

유호님은 1991년 9월 9일, 여의도 KBS에 세운  
물망비  동판 글을 쓰셨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문시형 선생님 글과

그 밖의 관련글을

연결합니다.



우리나라 방송사에 길이 남을 방송작가의 대명사 유 호
 

전 방우회 회장 문시형님 유고
 

 



 

히히히히! 호호호호!  20평 남짓한
한국방송작가협회 사무국 사무실 안에
웃음바다로 변한다.  "한 장만 찍지 왜 이리
많이 찍으시요." (농담조) "미안합니다.
 
잘 찍으려고 하는 거니 용서해 주세요
." 유호선생과 본지 사진기자의 대화이다. 사무실에
있던 여직원은 호호호하면 입을 가리고 남직원은 파안대소
 핫핫핫한다. "사진 잘 나오면 한 장 뽑아 줘요."
"네, 한 장 잘 뽑아 올리겠습니다."
 
이 또한 보통 오고가는 말에 지나지 않건만
 사무실 안이 웃음바다가 된다. 필자도 덩달아 웃었다기보다
 웃음을 머금은 게 사실이지만 기이한 일이었다. 웃음이 왜 터져
나왔을까?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마디로 그 이유를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으나 명랑한 유머적인 유 호 씨의
성품에서 우러나온 게 아닌가 한다.
 
보통 노인과는 달리 빨간 셔츠에 잠바차림,
 거기다 모자까지 쓰고 계신 멋쟁이 할아버지의
말씀이니 젊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하는 마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유 호. 이는 필명이며 본명은 유해준(兪海濬)이다.
 방송드라마 작가, 유모어 소설작가 또는 명량 소설작가로 유명
하기에 본명을 따라 유해준이라 하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1921년 11월 15일생이니 금년으로 고희(古稀)를
 지난 지 1년이 된다. 우리나이로 일흔하나가 되는 폭인데
 참으로 정정하시다. 정정하다는 표현보다 청년이라면
지나친 표현이고 장년(長年)이라고 하는 게
옳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1945년 10월 약관 스물다섯 살에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요즈음 말로 연예담당 PD로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유 호 씨는 한대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를 지낸 일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한평생 방송을
 천직으로 했던 방송인이라 하겠다.
 
그는 본격적으로 방송계에 몸을 담은 것은
1945년 10월이었지만 실은 1944년경부터 작가로서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유 호 씨의 학력을 더듬어 보면
 방송작가가 될 분이 아니고 화가가 돼야 옳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제2고보 (지금의 경복고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제국 미술학교에 수학
했으니  화가 지망생 이었던 것이다.
 
명문인 제국 미술학교에 다녔다고 해서
한때 우리나라 유일의 연극전문극장인 동양극장에서
 포스터도 만들고 심지어 극장 앞 대형 간판도 그린일이 있으며
징을 치면서 무대감독일 을 보기도 했다. 유호 씨는 50년 가까이 된
지난날을 회상하고 사람에게 인연이란 것이었게 마련인가
보다고 하면서 연극의 대가이신 박진(朴珍)씨와의 만남은
 동양극장에서의 첫 만남이었고 두 번째 만남은
방송국에서였다고 말했다.
 
대학을 다닌 젊은 무대감독이라 고 해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유호 씨는 박진 씨를 매우
존경한듯 하다. 우리나라 제일가는 영화배우라 해도과언이 아닌
 김승호 씨가 연출가의지시를 무시하고 리허설 할 때와 달리  무대 위에서

자기 마음대로 연기를 했다고 해서 연출가인 박진씨는 관객이 있건 없건

 무시하고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야단을 치고해서 이로 인해

부랴부랴 막을 내린 일이 있었다. 고한다.
 
이일로 극장주 김 모 씨와 다투게 되고
급기야 육탄전까지 벌어졌다고 전하는 유호 씨의
얼굴에는 시종 웃음이 감돌기도 했다. 박진 씨와의 만남을
동양극장에서 있었던 일로부터 설명한 유호 씨는 1945년
10월경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문예담당 PD로서 곤경에
 처한 일은  비록 난처했지만  기분 좋은  통쾌한
일 인양 박진선생의 호탕한 기개를 말한다.
 
박진선생이 드라마에서 미국 사령관인
하지중장과 군정장관인 러치를 일컬어 '멸치'라고
비꼬아 벌어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박진 씨와
 '멸치사건'이다.    "도대체 글러먹었단 말이야.  하치인지
( 하지를 하치로 꼬집은 것이다.)러치 인지 멸치인지는
 몰라도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이렇게 비꼰 대사를 오늘에 와서도
기억하고 있으니 가히 당시의 난처함을

 짐작케 한다.방송작가로서 선배인 박진 씨를

존경하기에 옛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다음은 문제안씨와의 만남인데
유호 씨는 동양극장의 무대감독으로 인연을 맺어
 방송국으로 이어졌다고 해서 마치 방송 드라마작가로서
 대성하고 원로로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게 마치
 문제안씨와의 만남에 있는 듯 강조하기에 필자는
문제안씨와 형제간이어서 어색함이 더했다.
 
문제안씨의 소개로 1944년에 그러니깐
 해방되기전해에 방송낭독소설 두 편을 쓴 적이
있다면서 실수담을 '인생드라마'라는 제목으로 방송
작가들의 감춰둔 이야기로 방송작가협회 회보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는데 이를 소개한다.   
 
"문형의  소개로  44년도에 나는
(유호)방송낭독 소설을 두 편인가 쓴 적이
있다.  한번은 내가 쓴 것을 내가 직접낭독을 하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바람에 당시 그 프로를 담당했던 송영호씨가
어디한번 해보라고 해서 마이크 앞에 앉기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청색불이 켜지자 심장이 뛰는 바람에 어찌나 빨리
 읽었던지 15분 소설을 10분 만에 끝냈으니
오기란 좋지 않을 것이다.
 
 15분 방송을 10분에 끝냈으니
방송사고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방송사고로
방송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역시 문제안씨의 소개도 있어
 1945년 10월 문예담당 PD로 오늘의 주인공인 유호선생이
방송드라마 작가로서 기반을 마련한 것이라 하겠다.
 
1945년 10월 입사 당시 시인이기도한
안서 김억선생이 부장으로 계셨는데 애송이 작가로서
천대 아닌 천대를 받은 일이 기억에 새롭다면서 자신의
 잊지 못할 작품으로 방송소설 '기다리는 마음'과 텔레비전
 드라마 '돼지'를 들었다. 해방직후인 탓도 있지만 당시 소위
문예담당 PD로서 기획에 원고청탁, 낭독자 수배에
이르기까지 동분서주 몹시 바빴다.
 
바쁘기만하면 젊은 시절이니 문제가 없었으나
 가장 중요한 일은 청탁원고의 입수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골탕 먹기가 다반사였다. 유 호선생은 이에 대비하고 나름대로
작품을 써 대비를 했다고 한다. 바로 데뷔 작품으로 창작한
방송소설이 '기다리는 마음'인 것이다.
 
당시 상관인 안서 김억선생은 원고를 다 읽고
"좋군. 잘 썼어."하면서 방송은 일단 이번 주엔 보류하고
 다음 주에 방송하라고 지시를 내리니 상사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는 유호선생은 난처한 처지가 되어
 고심했다고 한다.
 
새로운 편성에 의한 소설낭독이니
첫 회는 기성작가의 작품을 내라는 것이었다.
"기성작가를 제치고 신인 원고를 어떻게 방송할 수 있어.
 원고를 받아오도록 하세요." 신인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꼈으나
 50대인 아버지와 같은 김억선생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주소만 가지고 그야말로 장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원고를
받아와 방송이 사고 없이 무사히 나가도록한 그때가 바로
 엊그제 일 같다고 유호선생은 웃는다.
 
전화연락이 될 수 없던 시절이니
발로 뛰어야 했고 방송시간은 다가오고 하니
정황이 짐작되고도 남을 일이다. 더더욱 녹음방송이 아닌
생방송이니 말이다. 텔레비전 방송의 초창기인 1960년대 초에
개국한 프로그램을 보면 상업방송이어서 'OB쇼'라는 상호를 딴
프로그램이 있었으며 라디오 프로그램(KBS)에도 '경전시간'이나
 '군정청시간' '국군의 시간'등 단체 또는 기관의

 이름을 붙인 프로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어느 작가의 이름을 붙여
프로그램 명칭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TBC-TV 주간 기본방송편성표에  한때 '유호극장'

이란 프로그램이 존재하였다.

 

 

 

 
특정한 드라마작가의 이름을 붙여
'유호극장'. 아마도 이런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드라마작가 유호란

이름이 얼마나 시청자에게 어필했었나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한마디로 그의 인기가 대단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작가의 인기와 역량이 어떠했기에 주간편성표에
그것도 골든아워에 '유호극장'이 등장했을까 짐작하고도
 남을 이야기다. '일요극장'이 '유호극장'으로 바뀐 일과 같은 경우는
 텔레비전 방송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아니 다채널 시대에 오고 유선

 텔레비전이 등장하는 앞날에도 있기 어려울 것이다. 잊지 못할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서 앞서 열거한 '돼지'는 따지고 보면 4공화국이 저지른

관의 횡포가극에 달한 시절의 부산물 중의 하나이다. '돼지'는

 1971년 8월 21일에  TBC-TV를 통해 첫
방송된 주간드라마이다.
 
내용은 어느 시골대가의 머슴인 '돼지'가
우직한 성품 하나로 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면서도
 주인 영감과 가족을 위해 온몸을 내던져 살아가는 얘기였다.
인간미가 흐르고 흐뭇한 시골 인심이 물씬 풍기는 드라마이다.
주간 드라마로서 50회로 기획된 '돼지'가 26회로 도중하차,
 갑자기 방송이 중단된 사건이어서 유호선생은
 잊지 못할 드라마로 꼽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러니깐 1972년 초의 일이다.
남북회담이 열리고 있는 판문점에 나온 북측대표가
 "남반부 드라마 중 볼만한 것은 돼지뿐"이라는 말 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어 관의 강요에 의해 드라마가 중단
되었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중단하라는 압력을 가한 당시의 당국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북의 대표가 '돼지'를 보아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특히 북의 대표를 '돼지'앞에 묶어
 놓은 격이니 결과적으로 예상되는 이드라마의 영향은
긍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났을 게 아니가?
아쉽기만 하다.
 
특히 독일의 통일에 끼친 텔레비전의 위력이
 어떠했었나를 생각하면 당시의 관은 참으로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유호선생은 아직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고 하면서
'드라마 네트워크' 제9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이래저래 나는 '돼지'를 잊지 못할 미완성 드라마로 
간직하고 있다. 비록 절필선언을 한 입장이긴
 하지만 죽기 전에 기회가 오면 이것만은
완성을 하고 싶은 꿈이야."
 
'절필선언'을 당장 취소하고 이것만은
완성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살리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
 원고지 빈칸을 매꿔 주시기 바란다. 아니 방송국에선 어떤 근거인지는
 모르지만 툭하면 시청자의 요청에 의한다면서 앵콜방송을 하는데
이 같은 사연을 시청자가 안다면 앵콜박수가 천지를 진동시킬
것은 뻔 한 일이다. 방송문화상에 문화포장이
 한층 돋보일 것이다.
 
고집 이야기가 나왔으니 일화 한 가지를

덧붙일까 한다. 1948년 서울중앙방송국에 이관희라는

 분이 국장으로 부임한일이 있다. 이분과 유호선생과는 괴상한

인연이 있어 이글의 말미를 채운다. 화가라문화인이었기에

정부에서 이관희라는 분을 방송국장으로 임명했는지 모르나

 어처구니없는 말을 해서 안서 김억선생과 유호선생이

주위의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서울중앙방송국을 떠났다고 한다.

 
"방송 원고를 쓰면 썼지 웨 빈 칸을 이렇게 많이 내느냐.
원고료를 떠받기 위한 속임수가 아니냐?" 이국장의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대접치고는 대단히 모욕적인 망언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드라마 원고는 등장인물을 쓴 스페이스가 원고지 윗칸 서너 개를
 비우고 있으니 이관희 국장의 눈에는 대단한 속임수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정말 넌센스가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연출되었던 것이다.
중국 글엔 띄는 법이 없으니 그럴 것이라는 양해 아닌 이해를
하려해도 얼른 수긍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임이 떠났으니 되돌아오길 바라나 김억선생이
 내후년이면 백세가 되시고 유호선생 또한 고의를 넘겼으니
부질없는 바람일지 모른다. 다만 '돼지'가 되돌아와
 시청자의 사랑을 받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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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님, 영원한 현역 방송인 드라마와 노래, 신라의 달밤 현인

http://blog.daum.net/jc21th/17781053

  

유호님의 해방될 무렵, 드라마방송 회고록

http://blog.daum.net/jc21th/17780707

 

민중과 더불어 산 가요 한평생 박시춘

http://blog.daum.net/jc21th/17780298

 

박시춘 손목인, KBS 최초 전속 경음악단 지휘자

http://blog.daum.net/jc21th/17780881



1991년 9월 9일 문시형 방우회장으로 부터
감사패를 받는 유호님의 모습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서울야곡 유호 현인-1.w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