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딸 강경화! UN사무총장 정책특보 취임을 축하합니다. 대한민국의 딸, 강경화! 강찬선 아나운서의 딸 강경화! KBS 한국방송 아나운서 출신 강경화! 그 강경화가 UN 신설직위인 사무총장 정책 특보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외무부 국장으로 재직하던 강경화가 코피아난 UN 사무총장의 부름을 받고 고등판무관실(OHCHR) 부판무관에 부임한 이래 반기문 사무총장 10년세월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해 힘을 기울였던 강경화는 새로 출범하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신임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로 UN의 핵심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10년전 반기문 UN사무총장 입성의 발판을 마련했던 강경화는 UNOCHA 사무차장보로 바쁘게 활동하던 중 안토니우 구테흐스 신임 유엔 사무총장 유엔입성에도 힘을 기울였고 그가 사무총장으로 당선되자 사무 인수팀장으로 그 역활 그 임무를 끝내면서 새로 마련된 정책특보가 된 것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신임 유엔 사무총장 당선자가 첫 유엔 고위직 인사에서 여성 외교관만 3명을 발탁하는 '성 평등 강화’ 행보로 주목 받고 있는 가운데 강경화 정책특보의 행보 또한 주목된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국장님! 강찬선 아나운서의 따님이신 강경화여사님이 유엔의 담당부서에서 연임이 되신건지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으셨는지, 오늘 저녁 뉴스에 나오는 걸 보면서 반가운 마음으로 듣게 되더군요. 반갑고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대한의 딸, 자랑스러운 여성으로, 한때는 부지런한 아나운서로 함께 하셨던 방송인 여러분의 자랑이신 분으로, UN에서 전세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답 글 고맙습니다. 글 올리겠습니다. 신설부서 정책특보가 되었으니 핵심자리를 맡은 거지요. 오늘 강경화 조회 수가 엄청 올랐어요. KBS분들을 비롯 해서 강경화에 관심있는 분들이 춘하추동 방송에 있는 강경화 글을 보십니다. 강경화 UN사무총장 정책특보 아버지 아나운서 강찬선 1955년 강찬선 아나운서 딸로 태어나 1964년 아버지 따라 미국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다.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 사무차장보로 재직하고 있던 강경화가 2017년 1월에 취임하는 제9대 UN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 인수를 담당할 인수팀장에 기용되어 화제에 오르더니 새로운 직책 정책특보가 되었다. 2006년 제21회 올해의 여성상을 받은 강경화는 반기문 사무총장보다도 더 먼저인 2006년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실(OHCHR) 부판무관에 올랐고, 반기문 사무총장 선출에도 도움을 주었다. 10 여년간 유엔 인권최고대표부사무소 대표로 활동하는 등 유엔에서 줄곧 활동 해왔다 위, 아래 50년의 시차(時差)가 있는 사진이다. 1964년 10살의 초등학생 강경화는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아버지 강찬선 아나운서를 따라 미국 워싱턴을 향해 김포공항을 떠났고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오늘 강경화는 미국 뉴욕에 있는 세계 외교의 중심 UN에 자리하고 때로는 제네바, 때로는 수단, 케냐 등 최 오지에서 최 격전지에서 그리고 또 때로는 고향땅 대한민국을 오가며 세계에서 가장 바쁜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지구의 곳곳을 누빈다. 아버지 강찬선은 1947년 아나운서가 되어 1980년대까지 방송에서 영화관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려 주셨다.
강찬선 아나운서! 고향이 평양인 강찬선은 남북이 갈라져 북한의 평양방송에서 아나운서생활을 시작했다. 연극도 하고 노래가사를 써서 작곡도 하고 합창단 지휘도 하는등 각 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평양방송에서 방송을 시작했지만 평양방송국 분위기가 살벌 해 지면서 국립 예술극장으로 옮겨 활동하던중 6.25롤 맞았고 1.4후퇴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던중 아나운서 공개모집이 있어 그 시험에 합격 아나운서가 되었다. 1951년에 아나운서가 되어 한시대를 풍미한 임택근, 황우겸등 아나운서와 동기다. 그 강찬선 아나운서가 장기범, 강익수 아나운서에 이어 세번째로 1964년 미국의 소리방송 (VOA) 아나운서로 공식 파견되었다.
이때 강경화가 아버지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며 영어를 익히는 등 미국생활에 익숙해졌다. 물론 아버지 닮아 그 목소리도 아름다웠고 예능적인 재능도 있었다. 국내에 돌아와 이화 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정치 외교학과를 졸업 하면서 KBS국제방송국 아나운서가 되었다. 국제방송국 아나운서는 다른 부서와는 달리 아나운서가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기획을 하고 글을 써서 직접 녹음실에 가, 자기 목소리로 녹음 해서 MD나 방송송출 기술자에게 넘기기까지 일체의 일을 도맡아서 하기에 강경화의 이력에는 아나운서 라고도 적혀있고 PD라고도 적혀있다.
2년정도 아나운서 생활을 하던 강경화가 결혼을 하고 남편(이일병)이 유학길에 오르면서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1980년 8월 미국 매사추세츠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가 되고 1984년 2월 역시 같은 대학에서 박사가 되었다. 커뮤니케이션학 박사학위를 받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국내에 돌아와 대학강단에도 서고 방송과도 인연을 맺는등 활동을 하던중 국회의장실에 들어가 김재순, 박준규, 이만섭 국회의장 비서관을 지내게 되고 1998년에는 국제전문가 특채로 외교부에 들어왔다.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전화 통화를 동시통역한 것이 계기가 돼 김 대통령의 영어 통역사로 발탁되어 주로 대통령과 외교부 장관의 영어 연설문을 담당하는등 중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의 역량이 충분이 발휘되어 영국 에리자베즈 여왕과의 정상회담을 동시통역하는등 중요한 자리에는 그가 있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내 말이 강경화 특보를 통해 통역되면 더 멋있게 만들어진다”고 그의 영어 실력을 극찬한 적도 있었다. 고 한다. 2013년 11월 이희호여사와 만난 자리에서도 이희호 여사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강경화의 업적을 칭찬하기도 했다.
외교부에서 국장이 된 강경화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 산하 여성지위위원회 의장(임기 2년)으로 선출되었다. 사회 취약계층 문제와 인권, 여성 지위 신장 문제에 힘을 기울이면서 유창한 영어 실력에 미모를 지닌 강경화는 당시 코피아난 사무총장의 신임을 받았다. 강경화는 대한민국의 관료로서 UN기구 참여에서 아예 UN의 한 구성원이 되어 활동할 뜻을 갖고 UN 유엔 인권부대표 공모에 응모 해서 2007년 1월 유엔 인권부대표로 취임한다.
공교롭게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취임과 시가기 맞아 떨어져 반기문총장이 함께 간것처럼 생각하신 분도 계시지만 사실은 코피아난(Kofi A. Annan, Kofi Annan) 사무총장 시절 강경화가 공채로 유엔에 먼저 입성한 것이고 또 반기문총장의 UN입성을 도와 준 주인공이기도 하다. 6년간 유엔 인권부대표로 재직한 강경화는 2013년 3월 유엔 인도지원조정실(OCHA) 사무차장보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인권부대표시절 주 사무실은 제네바에 있었지만 지금은 뉴욕 본부에 주 사무실이 있다.
강찬선 아나운서에 관한 사항은 이미 써 올린 글을 연결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강경화의 약력을 함께 올린다.
강경화 약력
강경화 (康京和), KANG KYUNG HWA 소속 : (현)유엔 인도지원조정실(OCHA) 사무차장보 출생 : 1955년 4월 7일 (양력) 서울 출생
학 력
~ 1973 이화여고 졸업 ~ 1977.2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1980.8 미국 매사추세츠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 1984.2 미국 매사추세츠대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경 력
1977 ~ KBS 국제국 프로듀서, 아나운서, 시사토론프로그램 진행자 1983 ~ 미국 클리블랜드대 커뮤니케이션학과 조교수 1984 ~ 연세대, 한국외국어대 강사
1990 ~ 1998 국회의장 국제담당 비서관(3급) 1994 ~ 1998 세종대 인문대 영어영문학과 조교수 1995 ~ 베이징세계여성대회 비정부단체 대변인 ~ 여성단체협의회 국제관계 위원 ~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이사
1997 ~ 김대중대통령과 빌 클린턴대통령 전화통화 통역 1998 ~ 김대중대통령 미국방문 정상회담 통역 1998 ~ 1999 외교안보연구원 미주연구관(부이사관급) 1999 ~ 2000 외교통상부 장관보좌관실 보좌관 2000.8 ~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 국제기구심의관 2001 ~ 2005.6 駐 유엔대표부 공사참사관 2003.3 ~ 유엔 여성지위위원회 의장 2005.7 ~ 외교통상부 국제기구정책관 국장급
2007.1 ~ 유엔 인권부대표 2013.3 ~ 현 유엔 인도지원조정실(OCHA) 사무차장보 2016~안토니우 구테흐스 신임 유엔 사무총장 사무 인수 팀장
가 족
아버지 고 강찬선(康贊宣)
남편 이일병(李一昺) 1953.1.24 연세대 공과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장녀 이현지 차녀 이예지 장남 이준녕
상 훈
2003 올해의 여동문상/2003.05/연세대여자동문회 제21회 올해의 여성상/2006.11/한국여성단체협의회 임국희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님 글 강찬선선배님! 아나운서 선배님이고 한국 아나운서클럽을 창설, 제1대 회장님을 지내셨지요. 그 뒤를 이어 제가 8대 회장으로 있습니다. 강찬선 선배님이야마로 어마어마한 스토리. 폭탄처럼터지는 유모어 후배에게 주는 자상한 도움 우리에겐 대단한 큰 아버지입 니다. 선배님의 딸 강경화님, 강찬선 선배님의 딸이자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딸이고 세계가 우럴어 보는 세계인의 딸이지요. 참으로 흐뭇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강 찬선선배님 남기신 이야기는 너무나 많지만 돌아가신분 같이 느끼지 않네요 장례식때 따님 경화씨가 한사람 한사람 나누어 주신 회고록 다시 읽고 싶습니다. 강선배님과 경화씨에 관한 생생한 추억을 그리며 강경화님 축하하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테리송 (전영자) 선생님 글
오랬만에 강찬선 아나운서 소식에 또 한번 옛날 방송 시절이 생각 나는군요. 어린 저희들이 노래 하고 연극도 하고 대담 프로까지 어린이 시간을 독차지 해서 아너운서들에 귀염을 많이 받았죠. 늘 이북 가족 얘기도 하시고 제가 이화여중 다닐때도 자주 부인과 같이 오셔서 음악회도 뵜지요. 잊울수 없는 어른 이셨어요 이성화(최초의 민영방송 아나운서)선생님 이장춘 춘하추동방송국장님의 노고로 이어지고 있는 방송 역사 총괄 기록을 보고 있으면 이나라 역사가 곳곳에 숨쉬고있습니다. 인연을 가지셨던 분들에게는 행복한 추억 선물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쁜 기사 를 제공해주셨습니다. 조부성 선생님(최초의 공채 프로듀서 1957년) 이 아침 참으로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강찬선 선배님이 저와 한동내 개명 네거리에 있는 개명아파트에서 같이 살으셨기에 어린 아이때 강경화를 보면서 영특하다. 생각하며 살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세계인이 우럴어보는 훌륭한 일군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자랑스러운 마음입니다. 강선배님은 가셨어도 늘 마음속에 있고 또 그 따님의 활동을 보며 선배님의 생생한 모습이 떠 오릅니다. 고맙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면 지금의 서대문 사거리를 옛날에는 개명사거리라 했고 그 이름따라 이름 지은 개명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종로에 있었던 화신백화점이 처음에는 개명 네거리 국제대학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용억 선생님 (방우회 원로방송인) 훌륭 하십니다. 몰랐습니다. 같은 방송인으로서 큰 자긍심을 심어 주셨습니다
유경환 ( 유카리나) 여사님 강찬선 씨의 자랑스러운 따님이시고, 또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여성이십니다. 이런 기사를 읽을 적마다, 힘이 나고 우리 국민이 세계 여러 민족 중에도 우수한 민족임을 느끼곤 합니다. 아직은 본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 더 많은일을 하시리라 기대됩니다. 값진 역사, 값진 그림의 퍼즐을 맟추듯이 편집을 해서 기록이 되어 남을 게시물을 올려주시는 춘하추동방송은 특히나 원로방송인들께 고향집 같은 느낌으로 들르게 되는 곳일 것 같아요. 오늘은 특별히 U.N.에서 세계평화를 위해 큰 일을 하시는 강경화님에 관한 글을 읽으며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힘이 납니다. 김규홍 한국아나운서 클럽 부회장님 글 이렇게 귀한
정흥숙 박사님 (MBC 1962년 아나운서) 대단한 여성을 존경합니다. 한국의 보배에요. 서금랑 아나운서 (매니큐어화가) 글 생전에 존경해 마지 않았던 강찬선 큰선배님은 내 아나운서 시험 때 시험관으로, 교육 때는 선생님으로 모셨던 분이다. 그 옛날 서소문 개명 아파트로 청첩장을 들고 찾아 뵈었을 때 내가 아나운서를 그만 둔것이 못내 안타깝다고 하셨다. 결혼 후에도 이정부 씨를 만날 적마다 "서금랑 잘 있어?", "잘 있어?" 하고물으셨단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사는 일이 힘들어 끝내 찾아뵙지 못하고 말았다. 지난 번 황우겸 큰 선배님의 미수연 때도 고인 생각을 했다. 경화씨의 성공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무척 기뻤다.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춘하추동방송을 통해 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경화씨의 멋진 성취와 그간의 눈부신 활약상 을 접하면서 큰 기쁨과 온갖 감회에 젖는다. 이런 일을 누가 하겠는가? 존경하는 대 선배님, '빅 블로거' 이장춘 춘하추동방송국장님게 깊이 감사드린다. 이정부 아나운서 글 이젠 은빛 머리카락과 맑은 안경을 통해 반짝이는 눈빛이 더욱 잘 어울리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UN의 여성지도자 강경화를 한국 최고의 방송 블로그 춘하추동방송을 통해 본다, 약 40~50년 전 남산 KBS에서 아버지 강찬선 선배님의 뒤를 이어 영어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때의 두분 부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가을 날 아나운서 실장실에 들렀을때 강찬선실장님은 6척 거구에 프랑스배우 '장갸방'을 연상케하는 중후한 모습으로 권연 한개비를 손가락에 낀 채 창가에 우뚝 서서 남산 정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북에 두고온 가족들을 생각하시는 듯한 그분의 모습에서 잠시 숙연해졌던 기억이 있다. 따님 강경화 아나운서는 자주 만나진 못했으나 볼 적마다 넓지도 않은 방송국내에서 늘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아내 서금랑도 시간이 아까워 늘 뛰어 다녔다고 회고한다. 세월은 빠르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이장춘 선배님의 노고가 담아낸 모처럼의 값진 내용에 감사드리며... 南草 이정부
심상천 선생님 글
강찬선 아나운서님을 소년시절에 너무 존경하였고 그분의 힘찬 음성에 감동 되어 아나운서가 되고픈 욕망에 불탔었습니다. 그분은 어느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시군요. 너무 안타까움 뿐입니다. 존경하던 분의 따님이신 강경화씨는 아버지보다 더 훌륭하신 분이네요. 우리 대한민국의 따님으로 국가의 명예와 세계 분쟁지역을 다니시며 약한 자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따님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지금도 5.16혁명일 새벽에 강찬선 아나운서님께서 낭독하신 혁명공약은 잊혀 지지않는 저의 희망찬 추억의 한 장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복예 선생님 글 (케이양 카페운영) 외교관 강경화 아나운서와 강찬선 아버지 ^^
문인수 선생님 (전 KBS방송국장) 글 차기 구테예스 유엔사무총장 인수팀장 으로 한국인 강경화씨가 선임됐다는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는데 방송선배인 강찬선 선배님의 따님인 것을 춘하추동방송을 통해 알게 돼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강경화님을 모르지만 한국인의 한사람으로서 축하 드리고 계속 인권운동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김무생 선생님 글 (KimMooSaeng 아나운서)
**UN 인도주의 업무조정국 사무차장보 강경화님께 뜨거운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이렇게 훌륭한 따님을 두신 고 강찬선 아나운서 대선배님과의 일화를 먼저 간단하게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분을 생각하면 대북방송, 정오뉴스, 좌담, 스포츠중계 등 수 없이 많지요. 쩌렁쩌렁 하면서도 카랑카랑하신 그 목소리가 문뜩 저만치서 막 들려오는 것 같은데요, 그 중에서 생각나는대로 요약해 보자면 70년대 축구 중계를 하셨을 때의 그 목소리가 아직도 제 귓전에 쩌렁쩌렁하게 들립니다. 대선배님은 "우 중간 돌파" "좌 중간 돌파" "중앙 돌파했습니다!" 이런 표현들을 특유의 깊이 있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방송하셨습니다. 스포츠캐스터들이 상황묘사를 할 때 자칫 공이 가는 방향만을 상황묘사하는 좁은 시야만을 포착할 수도 있는데 이분은 운동장을 아주 폭넓게 보시며 중계방송 하신 분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격팀이 수비측 진영 우중간 돌파 상황을 묘사할 때 수비측 진영 좌중간은 물론이고 공격팀 좌우중간의 상황도 묘사가 된다는 것이죠! 이 점도 제가 값지게 배운 점입니다. 이 얘기를 적는 건 제가 느꼈던 이분이 주는 인품은 방송멘트처럼 참 오대양같이 폭넓고 포근하셨는데"역시 그 따님도 오대양 육대주의 일을 하는 UN에서 일 하시게 성장시키셨구나!"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제가 시골 고향에서 상경해 74년 부터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74년 2월에 저의 아버지와 함께 남산 KBS 바로 앞을 지날 때 강찬선 대선배님께서 KBS 앞 다방으로 향하는 발길에 저의 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이때 저의 아버지께서는 술을 한 잔 하셔서 좀 얼큰하게 취하신 상황이었는데 제 아버지께서 대뜸 강찬선 대선배님 앞에 꾸벅 인사를 하시더니 *제 부친: 이 얘가 제 장남 김무생입니다. 앞으로 아나운서를 하겠답니다. 잘 가르쳐 주십시오. *강찬선 대선배님: (난데 없는 부탁에 멈칫 서시더니 제 부친과 저를 한 번씩 쳐다보시며 그 포근한 미소를 지으시며)아, 예! 알았습니다 . (하시고 다방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지금까지 간직해 오고 있는 이분과 저와의 추억이랍니다. 그런데요! 그 일이 있은 그해(74년) 다음 달 3월에 제가 고 최규락 아나운서님을 뵙기 위해 KBS 아나운서실을 찾아가최규락 아나운서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참고: 바로 옆에는 정기채 아나운서님이 계셨습니다) 이사 겸 아나운서실장이셨던 강찬선 대선배님이 아나운서실을 들어오시니까 최아나운서님과 정아나운서님이 다정하게 인사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퍽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때 제 기억에는 고 강찬선 대선배님은 멋지신 국제 신사였습니다.) 이어서 다른 한 가지는 1948년 8월 15일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방송>으로 시작된 대북방송이 만 24년만인 72년 11월 11일 0시를 기해서 중지됐습니다. 10일 오후 2시에 (당시) 중앙방송국의 고 강찬선 아나운서께서 마지막 고별방송을 하셨습니다. 72년에 방송된 그 방송 원고를 현재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챙긴 이유는 제가 그 방송을 연습 하기 위해서 였지요! 그 원고로 그 방송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그 원고를 들여다 보면 당시의 카랑카랑하고 쩌렁쩌렁하셨던 그 목소리가 그대로 제 귓전을 울리고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인품과 방송이 훌륭하셨고 멀리서 뵈어도 눈에 띄는 정말 멋진 신사이셨습니다. 그런 분의 따님이신 강경화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서 앞으로도 지구촌 모든 사람들의 삶에 크나 큰 윤활유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 강찬선 대선배님의 따님이시기에 더 자랑스럽습니다. 강경화님! 건강과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이장춘 이사님 고맙습니다. 더불어 이곳을 방문해 주시는 여러분 고맙습니다. 언제나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김무생 드림.
김경숙 1950년대 여성아나운서님 글 안녕하세요? 국장님 강경화님의 국제활동을 자세히 기록해 보내주신것 잘보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아침 신문에 강경화님이신임유엔사무총장의인수팀팀장에 임명됐다고해서 반가워서 강경화님도 축하 하고 국장님도 축하할겸 글을올립니다 이근욱 한국성우협회 이사장님 글 .
강경화님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감사님ㅡㅡ ㅡ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방송인으로서 지나간 역사나 현실을 이렇게 깊이있게 알게 해주셔서 참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셔서 저희에게 방송의 역사를 알고 또 미래를 생각하게 해주시길 부탁드림니다 이근욱 올림 박서림 선생님 (원로방송작가) 잘 보았습니다. 강창선 아나운서가 평양에 그대로 눌러 앉았더라면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그 진취적인 인생관에 경의를 표하면서 강경화씨의 축하와 함께 보다 많은 활동을 기대합니다. 양창석 선생님 축하합니다. 아나운서의 영광이요. KBS의 영광이며 대한민국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국장님 정말 수고 하십니다.
고 벽산 우제탁선생님이 남기셨던 글 1950-1960 년대 우리 방송현실,,,, 본 "춘하추동방송" 으로 인하여 그 엣날 이야기,,, 사진,,,감회가,,,당시 아나운서에 대한 일반인의 인기,,; 되었고, 강찬선은 영화,,대한뉴-스 에서도,,,1960년대 초,,당시 남산 7 부조에서 초조하게 한 아나운서는 강익수 그리고 강찬선은 그 원고가 같은 내용인데도 정확한 발음에 빨리 읽은 아나운서,,,남산 9 부조,,대북방송에서 간혹 대면,, 옛날 정동,, 그리고 남산 시절,,,우리 방송현실은,,,,? 이제 그사람 그사람들 대부분이 고인되고,,오늘에 크게 변하고 향상된 우리의 생활현실은 옛날 그런 근거 토대로 인하여 이룩된것 이라고 생각해야,,,그레서 "과거역사를 무시하면 내일이 없다" 고 했을 것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딸 강경화 님에 관한 수많은 글을 보내 주셨습 니다. 여기 다 올리지는 못했을지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대신합니다. 강찬선 아나운서 글 보기
아나운서 한길로 살다가신 강찬선 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891
강찬선, 임택근, 황우겸 / 1951년 입사 동기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0813
강찬선 아나운서의 평양방송 재직시절 회고담 http://blog.daum.net/jc21th/17780931
아나운서 강찬선 회고록, 부산방송 피난시절 http://blog.daum.net/jc21th/17780861
강찬선 아나운서 방송회고록 / 1964년, 미국의 소리 방송 (VOA) 부터 http://blog.daum.net/jc21th/17780932
아나운서 강찬선의 그 일대기(회고록 종합편)
화 보
강찬선 아나운서가 그 시절 방송인 최고의 영광, 1963년 제6회 방송문화상을 받았습니다. 위는 방송문화상 수상자와 김성희 공보부장관이 함께 한 사진으로 1 손석우, 2 박능상, 3 강찬선 4 임성희장관, 5 이운용, 6 고은정, 주태익님이고 아래는 그때의 아나운서들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1.배덕환, 2.김주환, 4.임국희. 7.이병열, 8.최승일, 9.김인권, 10.전영우, 11.임택근, 12.강찬선, 13.이규영, 14.이팔웅, 15.길종휘, 17. 인주희 아나운서입니다.
부산 피난시절의 강찬선 아나운서 강찬선, 이현숙, 윤영중, 문복순 아나운서
1.송석두, 2.이현숙, 3.문복순 4.강찬선, 5.민병연, 6.송영필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장기범아나운서가 보도부문의 제1회 방송문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날 시상식이 끝난후 장기범 아나운서와 1.최계환, 2.강익수, 3.김인숙, 5.윤길규 방송과장, 7.문복순, 8.민병연, 9.강찬선, 11.이규영, 12.황우겸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촬영한 사진으로 문복순 아나운서가 입사한후 최초로 촬영한 사진이기도 합니다. 앞줄 오른쪽부터 장기범, 민병연, 강영숙, 황우겸, 김인숙, 최세훈, 송석두, 윤영중, 이현숙, 장금자, 송영필, 뒷줄 왼쪽부터 박종세, 이광재, 임택근, 강찬선, 임동순, 문복순, 강익수, 최계환. 하얀색이 1957년 신입사원으로 5명 모두 참여했습니다.
1964년 강찬선 아나운서가 VOA파견 아나운서로 떠나던때 김포공항에 환송나온 아나운서왼쪽부터 한사람건너 김주환, 한사람건너 김정자, 전영우, 임택근, 강찬선, 송한규 그리고 강경화 양을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1958년 연말특집 아나운서 언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송영필, 강익수, 장기범, 임택근, 박종세, 최세훈, 이규영, 강영숙, 전영우, 황우겸, 유석춘, 강찬선, 김동만, 최계환, 최두헌, 문복순, 장금자, 유창경, 김준철, 최만린, 이현숙, 윤영중, 조영준, 이본, 이광재, 한경희 아나운서이고 아래는 1959년 강찬선 아나운서 지휘를 합창을 하는 아나운서들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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