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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역사와 영화, 비운의 조선왕조 마지막 황녀

이장춘 2016. 8. 16. 18:06

 


 

슬픈 역사 속, 비운의 황녀, 덕혜옫주!

 나라 빼앗긴  황제의 딸로 태어나, 그나마도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세상 떠나면서 불행은

더 해갔다. 조선 땅에서 살고 싶어도 일본 땅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돌아오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덕혜옹주는

 오빠 영친왕에 이어   또다시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어  대마도로

  향했다.     조국은 해방 되었어도 조선 땅을 밟을 수 없었던 그녀는

마침내 정신 질환을 앓게 되고 또 이혼까지 하게 되면서 정신질환

수용소에서 머물러야 하는 비운의 연속이었다. 1962년 1월 26일

그리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지만 몸과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정신질환자로 말년을 보낸 조선조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2016년

8월 초부터 상영되고 있다.



덕혜옹주! 비운의 조선왕조 마지막 황녀



그리도 불볕더위가 내려 쪼이던

 2016년 8월 14일 아이들이 표를 사 놓았다기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영화 속의

주인공 덕혜옹주역의    손혜진을 비롯해서 출연배우들의

 방문인사가 있었다.     ‘오늘로 300만의 관람객이 다녀갔다는

말과 함께 영화제작을 위해 최선을 다 했다는 인사’ 에 이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지금 들려오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  덕혜옹주가 조선을

떠나던 무렵 일본에서 음반취입을 끝내고 돌아오던 중 현해탄에

 몸을 던진 세기의 情死로 화재를 모았던 윤심덕의 노래  춘하

추동방송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 올려놓았던 

노래가 바로 영화 덕혜옹주의 주제가 처럼 울려

퍼지면서 영화는 계속되었다.  

     




덕혜옹주와 윤심덕 사의찬미!

영화의 주요 부문에서 두 차례에 걸쳐

울려 퍼지고 그 음반은 덕혜옹주의 가장 소중한

소지품으로 간직되었다. 덕혜옹주와 윤심덕, 사의찬미를

기묘 하게 연계시켜 조화를 이루고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주로

젊은이들로 영화관을 가득 메운 가운데. 눈물 흘리며 슬퍼하는 그

관객들의 모습을 보며  슬픈 역사를 살아온  우리들의  지닌 날을

실감했다.   필자 역시 감동어린 두 시간의 영화를 감상 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짐은 어찌할 수 없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음을 예고 해 주었듯이 극적인

 요소가 가미 되었어도   역사의 줄거리를

살리려는노력의 흔적이 보였다.






조선조 제 26대 임금! 1863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된 이래

풍파를 겪으며 마침내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임금 자리를 물러나 있던 중 환갑이 되던 해

마지막으로 늦둥이 딸을 맞았다. 1912년 5월 25일, 고종의

 일상을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贊侍室: 오늘날의 비서실) 일기에는

 “오후 7시 55분에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탄생하였다. 8시 20분에 태왕

전하가 ‘복녕당’ 에 납시었다.”고 쓰여 있다. 태왕이란 물러난 왕,

상왕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덕혜의 출산 이후 고종은 늘 함께

 했으며 거처인 함녕전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필자가

오래전에 경복궁 안에 있는 고궁박물관에 들려

얻은 사진을 올리면서 얘기를 한다.





고종황제



덕혜옹주 어머니 양귀인



돌때의 덕혜옹주



고종은 1916년 4월에 덕수궁의

준명당(浚明堂)에 다섯 살 난 덕혜를 위해

유치원을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고종황제에게 한 줄기 삶의

 낙이 되면서 고명 딸    덕혜옹주는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함녕전에 함께 살면서 한때 고종황제가 기거했던 덕수궁

준명당 유치원을 열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덕혜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아닌 아버지

고종과 함께 보냈다.




준명당



유치원시절의 덕혜옹주(중앙)




고종 승하 전까지 덕혜옹주의 거처였던

 덕수궁 함녕전, 아래는  창덕궁에 옮겨 살때의

덕혜옹주 왼쪽부터 덕혜옹주, 영친왕비, 순종비

순정황후 윤씨, 순 종,  영친왕, 시종에게

안긴 이진, (1922년 대조전)





소학교 때의 덕혜옹




8살의 어린나이에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세상을 뜨면서 덕혜는 거처를

함녕전에서 어머니가 있는 광화당으로 옮겼다가

 퇴위한 순종이 머무른 창덕궁으로 옮겨지면서 창덕궁

관물헌에 거처를 잡았다. 1921년 고종의 삼년상이 끝난 후

10살이 된 덕혜는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라는 일본인 학교에

 입학했다.  이때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리던 것으로부터 ‘덕혜’

이름을 공식적으로 부여받게 되었다. 소학교를 다닐 때 까지는

그런대로 조선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부터는시정이

달라져 일본으로 가야 된다는 것이었다. 가기 싫다고 해서

그리 되는 것이 아니었다.        덕혜의 동경 유학이

결정되어  1925년 3월 24일 14세의 어린

덕혜는 일본을 향해 떠났다.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



3월 30일 동경에 도착한 옹주는

 오빠인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가 함

 하면서 여자학습원에 다녔다. 아버지가 일본의

 독살에 의해서 서거한 것이라고 믿고 있던 옹주는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 늘 병에 물을 넣어 을 들고 다녔다. 영화에서

 고종의 독살장면이 나오고 덕혜가 일본으로 떠날 때 어머니 양귀인

 늘 물을 넣고 다니면서 먹으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종의

 승하로부터 3.1 기미독립만세가 유발되었고 1926년 순종의 승하로

6.10만세 사건이 유발 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1926년 오빠

순종의 죽음과 1929년 생모 양귀인의 죽음의 소식을 일본

에서 들었을때 아픈 마음을 금 할 길 없었다. 



윤심덕 사의찬미




그런 중에 결혼이 추진되어 1931년

 5월 8일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식을 올렸다. 영친왕에 이어 또 하나의 일본인과 

 정략결혼을 두고 조선인들은 분노했다.  그때의 민족지

조선일보는 신랑의 얼굴을 지운 결혼사진을 올려 분노의

 민심을 대변하기도 했다. 뒷날 1936년 손기정선수의

일장기 사건과도 상통하는 민심의 대변이었다.




덕혜옹주 결혼사진 오른쪽은 신랑 사진을 지운

조선일보 덕혜옹주 결혼사진



남편 다케유키 武志는 추남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사실과는

달랐고 훤칠한 미남이었으며, 동경대 영문학과를 나온

당대의 엘리트 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결혼 1년 후에는 딸

정혜(正惠)가 태어났다. 외면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듯 했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결혼 후부터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중 일본의 패망,

 조국의 해방을 맞아기쁜마음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영화 속의 귀국

보따리에는 여전히 사의찬미 음반이 들어 있었고 그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옹주는 조국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덕혜옹주 영화 포스터



   왕권의 부활을 위해 있을 수도 있는

국내의 혼란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해방된

조선땅에서 해외에 가 있는 왕족이 국내에 다시

돌아 올 수 없도록 취한 조치 때문이었다. 춘하추동

방송과 함께 하시는 노익중 선생님이  2014년 대마도

여행 중 덕헤옹주 비운의 현장을 접하고 영상을 담아

 오셔서 올렸다. 아래 관련 글을 연결한다.  








집에서 간병을 하던 남편 다케유키는

패망 후 귀족의 지위를 잃고 경제적 감당을

할 수 없어 1946년 정신병원으로 옮겨   그로부터

정신병원  신세를 졌다. 얼마 후 이혼으로 이어지고 하나

밖에 없던 딸 정혜마저 실종되어 덕혜의 마음은 헤어날 길이

 없었다. 누구도 그를 찾는 이 없이 정신병원 생활을 한 덕혜에게

1960년대부터 찾는 이가 있었고 이 무렵 서울신문의 김을한 기자가 

덕혜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귀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 장면이 영화에서 부각되어 김장한 역의 박해일 덕헤옹주 역의

손혜진이 열연한다. 마침내 덕혜옹주의 귀국이 성사되어

1962년 1월 26일 국내언론에서 대서특필하는

가운데 귀국으로 이어졌다. 





 1962년 덕혜옹주가 돌아오던 그때의

신문 동아일보 1월 28일자를 인용했다. 아래는

 같은 지면 내용인데 작은 글씨로 잘 안 보일

 수도 있어서 필자가 두 편으로 만들었다.




1962년 1월 28일자 동아일보



14세의 꽃다운 나이에 조국을 떠나

 37년을 지나면서 찌들대로 짜든 정신질환자가

 되어 조국을 찾아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의 치료에도

 완치는 어려웠다. 옹주는 1967년 낙선재에 생활 터를 잡았다. 

 낙선재는 조선조 24대 현종 때 세워 주로 왕실의 여인들이 말년에

 살던 궁궐의 일부이다. 갑신정변 때 잠시 고종 집무실로 사용된 적이

있고 순종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 이곳에서 거주했다.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여기 살았다. 











1963년에 돌아온 영친왕

이은(李垠)이 1970년에 생을 마친

곳이고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

1901~1989)여사도 이곳에서 덕혜옹주와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떴다. 덕혜옹주1989년 4월 21일,

이방자여사 9일 뒤인 4월 30일, 쉬운 말로 하면

 올케 시누이 사이다. 어찌 보면 모두 정략결혼

으로 만나 마지막을 함께 하다가 같은 해

같은 달에 세상을 떴다.

/





덕혜옹주 회갑날 위는 이방자 여사와

함께 한 모습이고 아래는 유모, 상궁과 함께 한 사진





화      보






노익중 선생님



2014년 대마도를 다녀오면서 느꼈던

그 감회가 이 글을 보면서 다시 온 몸으로 다가

옵니다. 고종황제의 하나밖에  없던 고명딸 덕혜옹주의

 슬프고 가슴아픈 이야기의 중심지 그동안 말로만 들어오던

때와는 다른 묘한 심정입니다.  발검음을 영화관으로 돌려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80도 훨씬 지난 눈에서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눈물이  나옴은 무슨 연유일까요. 


2014년 대마도에 가 그 현장을 보며

아픈 마음을 감출 길 없었습니다.  덕혜옹주에

얽힌 슬픈 얘기도 얘기지만 그 얫날 세워놓았았 기념비를

돌보는 사람없어 방치되었다가 그나마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들리게 되자 손을 보아 놓은듯 했는데 그렇다고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사진촬영에도

여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 동포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어 촬영하고 그때의 슬픈 마음으로 슬픈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선택했었습니다.       이런 영화를

많이 만들어 역사의식을  높혀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맙습니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2016.08.17 07:18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녀였다는 것과,

왕손이지만, 황후의 태생이 아니여서 공주라

칭하지 않고 옹주라고 부른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세히 올려 주셔서 좀더 확실하게 공부가 되었습니다

악랄한 일본에 의해 송두리채로 빼앗겨 짓밟히고 헝크러진 그분의

일생을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아야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영화

라고 생각되는군요. 영화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알림의

 매체이니 연령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역사인식을 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바노미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주 멜로디가 그 곡조

이지요.그 처지에서 이 사의 찬미를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덕혜옹주의 심정을 알 듯합니다.



조길자 아나운서님


고맙습니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더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어요. 슬프기도하고...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윤심덕 사의찬미

   http://blog.daum.net/jc21th/17782866


노익중님 대마도 탐방 (덕혜옹주의 유적)
http://blog.daum.net/jc21th/17782318


덕수궁 역사 600년, 조선왕조 5대궁

http://blog.daum.net/jc21th/17781857


세계 문화유산 창덕궁 사적 122호(낙선재)

http://blog.daum.net/jc21th/1778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