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파랑도, 이어도 실체가 들어나던 그때 1984년 / 문인수 기자

이장춘 2016. 8. 26. 02:47

 

 

 

「KBS가 이어도의

실체를 벗겨드리겠습니다.」


1984년 5월 12일 저녁 9시 KBS종합뉴스

 최동호 앵커의 목소리로 울려 퍼진 머리기사

제목이다.    전설로 전해오던 이어도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2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이어도에는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 

 (離於島綜合海洋科學基地)」가


설치되고 등대가 세워져 이곳을

오고가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어도가 실체로 들어나던 그때 그 탐사의

 중심에 제주방송총국 편집부장 문인수 기자가

있었다.   2010년에 발간된 「제주방송총국

60년사」에 실린 문인수 기자의 글을

통해서 그때의 얘기를 알아본다. 



이어도 전설의 섬에서 실체가 들어나던 그때의 이야기 / 문인수 기자





이어도離於島가 전설로 전해오던 

 오랜 세월   그 섬은 공해상의 암초였기에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어도는 더 이상의 공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해양기지를

 갖춘 대한민국 영토다. 1984년 KBS 탐사로 이어도 실체가 드러난

 후 1987년 해운 항만청이  이곳에 등부표를 설치하고 세계에 공표했다.

해양수산부는 해양연구ㆍ기상관측ㆍ어업활동 등을 위한 해양과학기지  

설치를 목표로 1995년부터 해저 지형 파악과 조류 관측 등 현장조사를

 실시  2001년 공사가 착수되었으며 2003년 6월 완공되었다. 이어도의

해양과학 기지는 최첨단 관측 장비를 통해 해양ㆍ기상 관련 자료를

수집하며, 해경의 수색 및 구난  기지로도 활용되고 있다. 해마다

 세계  각 나라 많은 학자들이     대한민국  해양기지 자료를

 인용한 논문을 발표하고 그 논문 자료 출처에는 이어도

 코리아-Ieodo Korea-가 따라 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먼 거리에 있는

중국은 아직도 다른 이유를 들어 이어도를 자기나라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한 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다. 만약 그때

 그 이어도를 전설의 섬, 암초로만 생각하고 지냈더라면 오늘날 어떤

 결과를 가져 왔을 것인가? 오늘날 여기저기서 영유권 분쟁을 야기하고

있는 현장을 보며 참으로 아찔한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이어도의 실체를

밝혀 오늘날 대한민국의 관리 하에 두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고 큰 의미가 있다. 그때의 탐사에 나선 KBS와 제주대학교

 탐사반에 대한 경의를 표하면서 문인수 기자 글 전문을

올린다.    스마트 폰으로도 편리하게 보실 수

있도록 아래한글판으로도 함께 올린다.






 이 글을 쓴 문인수 기자는

 탐사직후 이어도 탐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고 2014년「거기 이어도」라는 표제로

수필집을 낸 적이 있습니다. 여기 문인수 기자의

간단한 약력을 올리고 자세한 사항은 관련

 글을 끝 부분에 연결합니다.








이어도 (파랑도 波浪島) 탐사 특종기


문인수 기자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동민, 문인수 기자 「거기 이어도가」(국토의 최남단 이어도를 찾은 주인공) 출판기념회

 http://blog.daum.net/jc21th/17782286

 

단파방송 독립운동, 단파방송 밀정사건, 문인수, 이휘웅, 홍종혁

   http://blog.daum.net/jc21th/17782947






파랑도(波浪島)탐사 특종기


문인수(KBS 전강릉방송국장)


1. 들어가는 말


특종취재기를 써달라는탁을 받았다. KBS제주총국 60년사 편찬위원장(김영창 전KBS 보도국 부장)의 전화부탁이었다. 내용은 파랑도 탐사취재에 관한 것. 그 제의를 받고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그 원고를 쓸 자격이 있나하는 점과 파랑도 탐사가 과연 특종이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다행히도 일을 성공적으로 마쳐 상을 받긴 했지만, 엄연한 의미의 특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한 확인탐사라는 점이 특종이라 부르기에 부끄러움이 없지 않았다.

더욱 꺼렸던 것은 26년이나 지난 일이라서 당시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게 한계가 있었다. 그런 망설임 속에 원고청탁서가 날아왔다. 누가 정리하든 한번은 정리해야할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책장구석의 자료들을 들춰보았다.

다행스럽게도 20년 전 필자가 발표했던 파랑도에 관한 논문 한 편과 몇 가지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미흡하나마 이 글은 그 논문과 자료를 토대로 정리된 것이다. 혹여나 내용 중에 누락된 부분이나 오류가 있다면 널리 질책해 주기 바란다. 다음에 수정할 기회가 오면 꼭 수정하도록 하겠다.

사실 파랑도 탐사시도는 과거 1951년과 1974년, 두 차례나 있었다. 1951년에는 이승만 정권이 일본과의 대륙붕협상의 필요성에 따라 파랑도 탐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고, 1975년에는 당시 교통부 수로국의 주관으로 탐사를 시도했지만 거센 풍랑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파랑도는 요행히 KBS취재팀에게 그 베일을 벗고 탐사성공의 행운을 안겨줬을 따름이다. 당시 취재를 하면서 특종이란 것이 기자가 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니란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특종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란 생각을 해봤다. 아무리 작은 사건일지라도 관심을 갖고 파고들다 보면 특종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를 보면 ‘파랑도 탐사’ 뿐만 아니라 ‘징용낙오병 오노도시오 이야기’도 그렇다.

데스크를 맡았을 때 후배들이 특종기사를 취재하는 경우도 시작은 아주 작은 일에서 비롯되지만 결국 특종뉴스로 발전하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2. 파랑도 탐사의 배경


제주민요에 ‘이어도’라는 민요가 있다. 이 민요의 가사 속엔 ‘강남을 가난 해남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엥 해라.’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강남은 중국을 말하는 것이고, 그 중국을 가는 바닷길 중간에 ‘離於島’가 있다는 것. ‘離於島’를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현실의 삶을 떠나 머무는 섬’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까. 현실의 삶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상상(想像)속의 이상향일 수도 있다.

제주해녀들은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그녀들의 남정네들이 ‘죽음’보다는 ‘離於島’라는 이상(理想)의 섬으로 갔을 것이라는 가상을 민요 속에서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설속의 이상향(理想鄕)으로만 여겨졌던 이어도(離於島)가 현실의 땅(섬)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당시 우리 취재팀은 이점을 매우 중시했다. ‘離於島’는 제주와 중국의 고대무역 항로의 중간에 있는 실존의 섬이란 가상아래 취재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離於島’의 전설을 전혀 허구로만 볼 수 없다는 것, 제주해녀들의 의식 속에 잠재한 離於島=波浪島일 것이라는 가설을 설정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배경은 해도 상에 나타난 Socotra rock과의 상관관계, Socotra rock은 영국의 상선 Socotra호가 이 해역을 지나다 암초에 좌초되면서 명명한 이름이다. 이 암초와 파랑도와의 관계 또한 관심꺼리였다.

탐사에 성공하면 주변해역의 해양환경, 어족자원, 기상조건을 규명함으로써 훗날 해양진출의 교두보라는 국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사실 당시는 세계 각국이 석유나 가스 등 해저부존자원 확보를 위해 200해리 경제수역 관할권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국제 해양법 협약의 해양 관할권은 자국영토로부터 가장 가까운 인접국가의 권한을 우선 인정하도록 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해리 범위에서 분쟁의 소지가 있는 경우는 선점의 원칙이 적용되기도 했다.

파랑도는 북위 32도07분08초 동경 125도10분06초, 제주도 남쪽 공해상에 위치한 수중 암초다. 이 암초는 제주도 마라도로부터 남서쪽으로 82해리, 중국 양쯔(楊子)강 하구의 서산다오(佘山島)로부터 북동쪽으로 159해리, 일본 남녀군도의 도리시마(鳥島)로부터 서쪽으로 149해리에 위치해 있다. 한⁃중⁃일 3국의 연안 해안선으로부터 200해리 안에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탐사를 통해 시설물 설치(선점의 원칙) 등의 선수를 치지 않고 방치할 경우, 관할권 다툼의 소지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중국은 자국영토의 퇴적물이 미치는 곳까지를 대륙붕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대륙붕에는 자국의 관할권이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중국이 퇴적물 설을 들고 나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따라서 양쯔강 퇴적물이 파랑도까지 미친다는 점을 들어 우리나라의 파랑도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인터넷 여론조사를 통한 중국인들의 의식도 그렇고, 실제로 중국의 지방정부가 파랑도의 관할권이 자국에 있다고 떼를 쓴 경우도 없지 않았다.

여하 간에 당시 파랑도를 탐사하게 된 배경은 이러한 현실적 국익의 추구와 전설속의 ‘離於島’와 파랑도와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탐사반 구성


탐사반 규모는 대규모였다. 지형지질조사, 생물조사, 해양물리 등 전문적 조사를 위해 제주대학교 해양과학대학 노홍길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 12명이 참여했다.

취재는 호천웅 본사 지방부차장을 비롯해 문인수 제주총국 편집부장, 서정용 제주총국 기자, 김재철⁃이희완 지방부 기자, 장익환⁃최기홍 본사 촬영기자, 김수남⁃전은수 수중 카메라맨, 그리고 스쿠버 다이버 등 21명이 투입됐다.

그리고 부산 수산진흥원 탐사선인 부산 851호와 함께 선장 김기호씨 등 선원 12명도 기꺼이 참여했다. 이밖에 제주도와 북제주군의 어업지도선과 선원들도 탐사반에 합류했다. 따라서 탐사반은 50명으로 구성됐다.

탐사는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984년 3월 16일부터 19일까지 3일간의 1차 탐사는 위치확인에 초점을 두었다. 그해 5월에 실시된 2차 탐사는 8일부터 12일까지 5일 동안 실시됐다. 이때는 날씨가 무척 좋아 파랑도의 규모, 생성원인, 생물자원, 해류 및 조류 등 해양조건 전반에 걸쳐 탐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KBS탐사반은 3월16일 오전 8시 제주항에서 탐사의 닻을 올렸다. 그날 낮 12시쯤 화순항에서 위성항법장치를 통해 파랑도의 위치를 대략 추적한 다음 현지로 떠났다. 현장이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고 파도가 크게 일어 탐사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 우려 속에 탐사반은 하룻밤이 꼬박 걸리는 지루한 항해 끝에 다음 날 아침 해 뜰 무렵 현지에 도착했다.

망망대해의 한 군데에서 마치 소용돌이치듯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것을 발견했다. “아! 저게 파랑도가 아닌가?” 우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런 감탄을 쏟아냈다. 아침햇살에 부서지는 하얀 포말은 쪽빛 바다와 극명하게 대비됐다. 뭐라 표현해야 하나? 황홀, 그래 황홀 그 자체였다.

제주의 해녀노래 속에 ‘놀덩이’란 말이 많이 나온다. ‘놀덩이‘는 멍석 말듯이 거대하게 말려오는 파도덩이를 말한다. 그 ‘놀덩이’를 넘어서야 전복과 미역이 많은 ‘離於島’를 만날 수 있다고 노래한다. 나는 그곳에서 하얗게 소용돌이치며 부서지는 ‘놀덩이’를 보고 여기가 전설속의 ‘離於島’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노랫말처럼 ‘놀덩이’를 넘어서야 많은 미역과 전복을 딸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제주해녀들에겐 ‘놀덩이’가 있는 깊은 바다 속이 ‘離於島’라는 낙토로 잠재하지 않았을까? 부족한 식량을 얻기 위해 늘 물질을 했던 그녀들이었다는 점이 그런 당위성을 합리화한다. ‘놀덩이’속의 보물, 그것은 곧 ‘離於島’라는 현실적인 꿈을 꾸게 한 단초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탐사결과지만 우연하게도 파랑도가 해산물이 풍부하다는 것은 제주의 해녀노래의 가사내용과 일치함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4. 파랑도탐사와 방송 경위


1차 탐사는 일정이 짧은데다 궂은 날씨에 파도가 높아 탐사계획을 모두 수행할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국의 양쯔(楊子)강에서 흘러나온 황토로 인해 물이 혼탁해 수중작업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위성항법장치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고 부표를 고정해 2차 탐사에 대비한 작업은 완료할 수 있었다.

또한 암초 주변의 해류 및 조류 등 물리적 자료를 수집한 것도 수확이었다. 특히 1차 탐사에서 파도가 하얗게 소용돌이치는 곳이 해도상의 파랑도와 일치하고 Socotra rock과도 일치함을 발견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이것은 이어도=파랑도=Socotra rock이라는 가설이 사실임을 암시하는 증거였다.

돌아오는 길은 험악했다. 작업이 끝날 무렵 풍랑이 점점 심해졌다. 자정쯤에는 6~7m의 집채 같은 파도가 덮쳐왔다. 학술조사 팀장이었던 노홍길 교수와 나, 그리고 김기호 선장은 선장실에서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무사항해를 빌었다. 자선(子船)이었던 60톤급 어로지도선 북제주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북제주호에서 SOS가 왔다. “나침판이 유실됐다.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오버” 우리는 곧 응답했다. “모선(母船)의 불빛을 확인하라, 불빛을 놓치지 말라. 오버.” 이 같은 교신은 나침반이 유실된 데다 모선(母船)의 불빛까지 놓칠 경우 자선(子船)인 북제주호는 방향을 잃고 조난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피 말리는 파도와의 사투, 끊길 듯 말 듯 이어지는 모선과 자선의 교신 끝에 마라도 연안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 여명이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낼 즈음이었다. 그제야 콩알처럼 움츠러들었던 가슴을 펼 수 있었다. 정말 숨 막히는 밤이었다.

하마터면 북제주호와 함께 또 다른 남정네를 수장시킬 뻔 했던 아찔한 밤. ‘離於島’의 수절여인을 또 탄생시킬 번했던 그 밤의 기억을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그 여운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 영혼처럼 남아 있다.

생사의 경계선을 간신히 탈출한 그날 파랑도 탐사는 첫 방송을 탔다. 비록 절반의 탐사에도 못 미친 결과였지만, 확인된 자료를 근거로 9시뉴스에 ‘이어도를 보았다’라는 제목으로 파랑도의 실체가 처음으로 TV의 전파를 타게 된 것.

그 뉴스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전국의 신문방송의 동승취재는 물론, 한국해양소년단에서까지 실습승선 제안이 들어왔다. KBS제주총국은 KBS에 앞서 보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다른 매스컴의 2차 탐사의 동승취재를 허용했다.

하지만 한국해양소년단의 실습승선은 거절했다. 왜냐하면 승선인원이 많은데다 부족한 예산 때문에 단체인원의 숙식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철부지 학생들인지라 망망대해에서 사고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사고가 날 경우 책임문제가 KBS에 미치지 않을까하는 염려도 있었다.

해양소년단 관할부처는 문화공보부였다. 해양소년단과의 마찰로 당시 차관(허문도)에게 불려가 경위를 해명하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해명과정에서 밝혀진 일이지만 해양소년단 관계자가 KBS의 승선거절을 고의성이 있는 것처럼 왜곡 보고한 것이 사단이었다. 그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2차 탐사는 순조로웠다.

2차 탐사기간에는 워낙 날씨가 좋고 물도 맑아 수중작업이 원활히 이루어졌다. 2차 탐사에서 파랑도의 크기, 해저지형, 생물의 서식상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탐사가 진행됐다. 탐사를 마치고 KBS탐사선이 제주항에 입항한 것은 5월 12일 저녁 8시, 9시뉴스에 세 꼭지가 잡혔다는 데스크의 연락을 받았다.

나는 차 속에서 원고를 썼다. 그 원고를 토대로 장익환 카메라기자는 화면편집을 미리 구상했다. 편집기 앞에 앉은 시간은 8시 40분, 본사데스크는 톱기사이기 때문에 그림을 빨리 쏘아 올리라고 성화가 빗발쳤다. 방송 5분 전에 첫 화면을 쏘아 올릴 수 있었다. 화면을 쏘아 올리고 돌아서기 무섭게 9시뉴스가 시작됐다.

시그널 뮤직과 화면에 이어 최동호 앵커가 “KBS가 이어도의 실체를 벗겨드리겠습니다.”라는 첫 멘트가 나갔다. 그때의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1, 2차에 걸친 탐사 피로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 북새통 속에서 나머지 두 꼭지도 뉴스 도중에 간신히 쏘아 올려 무난히 방송을 마쳤다. 홍두깨로 소를 모는 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의 초를 다투는 방송기억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파랑도 탐사에 대한 방송은 뉴스처리로만 끝난 게 아니었다. 파랑도 해저의 아름다운 산호초군락과 떼 지어 노는 물고기의 모습, 기기묘묘한 해저동굴과 바위모습을 담은 30분짜리 수중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송하기도 했다. 또한 파랑도 탐사 덕분에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기자상을 받아 유럽여행의 행운을 잡기도 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실체규명도 특종이라고 한다면 파랑도 탐사 또한 특종일 수 있다. 과거 이승만 정권 때부터 정부가 그 실체를 밝히려 했는데도 실패를 거듭하다가 KBS탐사반에 그 실체를 드러낸 파랑도가 아닌가.

그런 면에서 파랑도 탐사는 내 30년 기자인생에 지울 수 없는 사건으로 자리 잡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5. 파랑도의 실체


그러면 파랑도의 실체는 무엇일까. 제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離於島’와의 관계는 무엇일까. KBS탐사반에 의해 밝혀진 波浪島는 수중 암초였다.

波浪島,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늘 파도가 이는 섬이다. 섬이라는 것은 육지 즉 땅이란 개념이 내포돼 있다. 바다와는 대별된다. 그렇다면 수중암초에 불과한 波浪島에 왜 섬‘島’자가 붙었을까. 그것은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KBS탐사반의 실측에 의하면 波浪島는 그 최고봉이 해면아래 7~8m(해도에는 5.5m) 깊이에 잠겨있다. 하지만 큰 파도가 치면 그 봉우리가 해면 위로 솟아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부근에서 조업하는 어부들의 증언이었다. 해서 태풍을 만나 조난당한 선원들에게는 어쩌면 섬으로도 오인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 연유로 인해 오래 전부터 늘 파도가 이는 섬이라는 이름의 波浪島란 이름이 붙은 게 아닌가. 이것은 순전히 내 추론에 불과한 것이기에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러면 지금부터 KBS탐사반에 의해 밝혀진 波浪島의 실체를 알아보겠다.

 

1) 波浪島의 지형과 크기


KBS탐사반은 波浪島의 크기를 측량하기 위해 정봉을 중심으로 1㎢의 범위에서 100m의 간격으로 바둑판처럼 잘라내 측량을 실시했다. 그 결과 波浪島의 정상주변은 수심 15~30m까지 굴곡진 암반으로 형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봉은 뾰족하게 돌출한 작은 암초가 아니고, 주변에 상당한 면적의 암반층이 완만하게 형성돼 있었다. 정봉의 높이는 7~8m의 수면아래 잠겨있어 해도상의 5.5m 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파도의 높이에 따라 오차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波浪島의 형태는 정봉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남북방향의 측정 결과는 북쪽으로 완만한 반면 남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제주도의 화순항을 중심으로 본 단면은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점점 수심이 깊어져 최대 수심 100여m에서 정점을 찍고, 60해리를 지나면서 점점 수심이 얕아져 波浪島 정봉에서는 7~8m까지 얕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정봉을 중심으로 한 암반의 넓이는 수심 40m를 기준으로 할 때 동서 750m, 남북 500m로 대략 0.375㎢로 꽤나 넓은 면적이었다.


2)波浪島의 지질


결론적으로 말하면 波浪島의 지질은 제주도의 지질과 일치하였다. 탐사반의 학술조사팀은 이곳에서 점토와 암석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서귀포와 성산포일대의 암석의 성분과 일치함을 밝혀냈다. 점토 또한 제주도에서 채취한 시료와 비교 분석한 결과 성분이 일치함을 보였다.

따라서 탐사반의 학술조사팀은 波浪島 역시 제주도처럼 오랜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용암이 풍화작용에 의해 현재의 점토광물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했다. 아울러서 波浪島의 생성시기 또한 제주도와 같은 신생대3기 말이나 4기 초로 약 200만 년 전에 형성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3)波浪島 주변의 생물


波浪島의 생물은 제주연안의 생물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그물과 주낙으로 물고기를 채집하고 스쿠버다이버들이 부착생물과 토착어종을 채집한 결과였다. 어류는 우럭, 볼락, 북바리 등 제주연안의 어종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제주연안에서 사라진 북바리가 이곳에서 다량 채취된 것은 특이할만한 점이었다.

또한 어로지도선이 저인망 그물을 던져 작업한 결과 멸치, 병어, 민어, 갈치, 아귀까지 채집할 수 있었으며, 소라와 전복도 많이 채취할 수 있었다. 이밖에 성게나 말미잘 같은 부착생물과 산호초군락도 발견됐다.

 

6. 취재 후 波浪島의 이용


당시 뉴스에서도 波浪島의 시급한 개발이용을 정부에 촉구한 일이 있다. 세계 각국이 바다매립을 통한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특히 선진국들은 공해상의 암초에 인공 섬을 만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200해리경제수역을 선포해 해저의 부존자원을 개발하는 등 다각도로 이용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는 하와이에서 700해리나 떨어진 곳의 산호암초를 인공 섬으로 개발했다. 이곳에는 4km의 활주로를 갖춘 비행장과 항만시설을 갖추어 해양자원 개발 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은 이 섬을 중심으로 200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했다.

또한 일본도 운수성이 신 국토창조 프로젝트를 마련하고 연안뿐만 아니라 공해의 인공 섬 조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고배의 port island 등이 좋은 예이다.

다행히도 KBS탐사반의 波浪島탐사 이후, 1987년 해운 항만청이 이곳에 등부표를 설치하고 세계에 공표했다. 이를 계기로 해양수산부는 1995년부터 해양과학기지 건설을 위한 기초조사에 착수해 2003년에 과학기지 건설을 완료했다.

波浪島의 해양과학기지는 북위 32도07분22초, 동경 125도10분56초에 위치해 있으며 정봉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700m떨어져 있다. 이 기지는 기상관측과 해양연구뿐만 아니라, 7광구의 해저부존자원 개발에도 기여하고 있다.

 

7.波浪島가 왜 ‘離於島’인가.


제주해녀들은 ‘離於島’를 낙토로 인식한다.?이어싸나 이어싸나, 점복한(전복 많은) 이어도, 매역한(미역이 많은) 이어도.?라는 해녀노래가 그것을 입증한다. 그들은 고된 삶을 그 민요 속에 응축시키고 있다. ‘離於島’를 마치 현실처럼 그리고 있다.

제주해녀들은 또?놀덩이?즉 거대한 파도를 넘어서면 미역 많고 전복 많은 ‘離於島’가 있다고 노래한다. ‘놀덩이’를 넘어선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 죽음의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의 죽음이라기보다 고해(苦海)의 삶을 보상받으려는, 즉 피안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위안(慰安)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놀덩이’가 있고, 해산물이 풍부한 파랑도가 ‘離於島’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제주해녀들의 마음속에 낙토로 그려지는 ‘離於島‘는 상상의 섬일 뿐이다.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민요 속에 나타난 섬의 특성이나 위치가 현실의 파랑도와 일치하고, 그녀들이 소망하는 풍부한 해산물이 있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을 보면 파랑도를 ‘離於島‘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으냐는 결론을 내렸다. 해서, 당시 첫 뉴스의 제목을 ‘이어도를 보았다’로 붙인 것이었다.

과거 제주해녀들은?苦海?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苦海?이것은 불가의 용어지만, 옛 제주사람들에게는 현실(現實)과 이상(理想)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사실 그들은 삶 자체를 ‘苦海’로 인식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 바람이 상징하듯 척박한 자연환경이 고해(苦海)요, 핍박의 제주역사가 또한 고해(苦海)다. 왜구의 잦은 침탈,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 출국금지령으로 점철된 피동(被動)의 역사가 그녀들에겐 고해(苦海)로 인식됐던 것이다.

게다가 유배지라는 절해고도의 인식은 절망의 삶을 체질화시킨 것이 아닌가. 고해(苦海)의 소용돌이가 삶의 현실적 괴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죽음의 문이기도 하다. 제주여인들은 그 죽음의 문마저도 삶의 연장으로 미화하고 있다.

이조실록에 보면 1640년 제주의 진상선이 서울로 가다가 ‘놀덩이’에 휩쓸려 100여명의 남정네가 물귀신이 됐다는 기록이 있다. 1772년 영조 48년에는 밀감을 실은 진상선이?놀덩이?를 만나 여덟 달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간신히 구조됐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것은 기록에 나타난 것일 뿐이다.

그밖에 기록에 없는, 크고 작은, 해상사고가 수없이 발생해 제주여인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제주여인들은 그들의 남정네가 ‘苦海’를 넘어 피안의 세계인 ‘離於島’로 갔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離於島’로 가는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제주노동요인 맷돌노래의 가사내용을 뜯어보면 극명하다.?이어도 길은 저승길이여. 신던 버선에 볼 받아 놓고, 입던 옷에 풀하여 놓고. 애가 타게 기다려도, 다시 올 줄 모르더라.?‘離於島’ 길은 죽음의 길이고, ‘놀덩이’는 저승의 문임을 암시하고 있다.

제주의 노동요나 해녀노래에서 유추해 보면 이어도는 강남(江南)으로 가는 뱃길 중간 지점으로 추정된다. 제주의 서남쪽 해상이다. 제주와 중국 사이의 고대항로와 일치한다. 하얀 포말이 소용돌이치는 곳, 수많은 해상사고의 진원지였다.

제주여인들은 위험을 위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된 삶의 과정, 즉 ‘苦海’의 과정으로 여길 따름이다. 해서, ‘離於島‘는 그들에게 애통(哀痛)과 낙토(樂土)라는 이중성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離於島‘의 상징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것은 그들의 현실적 삶에서 찾을 수 있다. 농사지을 땅이라야 돌을 캐낸 텃밭이 전부다. 1년 농사를 지어도 6개월 식량이 고작. 게다가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왜구(倭寇)의 약탈에 시달리다보면 6개월 양식도 안 된다. 언제나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바다는 육지의 연장이었다.?놀덩이?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됐다.

‘모살밭’, ‘조작지밭’, ‘머흘밭’ 이렇게 바다에도 ‘밭’ 이름을 붙여놓았다. 그것은 바다가 중요한 생업의 터전이자 농토의 연장임을 의미한다. 배 곯리지 않는 수단, 즉 삶의 수단을 악착같이 개척했다는 증거다.

그 과정에서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어떤 세계,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 막연한 기대가 수천 년의 세월이 중첩되면서 제주여인의 의식 속에 ‘離於島’라는 형체로 형상화되고, 피안(彼岸)의 낙토로 발전한 게 아닌가.

‘離於島’는 상상의 섬일 따름이지만, ‘離於島’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제주사람들에게는 현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해 왔다. ‘離於島’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離於島’가 어떻게 생겼는지, 또 얼마나 큰 섬인지 아무도 모른다.

KBS탐사반은 ‘離於島’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상에서 파랑도(波浪島)를 발견한 것이다.?이어도를 보았다?는 발상의 단초였다.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파도가 거칠고, 해산물이 많다는 것도 비슷했다. 상상이 현실과 일치할 수도 있다지만, 그렇게 겹칠 수가 있을까. 해서, ‘離於島’가 곧 파랑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파랑도(波浪島)는?이어도(?)를 보았다?는 선정적인 날개를 달고 KBS의 전파를 탔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離於島’가 TV에 나타난 것. 소설이나 시의 소재로나 활용되던 ‘전설의 이어도’가 현실 속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제주사람들에게는 충격이요, 상실이요, 허탈이었다. 제주사람들의 마음속에 낙토로 자리 잡았던 ‘離於島’가 아닌가. 그 ‘離於島’가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그 자리엔 수중암초가 떡 버티고 있었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수중암초를 두고?이어도인가 파랑도인가?하는 논쟁이 뜨거웠다.?이어도를 보았다?는 KBS탐사보도 제목이 불러온 결과였다.

‘離於島’는 실체가 없지만, 파랑도(波浪島)는 실체가 있다. 파랑도 탐사는 26년이 지난 지금도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이어도를 보았다?는 제목 한방으로 제주사람들의 마음속에서 ‘離於島’라는 환상을 깨버렸다는 의식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