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 여행기

용문사 龍門寺

이장춘 2015. 11. 3. 05:07

 

 

 

용문사 龍門寺를 생각하면 그곳의

 은행나무가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용문사보다도

 더 널리 알려진 그 은행나무다. 은행나무를 비롯해서 모든

수종가운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은행나무! 그 은행

나무는 동양 최대라고도 일컬어진다. 방송 등 매체에서는 수시로 그 모습과

 얽힌 얘기가 보도 되는가 하면 용문사에는 “호국영목 은행나무재단”이 있고

 호국영목 은행수 송비가 서 있으며곁에 설명문이 쓰여 있다. 신라말기

부터 1,100 여년의 한반도 한민족, 한겨레의 역사와 함께한다.

필자가  나무를 본적은 있어도 사진촬영을 하고 자세한

내역을 알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용문사 龍門寺

 

 

은행나무 옆에 한글과 영문자로 쓰인

설명 표지판과 호국영목 은행나무재단 등 비에

쓰여있는 글들을 요약했다. 천연기념물(보호수) 지정번호

 제30호, 천연기념물 지정일 1962년 12월 3일, 외형 높이 42m,

가슴높이 둘레 14m, 수령 1,100년, 가지 길이 동서로

28.1m, 남북으로 28.4m 정도 뻗어있다.

 

 

얽힌 이야기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자랐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고 중국을 왕래하던 절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이 아닐까?

 추정 되기도 한다. 어찌 되었던 이 용문사는 수난을 겼으며 사라졌다가 다시

새워지곤 했어도 이 은행나무는 1,100 여년을 이 용문사의 지나온 역사를 바라

보며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고 조선 세종 때 당상직첩(堂上職牒)

벼슬이 내려졌다. 하며, 마을에서는 굉장히 신령시하여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랜세월 불타지 않고 살아 남은

 나무라 해서 천왕목(天木)이라고도 한다.

 

 

 

 

옛날 이 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톱 자리에서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쳤기 때문에 중지 했다는 이야기와 조선조말 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살라 버렸으나 나무만은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종이 승하했을 때

커다란 가지 한 개가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4·19, 5·16 때에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한다.

  

 

 

 

 

 

 

 

 

 

 

용문사 龍門寺

 

 

서울 상봉역에서 용문행 전철을 타고

용문역에서 내려 용문사행 차를 타면 10분정도

달려 용문산 계곡 용문사에 이른다, 용문산은 1,1 57M의

 높은 산으로 등산로가 잘 개발되어 이있어 찾는이들이 많다.

 1967년 강원도를 대상으로 이곳에 TV중계소가 새워져

춘천방송국 관할로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KBS본사

직속이다. 강원도의 TV시청은 용문산 중계소

개설과 함께 이루워졌다.

 

 

 

 

 

 

 

 

용문사 龍門寺

 

(네이버 두산백과에 서 옮겨온 글 )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로 782(용문면 신점리 625)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본사인

봉선사(奉先寺)에 속해 있다. 913년(신덕왕 2)

대경 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우왕 때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다. 1395년(태조 4)

조안화상이 중창하였으며,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원찰로 삼으면서 보전을 다시 지었다.

1457년(세조 3) 왕명으로 중수하는 등 중 ·개수를 거듭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 때 전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당시 용문산과 용문사는

양평일대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권득수 의병장이 용문사에 병기와 식량을

 비축해두고 항일활동을 펼치며 일제에게 타격을 입혔다. 반격에 나선 일본군

보병 25연대 9중대와 용문사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1907년(융희 1) 8월 24일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러

사찰의 대부분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취운(翠雲)이 사찰을

 소규모로 재건하여 유지해 오던 중 그마저 6 ·25전쟁 때

파괴되어 3칸의 대웅전과 관음전 ·산령각(山靈閣) ·종각 ·요사

(寮舍) 등만 남게 되었다. 1982년부터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절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조선 전기의

정지국사(正智國師)부도 및 정지국사탑비가 있다.

 

부도와 탑비는 함께 보물 제5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 수령이 1,1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이는 마의태자가 심었다고 전해

지며 현재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문과 사천왕상 

 

 

 

 

 

용문사 경내의 관광지

 

 

용문사에 들려도 바쁘다

보면 자세히 살펴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어겸내에 정경, 세워진

 비나 시설 등을  올렸다.  

 

 

용문 팔경시비

 

 

 

 

 

 

용문사에 오르다보면 작은 인공폭포가 있고 친환경 농업 박물관이 있다.

 

 

 

 

 

 

 

 

 

 

 

용문사에 오르는 길 오른쪽 계곡을 건너는

 긴 출렁다리가 있다. 이 출렁다리를 건너면서 출렁거림을

 느끼기도 하고 사진도 촬영한다. 위 아래로 보는 시야의 계곡

정경이 아름답다. 올라갈때는 왼쪽의 큰길로 올라 갔다가 내려

올때는 이 출렁다리를 건너 좁은 길따라 내려왔다.

 

 

 

 

 

 

김영우 (미국) 선생님

 

 

경기도 명산 용문사의 유래와 그 역사적인

전설 등 소중한 엣 이야기들 잘 보고 들었습니다,

미국 California 의 몃분의 1밖에 안되는 작은 한국땅에
역사적인 유레를 지닌 사적들이 많이있다는것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이 국장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수고많이 하십시오.....

 

북가주 덴뷜에서  김영우 드림

 

 

   트레킹을 함께 한 일행이다.

오랜세월 필자와 함께 한 KBS부사장을 지낸

김형준님을 비롯해서 채유석, 김선초, 이계복,

한이수, 하태준, 권의철, 김현중, 장경수, 윤대작

 두달에 한번 정도로 트레킹을 한다.

 

 

 

국악 피리 김보들샘.wma

 

 

국악 피리 김보들샘.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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