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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88년 특집 JODK 경성방송국 김수일, 안익수, 안정균, 유재창, 김승채, 이장춘

이장춘 2015. 2. 16. 10:47

 

 

2월 16일은, 우리나라에서 방송이 

시작된 지 8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27년

2월 16일, 호출부호 JODK. 출력 1KW, 주파수 690KHz로

 KBS의 전신인 경성방송국이 첫 전파를 발사한 이후 우리나라

방송은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요? 바로 그 방송 88년의 발자취를

 라디오 위주로 살펴보는 시간을 저희가 하루 먼저 준비해 봤는

데요, ‘라디오 중심 김승채입니다 - 기획 좌담 <한국방송

88년, 라디오는 내 친구~> 먼저, 오늘 이 시간 함께

하실 한국 방송의 살아 있는 역사 세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국방송 88년 특집 JODK 경성방송국 김수일, 안익수, 안정균, 유재창, 김승채, 이장춘

 

 

2015년 2월 15일 오후 1시 5분

KBS 1라디오, "라디오의 중심 기획특집",

프로그램의 진행자 시사평론가 김승채님의 개시

멘트다. 프로듀서 안정균, 작가 유재창이 담당하는

 50분간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방송이 시작된

 1927년 2월 16일 88주년을 하루 앞두고 편성한 특집

방송이었다. 그 방송내용을 듣고 계신다.

 

 

 

아래는 출연진과 제작진이다.

왼쪽부터 폴리 아티스트 안익수,

진행시사평론가 유승채박사, 성우 1기

(1954년) 김수일, 이장춘방우회

이사, 프로듀서 안정균

 

 

 

 

1924년 12월 9일 시험방송으로부터

1960년대까지 방송이 걸어온 이야기를 세사람의

입과 스튜디오에 등장한 생방송시대의 효과도구 등이

등장되어 드라마 등에서 사용된  효과음이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를 직접 재현 해주면서 그 시대의 인기드라마

 청실홍실, 꽃피는 시절,  산너머 바다 건너, 현해탄은

 알고있다 등 체험을 통한 얘기를 들려 주었다. 

 

1954년 20대의 젊은 나이에 

성우가 되어 그 시대의 드라마에 출연한 

얘기를 비롯해서  후시녹음 後時錄音으로 영화가

제작되던 시절 신성일, 곽규석, 이대엽 등등 청춘스타들의

대사를 대신 해 주었던 얘기를 비롯, 성우 인기에 편승해서

가짜 김수일이 나타났던 애피소드 등 그 시절에 있었던

생생한 얘기를 80이 넘은 김수일님 자신으로 부터

들을 수 있어서 생동감을 더 해 주었었다.

 

 

김수일님

 

 

효과의 달인 안익수!  요즈음은

폴리 아티스트라고 불리는 안익수님이

 손수 들고 온 생방송 시대에 사용했던 효과도구로

바람소리를 내던 천막, 감자가루 전분으로 눈길을 걸을때의

소리, 그리고 새소리, 아이우는 소리, 소 우는 소리 , 천둥치는 소리,

 비오는 소리, 풀 밟는 소리, 부엉이 우는 소리 등등의 소리가 나는 수많은

효과도구를 등장시켰다. 텔레비젼이 아니라 그 물건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어서 TV로 재현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다. 저런 도구로 어떻게

저런소리를 낼 수 있을까? 참으로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 시절의

 지헤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 도구를 사용해서 효과음을 냈던시절

극장을 빌려 실연을 해서 청중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던 일이 있었음을 상키했다.

 

 

방송에서 꼭 말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내용이 제한된 시간으로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못다 한 중요한 얘기를 여기에 올린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갖가지 문화 말살 정책에도 어떻게 우리말 방송이

해방 때까지 지켜질 수 있었을까?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리방송인들의 절대로 포기  수 없다는 열화

같은 바람과 실천으로 가능했다. 

  

 

1927년 2월 16일 처음방송이

실시되었을 때는 일본어 방송과 우리말 방송의

비중이  3 : 1 밖에 안되고  편성시간도 우리말 방송은

듣지 않는 시간이었고 거기다가 쌀 50가마니, 100가마니를 

주어야 사는 라디오를 구 하기가 어려워 방송을 듣는 우리조선

사람들은 적었다.   송시건을  2 : 1로 조선말 방송을 늘렸어도

마찬가지였다.     청취료로 운영하는 방송국은 어려움을 겪었다.

문을 닫아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어떻게든 일본말을 쓰도록

했지만 우리정서에도 맞지않는 일본말을 쓰려사람은

적었다. 방송국을 살리기 위해서는 조선말 방송을

 하는 방송국으로 운영 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송신소를 세우고

출력도 1KW에서 10KW로 올리면서 두개의

채널을 만들어 조선어 방송채널을 별도로 마련했다.

또 라디오도 방송국에서 싼 값으로 만들어 보급했다. 그러자

방송을 듣는 조선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방송국 경영도 좋아

지고 선사람들도 조선말 방송을 들으며 즐겼다. 잠시 조선어

방송 전성기가 왔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 가지 않아

 일어난 중일전쟁으로 시들어 갔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총독부는

조선어 방송채널에 일본말을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때 방송과장은 제 3대 심우섭이다. 심우섭은

상록수 저자로 한때 방송국에 근무한적이 있었던  심훈의 형님

총독과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덕망있는 거물급 인물이였다. 그 심우섭

 과장이 직원들에게 일본말을 방송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총독부를 찾아가 조선어 방송채널에 일본어를 섞는것은 부당함을

 역설하면서 방송과장을 사직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나서 조선어

방송채널에 일본어를 섞으려는 기도는 흐지부지 되었다.

 

심우섭은 그때 처음으로 제 2방송부가

발족해서 제2방송부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일본의

지시를 순순히 따랐더라면 더 큰 출세와 부귀영화를 누렸겠지만

 그는 거기에 결코 타협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제 2방송부장 자리는

상당기간 공석으로 있다가 함흥방송국장으로 있던 노창성이 부임했지만

단파방송 사건이 일어나 제2방송부가 폐지되고 노창성도 방송국에 물러

났다. 조선인들은 조선어 방송이 아닌 일본어 방송을 듣지 않았고 

조선어 방송채널이 새로 마련되었을때 그 채널을

지켜내려는 한결같은 의지가 있었다.

 

최초의 영화를 만들고 史話의 대가로

 문화의 선각자이던 윤백남, 문학의 중심인물

김정진, 소월을 길러낸 동심초 시인 김억, 백설부

수필가 김진섭, 국악계의 거성 이혜구, 시인 모윤숙, 대쪽

같은 언론인 이정섭 이 분들은 방송인 이었지만 송인 이라고

 아는 분들은 많지 않다. 그들은 조선어 방송을 자유롭게 사용

할 수 있는 제2방송을 매게로 활동한 대가들이다. 그리고

우리말 방송이 서투른 신입방송인 들에게 어떻게든

 우리말에 익숙 해 지도록 힘을 기울여

 우리 말을 지켜나갔다. 

 

관공서 학교등 어디서든 우리말 사용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오직 우리말로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경성방송국 제2방송과, 그것은 우리말을 지키려는 한 민족

의지의 표출이요 우리말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우리 방송인

들의 의지의 표상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철통같은 일제 통제하에서 목숨을 걸고

  해외방송을 청취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방송인들

 한민족의 피가 흐른 그들은 우리문화를 지키고 우리말을 지키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한민국의 일동공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JODK 경성방송국 일본인들이

 그들의 목적달성을 위해서, 또는 우리 문화말살을 위해서 세운 방송국

일지라도 한민족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세운 방송국이 한민족의

문화를 지키고 말을 지키고 독립운동에 앞장 선

 방송국이 되었으니 아이러니 한 일이. 한국방송의

 기원을 해방후로 하자는 얘기도 있지만 어찌보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려도 이땅에 세워져 조선인들과 함께

했던 방송국을 부정할 수는 없다그래서

오늘은 한국방송 88년인 것이다.

  

  1954년, 오승룡, 박용기, 신원균,

이창환, 심영식, 고은정, 김소원(김연임),

 윤미림, 정동은, 김옥경 등22명의 1기 성우들이

 들어와 활동했던 얘기 등이 있지만 50분

간의 방송내용을 모두 올렸으므로

 녹음물로 대신한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제가 이 블로그 춘하추동방송에

들어와서 많은 기사들을 보고, 배운바가

참으로 많아 늘 들어오게되고 감사하는 마음인데
오늘 이 기사를 보며 들으며 특별히 반가운 마음입니다.
방송의 역사를 거쳐오면서의 이야기가 지금 현재 춘하추동

방송의   이장춘 국장님의 생생한 설명으로  이어지니 반가울

수 밖에요. 어려웠던 사회상과 그 때의 모습들을 상상하며 듣게

됩니다. 심우섭 선생님의 일제에 대항한 우리말 방송만을 

주장하신 일화는 참으로 통쾌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이자리에서 역사를 증언하고 설명하신

 분들의 이 기사도 방송역사에 귀중한

기록으로 남을것입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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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DK 경성방송국 최초의 방송국 설립 그때 그얘기

http://blog.daum.net/jc21th/17782155

단파방송 독립운동 수형자, 옥사자, 국가포상자 명단, 기록물 

http://blog.daum.net/jc21th/17781874 

 

경성방송국 우리말(제2방송)초대 방송과장 윤백남
http://blog.daum.net/jc21th/17780404

경성방송국 제2대 한국말 방송과장 김정진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405

 

경성방송국 제 3 대 제2방송과장 沈友燮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406

 

최후의 조선방송협회 회장 이정섭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681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방송국장 이혜구님 ( 1 )

http://blog.daum.net/jc21th/17780247

 

신시(新詩)의 선구자였던 시인이자 지성적인 방송인 김억

http://blog.daum.net/jc21th/17780773

 

수필문학의 금자탑, 방송인 청천 김진섭

http://blog.daum.net/jc21th/17780647

 

모윤숙과 방송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http://blog.daum.net/jc21th/17780780

 

 

방송사옥 변천

 

 

우리나라 최초 방송사옥 경성방송국은

머리 사진으로 올렸다.1927년-1950년

 

 

부산 피난시절 임시 중앙방송국 1950년- 53년

 

 

정동 임시방송사옥 1953년 1957년

 

 

남산라디오 사옥 1957년-1976년

 

 

남산 텔레비젼 방송국 1961년 1976년

 

 

현재의 한국방송사옥 1976년부터-현재

 

 

1956년 주간기본방송순서 김수일님 제공

 

 

대한민국 효과음의 창시자 이상만, 그는 1946년 작가

 김영수님이  KBS 전속작가가 되면서 함께 들어와  오랜세월

효과를 보다가 조남사님에 이어  오랜기간 KBS 연출계장으로 재직

 했다. 1948년부터 성우활동을 한 이혜경과 부부연을 맺었다.

 

 

폴리 아티스트 안익수님과 엔지니어   ?

 

방송 88년 특집, 1부(2).wma

  

?? 88? ??, 1?(2).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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