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살된 노인이 갓 태어난 날로부터 8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젖 먹던 어린아이가 그때 젖을 빨리며 자기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한다고 했다. 그런 그분은 일생동안 살아온 일들이 모두 기억 속에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본인이 세상에 태어나기전 15살, 13살의 두 누님이 뚜쟁이에게 팔려가 어릴때 같이 살아본 적이 없던 그 누님, 위진실(실명)이 기생이 되어 장안의 이름있던 명월관 기생으로 있다가 또 하나의 요정을 차렸다. 그 이름 행화촌!
그 누님 요정 행화촌에서 지배인으로 일을 돕던 19살의 공식적으로는 초등학교 졸업장 밖에 없던 그 소년이 고등학교 졸업자로 엄격히 적용되던 국영방송국 KBS 전속성우시험에 학력을 속여 응시해서 합격, 성우 가 되고 곧이어 그해에 대학교 이상의 졸업자가 응시할 수 있었던 KBS아나운서 시험에 응모해서 아나운서로 출발한 그 소년이 26년간 국내외 벙송전파에 목소리를 실었고, 그간 수필가, 방송 드라마 작가, 클래식 음악의 방송 해설자가 되었으며 여러권의 책을 내고 이번에 자서전적인 고향이 어디십니까를 출간했다.
위진록 아나운서 최창숙의 사랑과 삶, 가족사 실화로 엮은 다큐드라마
그간에 해방공간에서 가장 인기 있던 「똘똘이모험」주인공으로 인기를 모았고 김구선생 국민장 하관식을 생으로 중계방송한 아나운서가 되었으며 6.25전쟁이 일어나던 날 아침 첫 뉴스를 전한 아나운서로 기록 되었는가 하면 서울수복을 알린 KBS 중앙방송국 최초의 마이크를 잡았다. 또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멜로드라마 「청실홍실」에서의 주인공 윤청년 역을 비롯해서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했고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드라마 대본 공모에 입선 한 것을 비롯해서 300 여편의 드라마 대본을 썼다.
위진록이 주연한 해방공간의 인기드라마 똘똘이 모험, 왼쪽 얼굴이 가려 뒷 머리만 보이는 분
그는 클래식 방송 해설자이고, 해변가에서 햄버거를 만들어 판 장사군 이기도 했으며 동내신문 발행자이기도 했다. 65세의 나이에 그 사랑하던 아내를 잃고 25세 연하의 동반자와 만나 사는 오늘 그 파란만장한 삶, 그 삶속에 어쩔 수 없이 거짓되게 살아온 일, 일생동안 마음에 큰 부담을 느껴 왔던 그 일들을 고백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 얘기하지 못한 일들도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책 한권을 썼다. 그래서 그 책 이름에 고백적 기록이라는 이름을 붙여 2013년 10월「KBS 원로아나운서 고백적 기록, 고향이 어시십니까」를 세상에 내 놓았다.
컴퓨터와는 거리가 먼 86세의 노인이 9개월간에 걸쳐 연필로 쓴 원고를 70세에 만난 25세 연하의 젊은 동반자 「김로신」의 도움으로 컴퓨터에 옮겨져 젊은「신동욱」의 도움으로 출판된 이 책은 그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얘기들을 모두 실명으로 실화로 엮었다. 자서전이자 인간 드라마이고 소설보다도 더 재미있는 얘기들이 있다. 메모를 해 놓았을 리도 없는 어렸을 때의 얘기로부터 이 글을 쓰기까지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표기된 그 수많은, 인명, 지명들, 음악곡목, 그리고 그 어럽고 까다로운 얘기들을 어쩌면 그리도 생생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 할 수가 있을까? 를 생각하며 500페이지나 되는 그 책을 모두 읽었다.
1년차 후배아나운서「최창숙」과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63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 보내야 했던 그 때까지 그 얘기만으로도 큰 감동을 주어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하다. 기생의 동생으로 요정에서 일하는 상놈과는 절대로 결혼 시킬 수 없다는 최창숙 가족들, 가족들에게 그를 만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방송국을 그만 두고 가족들 모르게 만나오던 그들에게 또 하나의 장벽 6.25! 그로 인해서 불의에 해어져야 했고 잠시 생과 사를 넘나들며 소식 모르고 살다가 또다시 서로를 알았을 때는 현해탄이 가로막히고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일본땅, 가깝고도 먼나라 서로 오고 갈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었다.
원래 1948년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던 최창숙은 부산 피난방송국의 아나운서로 복직하고 둘은 비록 직접 만날 수 없는 거리에 있을지라도 오, 가는 편지로 현해탄을 넘는 뜨거운 사랑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위진록에게 한 달간의 국내 출장명령이 내려졌다. 최창숙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모님과 가족들의 승인을 받았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의 와중에서 가족들도 둘을 맺어주어야 한다. 고 마음이 바뀌어 그 한 달간의 출장기간에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이익흥 서울시장 주례로 올려졌다.
이익흥은 뒷날 장관시절 이승만대통령의 방귀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결혼식을 올린 최창숙은 VUNC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이 일본 동경에 있던 때 그곳으로 가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일본과의 국교가 없던 시절이라 그것이 불가능했다. 길은 하나, 엄청난 부담을 않은 밀항을 해야만 했다. 창숙은 밀항을 하기로 결심하고 밀항선 을 탔다. 그러나 그 밀항선이 조난을 당하면서 3일간에 걸쳐 바다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을 해매는 동안 그 정체가 세상에 알려져 죽음은 면했어도 밀항자가 되었다. 그간의 우여곡절 드라마 같은 얘기 들이 많다. 그렇게 3년간 숨어살다가 다시 합법적인 절차를 밟기까지는 3년여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그 과정에 최창숙의 일본에서의 자수와 한국으로의 추방절차를 거쳐 1년간 한국 내에서 머무른 후 다시 일본에 건너 올 수 있다는 것 이어서 그런 절차를 밟기로 했다. 때마침 창숙은 임신 중이었고 진록은 6개월간의 임신휴가를 받아 한국에서 함께 지낸 그 6개월간에 「청실홍실」주연을 맡아 인기를 모았다. 청실홍실의 작가이자 연출가 조남사 와는 1947년 성우 동기이자 오랜 친구가 되어있었다. 그러는 동안 최창숙은 어린이를 낳는 등 국내생활을 하는 동안 1년의 세월이 흘러 일본 으로 함께 돌아왔다. 이 기간 중 창숙이 1956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텔레비전 방송국 HLKZ에서 아나운서를 했다. 여자로는 최초의 TV방송을 한 아나운서가 된 것이다. 그때 HLKZ 방송부장으로 재직했던 서명석 아나운서는 1947년 위진록과 같이 입사한 동기 아나운서였다.
위는 어머니이고 아래는 1990년에 북한방문때 만난 10살 위의 형님가족들로 형님은 6.25때 세상을 뜨시고 아래 한복 입으신 분이 형수다. 그 자녀 손주들과 함께 한 사진이다.
그 가족사도 남다르다. 2남 9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1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난 샘이고 아버지 위 원혁은 진록이 국민학교에 들어가던 8살 때 세상을 뜨셨다. 측량사 또 세무서 직원으로 재직해서 어렵지 않은 생활들 했을 법 하지만 늑막염으로 오랫 동안 고생하다가 세상을 떴기에 어려움이 있어 두 누나는 13살, 15살의 어린 나이에 뚜쟁이에게 팔려가 어린시절 같은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본인은 이곳 저곳을 다니며 국민학교를 다녔다.
돈이 없어 중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었지만 나라에서 공부를 시켜주는 사범학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간 곳, 평양사범에 들어갔지만 담배를 피우다 들켜 2년 반 만에 퇴학을 당한다. 그로부터 남 신의주의 역부, 서울(경성)의 한인회사 일본 광고 대행회사의 사환을 거쳐 경성역 역부로 일하는 동안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그 무렵 한 번도 같은 집에서 산 기억이 없던 누나 진실이 장안의 이름 있는 기생이 되어 그 시절 최고의 요정으로 이름 나 있던 명월관의 기생으로 있다가 행화촌이라는 요정을 차리고 진록은 그 요정에서 일을 도왔다.
그 요정의 지배인 격이었다. 그때 중앙방송국 연극 연구생 모집이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우 모집인 샘이다. 그러나 학력이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졸업이상으 로 제한되어 있어서 평양사범의 위조된 졸업장으로 응모해서 합격 성우가 된 것이다. 그 시대의 똘똘이 모험 등 주요프로그램의 주역을 맡아 출연하던 중 아나운서 시험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나운서 시험은 대학교 졸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성우로서의 역량을 보아오던 당시의 방송과 계장 민재호 아나운서가 평양사범 졸업장만 으로 응모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말에 따라 아나운서 시험에 응모해서 아나운서가 되었지만 늘 불안했다. 마침 방송에 출연하고 있던 평양사범 은사 이숭녕선생님이 보증을 서 줄 터이니 걱정 말고 방송을 열심히 하라는 말에 따라 아나운서 생활을 계속했다.
앞에서 쓴 최창숙 아나운서를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1950년 6.25가 일어났을 때 그 첫 방송을 한 주인공이 되었다. 6.25때 피난을 못간 진록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UN군의 서울 탈환에 접해서 마이크를 잡고 서울탈환소식을 전했다. 방송에 관한 얘기는 여러 차례의 글을 썼으므로 가족사 얘기로 글을 마무리 한려고 한다. 9녀 중 진록으로 보면 위로 6명 아래로 3명이다. 첫째 누님은 어려서 세상을 떴다. 둘째가 확실이고 셋째가 진실이다.
그 진실이 유명한 기생이 된 것은 앞에서 얘기했다. 그 위의 확실은 충청도 강경 먼 곳에 가서 살았다. 그 누님이 세상을 뜨면서 잘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고향 집 얘기를 했고 그 얘기를 들은 47살의 그 분이 평안도까지 찾아와 17살의 경실 누님에게 청혼을 함에 30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와 딸 같은 남녀가 부부 연을 맺고 그 집, 안 주인이 되어 잘 살았다. 또 한 누님 성실의 얘기도 있다. 꾸며서 쓴 드라마 같은 그러나 꾸며 쓴 드라마가 아닌, 실명, 실화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사가 스스로 고백한 글이다. 500페이지나 되는 책을 생각나는 대로 요약하다 보니 알맹이가 빠지고 내용이 부실하게 되었을 지라도 어쩌면 그리도 삶의 얘기 가족사를 구석구석까지 실명으로 공개하는 용기에 감동을 받아 글을 올린다. 요약된 글로 위진록 아나운서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올렸다.
HLKZ 최초 TV방송국 그때 그 얘기 위진록 선생님께 보낸 최창봉선생님 편지
위진록, 최창봉선생님! 방송계에서는 물론 이나라 국민이면 잘 아는 원로중의 원로 방송인 이다. 이 분들의 주고 받은 편지는 비록 사신이라 할지라도 방송역사의 일부분이다. 오늘의 편지는 2014년 1월 5일 최창봉선생님이 신년새해 인사를 겸해서 미국에 사시는 위진록선생님에게 보낸 편지다. HLKZ 비화가 있고 최창숙 아나운서가 HLKZ에 관한 애기가 있다. 솔직한 심정을 술회한 내용이어서 필자는 관심을 가지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9P에 달하는 친필 편지로 정성들여 쓴 편지인데 최창봉선생님은 끝에 치료할 수 없는 신병으로 글이 억망이 되었다 면서 양해를 바란다.고 했다. 내용은 방송사적으로도 의미를 담고 있고, 이 시대가 낳은 보기드문 방송인의 친필 편지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마음으로편지의 주요부문 4P를 모두 스켄처리를 해서 올렸다. 한자로 되어 있어서 혹시 잘 모르시는 분이 계실까. 해서 한글로도 올렸다.
위 선생님께! 내가 종로 HLKZ 텔레비전에 근무한때가 1956년 3월부터 1959년 2월까지 3년이었습니다. Program director로 일반 Program 편성제작은 내 책임이었고 보도와 ANN실은 서명석 형이 맡아하고 있었지요. 최창숙, 진영희 씨 등 미녀 아나 네 명은 서형이 스카우트해 HLKZ TV에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여자 ANN들로 열심히 일을 했었지요. 미모에 능력을 갖춘 모두 우수한 여 ANN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창숙 ANN가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어요. (위 선생 부인이라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낮, 방 방송준비 때문에 스튜디오 프루어에서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고 있었는데 최창숙 ANN가 그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불쑥 무슨 봉투 같은 것을 나에게 쥐어 주었어요. 나는 깜짝 놀라 이게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그냥 웃으며 내 앞을 떠났었어요. 봉투 안에는 「구두표」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그때 내가 구두 뒤축이 떨어진 것을 그대로 신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다 못해 「구두표」선물을 내게 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얼마나 놀라고 (미녀 ANN이기 때문에 평소 대화도 안 하던 때라)쑥스럽던지 내가 아마도 넉넉지 못했던 터이고 아침에 출근하면 스텝 들 데리고 시간에 쫓겨 쉴세없이 프루어를 뛰어 다니느라고 새 구두를 나가 살 시간이 없던 탓이었을 텐데 어쨌든 단편소설 소재가 될 만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고마웠던 최창숙 ANN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평생 잊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무리 Staff간에도 남녀가 스스럼없이 말을 주고받지 못했던 때라 솔직히 나는 가슴이 뛰기도 하고 새 구두를 사고 난후 한동안 일 능률이 올랐던 기억은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LA에 갔을 때 위 선생 댁에서 부인의 정성어린 저녁대접 받았던 일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부인이 발병된 소식을 듣고 안타까웠던 일. 지난번 「고향이 어디십니까?」는 받아 온 날부터 2-3일에 걸쳐 다 읽었는데 부인 관계없는 얘기 읽을 때도 눈물이 많이 나더니 부인 얘기가 나올 때면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와 눈물 닦느라고 바빴습니다.이번 책은 그동안 쓰신 책들의 종합 편
(여기서 편지의 4-8P까지는 생략하고 9P로 이어집니다.)
나는 평안도 태생이라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가는 모태신앙 이지만 위 선생은 어렸을 때 앓는 위 선생을 어머님이 신부에게 데리고 갔다는 얘기, 지난번 위 선생이 나가사키 순교자들 참배하고 오던 일, 생각하니 위 선생은 천주님 영세 받으신 대 베드로에 틀림없습 니다. 위 선생님 주님의 축복 많이 받으십시오.
(2014년)1월 5일 서울에서 최창봉 배
*. 치료불가 신병 때문에 새해 인사도 늘 없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아 편지도 글이 억망이 되었습니다. 양해 해 주십시오.
최창봉선생님 편지내용 원문
중간 4P부터 8P까지는 생략하고 마지막 9P를 올렸습니다.
이 글을 올려놓고 잠시 검토하면서 수정을 거치는 동안 이 글을 보신 분가운데 이 책이 영화화 된다면 현재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국제시장 못지않는 감동적인 영화로 테어날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 해 주시는 등 참으로 훌륭하고 감동적인 책이라고 극찬 해 수신 분들이 계십니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관련 글 보기 영문자 클긱
위진록 아나운서가 말하는 6.25 발발 첫 방송뉴스 http://blog.daum.net/jc21th/17780760
위진록 (6.25 첫방송) 아나운서, KBS시절 http://blog.daum.net/jc21th/17780862
HLKZ 최초 TV방송국 그때 그 얘기, 위진록 선생님께 보낸 최창봉선생님 편지 http://blog.daum.net/jc21th/17782411
위진록, 6.25 첫 방송뉴스 아나운서 (미국거주)를 서울에서 만나 http://blog.daum.net/jc21th/17781301
6.25첫 방송 아나운서 위진록 /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http://blog.daum.net/jc21th/17780758
http://blog.daum.net/jc21th/17781607
6.25 첫 방송 위진록 아나운서의 편지와 참 교육을 위한 제언 http://blog.daum.net/jc21th/17781789
홍난파작곡 민족의 노래, 봉선화인가 봉숭아인가? http://blog.daum.net/jc21th/17780939
해방후 최초의 인기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 http://blog.daum.net/jc21th/17780797
위진록, 6.25 첫 방송 아나운서, 고향이 어디십니까? 출판기념회 (1) http://blog.daum.net/jc21th/17781898
화 보
사진 한장 한장에 수 많은 사연이 담긴 그 사진들을 골라 올렸다.
1952년 이 결혼 사진속에 주례와 신랑, 신부 그리고 어머니는 쉽게 알 수 있고 진실누님을 비롯해서, 경실 등 화제의 인물 가족들이 있음직하다. 확인되는대로 사연을 쓸 것이다.
성우 박복수와 함께 드라마 출연장면이다. 88세의 위진록, 84세의 박복수는 현재 미국 LA에 사신다.
위진록 최창숙 부부는 일라, 유라, 수라 3남매를 낳아 미국에서 산다.
출판 기념회, 하이미스터 위, 잃어버린 노래
방우회 주추최로 서울신문회관에서 열었던 1979년 "하이 미스터 위" 출판기념회! 위 사진에는 위진록님, 문시형 방우회 회장님을 비롯 배준호, 김창구, 방흥안, 정항구, 이상만님 등 원로방송인들이 함께 했다. 이때 국내판은 문시형방우회회장이 직접 운영하는 광보문화원에서 3,000권이 발행되고 곧이어 박정희 대통령 영애 박근혜님이 이사장장으로 있던 새 마음회에서 60,000 권을 주문 공급키로 했지만그해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 서거로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왼쪽부터 박종세, 강찬선, 위진록, 장기범, 임택근 황우겸, 이수열 위진록 아나운서와 함께 한 위, 황우겸, 임택근, 박종세 아나운서 아래 위 선배님들과 김규홍, 송현식 아나운서
위 사진은 하이 미스터 위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복혜숙, 황정순, 위진록님
위는 하이 미스터 위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왼쪽부터 이근삼(극작가),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한원조 평양사범동창, 김규환(작곡가), 위진록, 안봉빈, 이치순, 신인섭, 안중원님이고 아래는 1993년 4월 28일서울 신문회관에서 연 "잃어버긴 노래" 출판기념회로 왼쪽 두번째부터 고은정, 이은주(경기민요 인간문화재), 최창봉, 이혜경, 김소원, 박용기, 이경재님이 함께 한 사진이다.
월남순방
위는 채명신장군과의 인터부장면이고 아래는 수병과의 인터뷰장면이다.
햄버거를 만들어 팔던 시절, 10년세월
아세아 서점을 개점 하던날 조남사님과
1985년 모노드라마 "고향이 어데십니까?"를 마치고 극작가 장소현씨와
1988년 유럽여행 가이드
1990년 북한방문길에서 촬영한 사진
위, 형수와 함께. 아래, 형님 가족들과 함깨 (신의주)
신의주 유치원 어린이들과 위, 아래
1990년 북한방문중 사망한 김계용 목사 묘에서
1993년 작곡가 김규환 선배와
2010년 평양사범, 동창 선배들과 천수회 모임 가운데 서 계시는 분이 천수회 간사 임달현 동창
고향이 어디십니까? 미국 출판기념회에서 뒷줄 좌로부터 전 미주방송인협회 18대회장 송 현식 전미주방송인협회 8대회장 박 관우,미주방송인협회 23대 미주방송인 총무국장 양 방수, 3대 김 영우 회장님의 부인, MBC앵커 김 준철, 23대 미주방송인협회장 김 정수, 앞줄 좌로부터 MBC 아나운서 장 인숙, 전 미주방송인협회 3대 회장 김 영우, 위 진록, 극작가 시인 장 소현.
위는 미국 민영방송에 출연 하던때 앞줄 왼쪽부터 역 시계 방향으로 이종성사장, 김영우 방송국장, 윤부용 , 권윤기 아나운서 아래는 1947년 11월 중앙방송국 방송과 아나운서, 기자. 1.문제안, 2.이계원, 3.윤길구, 4.민재호, 5.전인국, 6.최용희, 9.김인현, 10.이덕근, 12.강문수, 13.윤용노, 14.편용호, 15.강준원, 16.이진섭, 17.홍준, 18.이성수가 함께 한 사진이다, (7. 8. 11번은 미확인)
유경환(유카리니) 여사님 글
한 사람의 일생이 사진보다 더 확실하게,
분명하고,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는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낼 수 없는 내면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서 표현 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몇번의 책을 내신적이 있는 위진록 선생님의 인생고백인 '고향이 어디십니까" 출판을 진심 으로 축하드립니다. 또한 남편의 원고를 컴퓨터 작업으로 도와 책으로 나오기까지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부인되시는 분께도 경의를 표합니다. 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심이 그렇게 할 수있는 힘이라 믿습니다. 100수 시대에 걸맞게 건강해 보이시는 위진록 선생님, 그리고 Mrs. 위 두분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방송인 위진록씨!와 최창숙 부부의 사랑과 인생에 관한 실화 글 잘 읽었습니다. 속담에 「되 글로 벌어서 말 글로 써 먹은 사람이 있다.」 고 하더니 바로 위진록씨를 두고 하는 말 이였군요. 옛날 국민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인 분이 서울 중앙방송국의 아나운서를 하셨고 또 중요한 방송을 도 맡아서 했다고 하니 그 재주가 신출 귀몰 할 뿐입니다. 현해탄을 사이에두고 나누었던 사랑이야기와 파란만장한 생을 사시면서 그 동안의 모든 일들을 실재 인물로 공개를 하셨다 하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국 방송사에 크나큰 획을그으신 위진록 아나운서님! 존경합니다. 소식 감사합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
'기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등려군 鄧麗君 Teresa Teng 삶과 노래 (0) | 2015.02.07 |
---|---|
국제시장 대한민국 건국 월드피스 자유연합 공개사진 이승만 맥아더 (0) | 2015.02.06 |
박권상, 1주기를 맞아 (언론인, 朴權相 전 KBS사장) (0) | 2015.02.04 |
항공촬영(사진)과 방송 그리고 그 매력, KBS 이태수감독 (0) | 2015.01.16 |
KBS 아나운서 동영상 (2) 김보민, 전주리, 이상협, 터치 마이 바디 오정연, 정다은, 정지원, 이슬기 (0) | 2015.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