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세계유산

덕수궁 역사 600년, 조선왕조 5대궁

이장춘 2013. 9. 8. 06:54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한양에 5개의 궁이 조성되었다. 최초의 궁이자

오랜기간  정궁으로 이오온 경복궁, 조선왕조의 마지막 궁

창덕궁, 그리고 한때 창경원이라고도 불린 창경궁,  광해군이

조성한 궁에서 결국 인조반정을 맞은 경희궁, 임진왜란으로

 부터 비롯되어 고종에 이르기까지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덕수궁, 5대궁이 조선왕조를 이어온 궁전이다.

 

 

  덕수궁 역사 조선왕조 5대궁

 

 

역사의 구비 구비마다 행궁으로

정궁으로 별궁으로 이어져 온 경운궁, 덕수궁은

불탔고 이 자리에서 나라 빼앗기는 도장을 찍으면서

슬픈 운명 속에서 조선왕조 마지막 왕, 그리고 대한제국 최초

 황제 고종황제는 순종황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여기에 유폐되었다가

의문의 세상 떠남을 가슴에  안아야했다. 그날의 경운궁이 아직 완전 복구

되지 못한, 아니 영원히 복구 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을 찾고 사랑한다. 그 사연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대한민국을 잘 모른 사람도

 이곳을 사랑하며 찾는 가운데 이제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왕실과 덕수궁의 인연은 태조

이성계가 그토록 사랑했던 강비의 능을 이곳에

조성하면서 부터 비롯되고 선조가 임진왜란 피난길에서

돌아와 이곳에 머무르면서 행궁이 되어 그로부터 조선왕조가

최후를 고하고 고종황제가 이곳에서 승하 하실 때까지

조선왕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태조가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고 3년이

지나던 해 계비 강 씨를 현비로 책봉 했다가  

5년 8월 13일, 질병으로 세상을 뜨자 10일간 朝市를

정지케 하면서 애통해 하다가 다음해 1월 3일 이곳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정릉이라 정하면서 이 일대를 정릉이라 했고 후에 약칭 정동이

되었다. 물정자 정능은 맑은샘이 있었던데서 유래된것이라고 하며 이성계가

 그 우물가에서 처녀 강비를 만났다는 얘기를 하는 분도 있다. 경복궁에서 바라

볼 수 있는 이곳 정능에 능을 마련하고 이곳을 지금으로 말하면 성역화

 했다. 정능리에서도 신덕왕후의 정릉과 그 동측 정릉의

供養寺로 새워진 흥천사가 있는 정동언덕 일대를

따로 皇華坊이라고도 불렀다.

 

 

 

 

태조가 조성안 신덕왕후 능에서 태종이

거두어낸 석물은 오늘날 청계천 돌다리 광통교를

세울때 썼고 신덕왕후를 위해 지었던 흥천사는 없어

졌지만 그때 지은 흥천사에서 사용되었던 흥천사 종은

 덕수궁에 돌아와 광명문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 조선왕조 제7대 임금의 손자로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월산대군이

8대 예종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이야 어찌되었던 성종에게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 월산대군은

많은 토지를 물려받는 등 실리를 취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고 대를 이어

 후손들이 이곳 정능 넓은 땅 넓은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선조대에 이르러

누구나 잘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궁궐은 불타고 마땅히 정사를 돌볼곳이 없었다. 그래서

행궁으로 자리잡은 곳이 이 월산대군의 집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이 행궁에서

즉위했다. 3년여 이곳에서 정사를 보던 광해군은

창덕궁이 완공되면서 1611년 10월 창덕궁으로 옮기고

정릉동행궁을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조선 역사상 왕 칭호를

못받은두 분중의 한분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폐위되고

인조가 이곳 경운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창덕궁으로 돌아가면서 오랜세월 별궁

경운궁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1897년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전포하고 덕수궁으로 들어가는 고종행차

 

 

 

그러던 경운궁에 고종이 돌아왔다.

창덕궁에서 명성황후를 일본인들에게 시행당하는

아픔을 겪으며 불안과 마음 둘곳 몰라하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면서 창덕궁으로는 다시 돌아 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1896년 2월의 아관파천이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을

 보내다가 경운궁을 찾았니다. 1897년 2월이었습니다. 경운궁은  구

러시아 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과 한

동네이고 회현동에 있던 독일공사관, 명동의 청나라 공사관,

남산의 일본공사관과도 모두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이곳이 안전하고 또 외교활등을

전개하기도 좋았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정궁으로의 면모를

 갖추어 간다. 정전인 중화전을 경복궁이나 창덕궁

처럼 2층으로 올리고 여러 전각을 지었으며 현대식 건물

석조전과 중명전을 지었다. 임금님들의 신위를 모시는 선원전,

 흥덕전, 흥화문을 세우는 등 원래 2만평이던 경운궁을 4만평으로 

늘렸다. 위에 보는 사진이 덕수궁이 불타기전의 사진이다. 고종이

경운궁에서 집무하던 1902년의 사진이라고 알려진 경운궁에는

 중층으로 된중화전이 있고 왼쪽에 궁의 관리들이 사는

집을 볼 수 있다. 아래 정동과 함께 쵤영된

사진에서도 중화전은 2층이다.

 

 

 

 

이 중화전이 2004년 불에 타 버렸다.

 원인이 뭐라고 발표되었건 간에 일본의 행위라고

의심받기에 충분했고 고종을 비롯해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허둥지둥 피신했지만  경운궁의 아픈 역사와  우리민족의 비운은

깊어만 갔다. 중화전, 함녕전을 비롯해서 고종이 힘을 기울여 축조한

주요 전각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중명전등에서 집무를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은 계속되고 2년여에 걸쳐 급히 중화전, 함녕전이 준공되었지만

옛날의 모습은 아니었다. 중층의 중화전은 단층으로 바뀌었고,

-자로 되어 있었던 함녕전은 ㄱ자로 오늘까지 전해 온다.

 

 

 

중   화   전

 

 

1904년 재화재로 원래의 중화전이 불타고 오늘의 중화전을 세웠다,

 

 

 

 

 

6.25때 파괴된 중화전

 

 

 

 

함   녕   전

 

 

 

 

1899년 6월 8일 독일 황태자 하인리히가

고종황제의 초청을 받고 함녕전을 방문했을때의 사진

으로 불타기전의 함녕전이고 황태자는 이곳에서  고종황제와

 오찬을 같이했다. 한.독 수교 125주년 수교기념 사진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이 함녕전은  1897년 창건되어 불탄후  중건해서 순종이 왕위에 

오른후 잠시 순종의 거처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계속 고종이 머물다가 1919년 승하하셨다.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20로 지정되었다.

 

 

 

 

 

석   어   당 

 

덕수궁의 주요 전각으로 석어당이 있다.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2층건물로 1904년 불탄후 중건된

건물이다. 석어당은 임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해서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이곳에 유패되었던

인목대비가 인조반정으로 정원군의 아들 인조가 즉위

하면서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 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하다.

 

 

 

 

 

덕   홍   전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우측(동쪽)에

자리한덕홍전은 편전(便殿)으로 사용한 건물입

니다.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된 함녕전과 나란히 남향으로

지어졌으며 정무를 맡아보던 곳입니다. 이 건물도

 1904년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다.

 

 

 

 

광   명   문

 

 

 

 

대한문으로 들어가 덕수궁을 걷다보면

광명문이 있다. 현재 이 광명문은 나홀로 건물

처럼 있고 그 안에 자격루와 신기 전기화차, 흥천사종이

있다. 자격루는 초등학교때부터 배운것이라 생략하고

 신기 전기화차, 흥천사종의 설명을 붙혔다. 

 

 

 

 

아래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때 광명문

전경사진에서 처럼. 이 광명문은 원래 함녕전의

 정문이었습니다. 1936년에서 38년 사이 석조전 서관을

증축할 때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인화문, 대안문, 대한문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인화문이었다.

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는것이 원칙이었지만 이미

민가가 들어 번잡하다는 등의 이유로 현재의 대한문

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어느때 어떤 이유로

바뀌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대한문은 원래 대안문이었지만

국호따라 대한문이 되었다. 원래부터 궁이 

아니었던 곳이라 그 앞이 좁고 민가들이 들어 서 있었지만 

전차길을 비롯한 도로가 나고 또 1926년 총독부나 경성부청 터를

 닦으며 길이 넓어져 민가들은 철거되고 덕수궁의 담도 뒤로

물러가고 담장의 모습도 때에 따라 바뀌었다. 

 

 

 

 

1968년 서울 시청 광장을 조성할 때

도로가 크게 바뀌면서 담은 물러가고 대한문은

그대로 있어서 이상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대한문은

결국 1970년 이전공사를 실시해서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1910년에 발행된 일본장서에 있는 대안문 시절의

행사 사진인데 설명이 없이 서울 구 황성의 정문이라고만

쓰여 있어서 내용은 나름대로 짐작이 가지만 내용을 쓸민큼

확하지는 않아서 차츰 내용을 쓸것이다.  사실 필자가 이런

글까지 쓰리라고는 생각치 않고책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복사 해놓은 것이어서 추후에 더 보왼 할 것이다.

 

 

돈     덕    전

 

 

 

 

 

돈덕전은 고종황제가 덕수궁안에 현대식 건물로

 세우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중요한 용도로 쓰였고

1907년 8월 27일 순종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엄격히 말하면 돈덕전 밖 돈덕전 입구다. 순종황제의 격을 낮추기

위해서 일본이 개입해서 돈덕전 밖에서 행한 것이다. 네덜란드에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밀사로 파견했던 해아밀사사건을 트집잡아 고종을 퇴위

 시키려고 꾸민 7월 20알 중화전 앞에서 거행한 가짜 즉위식이 있은지

40일 가까운 시일이 지나서다. 어찌되었던 돈덕전은 순종황제가

 즉위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돈덕전이  

언제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라졌다.

 

 

석    조    전

 

 

 

 

중화전 옆에 순 서양식 현대건물로 세워진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되어 1910년에 준공된 건물로

원래는 임금의 집무실 등으로 활용하기위해 심혈을 기울여 지은

건축물이었지만 이 건물이 준공될때는 이미 나라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조선왕조 마지막 비운을 담은 건축물이 되어 사실상

크게 활용되지 못하다가 1933년에 이 왕실의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미술관이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 거실,욕실 등으로 설계

되었고 앞면과 옆면에 현관이 있었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건축양식을 따른 석조전은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건축도 중요했지만 정원을 꾸미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아래는 미술관으로

 활용될때의 모습이다.

 

 

 

 

 

위는 석조전 뒤로 보이는 경성방송국

안테나이고 아래는 전시실 내부의 모습이다.

 

 

 

 

 

 

 

 

 해방된 나라를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나누어 점령하고 신탁통치 운운 하면서

이 나라 운명을 얘기하던 미, 소 공동위원회(1946년)가

열린 곳이기도 했고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992년부터 2004년까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국립 고궁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옮긴후 잠시 국립 근대미술관 으로 되었다.

지금은 옛날의 모습으로 되 돌리기 위한 공사를 진행하고 있어서 올해 말(2013년)에는

옛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서쪽에 지은 서관은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

으로 1936년 착공해서 38년 완공되어 본관과 함께 이왕직 박물관이 되었다.

8·15광복 후 동관의 부속건물로 사용되다가 1998년 12월에 개관되어

덕수궁 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덕수궁 뒷쪽 얘기를 한다.

야산으로 조용하기만 했던 경운궁 뒷면은

1,800년대 후반 새로운 외교가가 되어 미국, 영국,

러시아, 랑스 등 외국 공관이 들어서면서 모습이

바뀌어 갔다. 고종의 아관파천때 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이 들러싸여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작은 길이 있었다.

고종은 그 자리에 선원전을 짛고 조상들의 신을 모신

신성한 장소로 가꾸었다. 그러나 그마저

원인 모르게 불타버렸다.

 

 

준   명   당,  중   명   전

 

 

 

 

 

중명전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등극 하던

해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 서양식 건물로 처음 이름은

준명전(殿)이었다고 하지만 다른 얘기도 있어서 더 확인 보기로

 한다. 고종의 침전으로도 사용되었으나 상궁으로 사실상 고종의 계비 역할을

하면서 영친왕 이은을 낳은 엄비가 승하한 뒤 고종이 거처를 함녕전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고종이 거쳐하면서 외국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했으며 후에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이곳 준명당에 봉안하기도 했다.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잠시 개설하기도 한다.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되지만 같은해 6월 다시 지었다.

 

 

 

 

 

선    원    전

 

 

 

 

나라가 망하고 누구하나 돌보지 않다가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은 이곳에 큰 길을 내고

땅을 팔거나, 빌려주거나, 일본인 학교를 지었다. 일본인을

 위한 국민학교와 제일고녀, 그리고 미술학교 등을 세웠고 그 무렵,

영국성공회와 구세군본영, 방송국 등이 이곳에 세워졌습니다. 이로부터

 덕수궁 후면이 완전히 잘려나갔다. 이땅이 미국 소유가 되어 대사관을

 짛는다고 하다가 반대에 무딪혀 무산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지난날 써서 올린 글을  연결한다.

 

 

 

 

역사의 구비 구비마다 행궁으로

정궁으로 별궁으로 이어져 온 경운궁, 덕수궁은

불탔고 이 자리에서 나라 빼앗기는 도장을 찍으면서

슬픈 운명 속에서 조선왕조 마지막 왕, 그리고 대한제국

최초의 황제이자 마지막황제 고종황제는 여기에 유폐되었다가

의문의 세상 떠남을 가슴에 안아야했다.  그날의 경운궁이 아직

완전 복구되지 못한, 아니 영원히 복구 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을 찾고

사랑한다. 그 사연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또 대한민국을 잘 모른 사람도 이곳을 사랑하며

찾는 가운데 이제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기다리고 있다.

 

 

 

 

5대궁 글 보기

 

 

경복궁 역사 600년 수난사와 오늘 그리고 광화문

http://blog.daum.net/jc21th/17781718

 

세계 문화유산 창덕궁 사적 122호

http://blog.daum.net/jc21th/17781550

 

창경원과 창경궁 사적 123호 그 역사적의미를 되새기며

http://blog.daum.net/jc21th/17781500

 

덕수궁 역사 비운의 경운궁

http://blog.daum.net/jc21th/17781713

 

경희궁(경덕궁),

http://blog.daum.net/jc21th/17781716

 

 

 

덕수궁 관련 글 보기

 

 

역사의 현장 원구단과 조선호텔, 황궁우

http://blog.daum.net/jc21th/17780571

 

고종의 아관파천과 덕수궁, 대한제국과 원구단 (환구단) 황궁우

http://blog.daum.net/jc21th/17781701

 

돈덕전 순종즉위 1910년 일본 장서 소개 사진과 돈덕전이 헐린 역사의 진실

http://blog.daum.net/jc21th/17781825

 

서울정동, 조선 말기 외교의 중심, 개방의 원적지, 경성방송국

http://blog.daum.net/jc21th/17781699

 

조상의 얼이 새겨진 옛 정능의 청계천 돌다리 광통교

http://blog.daum.net/jc21th/17780572

 

cbs사우회 눈내리는 덕수궁과 정동 길

http://blog.daum.net/jc21th/17781533

 

 

 

 

고종황제의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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