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세계유산

한양도성 역사탐방 (10) 동대문(흥인지문), 청계천, 광희문 구간

이장춘 2013. 9. 12. 18:21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고 9월부터

연합군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때 그 시가행진

모습과 함께 촬영한 흥인지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

불리는 흥인지문은 대한민국 보물 1호이고 우리나라에서

제일먼저 전차가 통과한 문이며 동대문 차고가 마련된

 곳이기도 하다. 낙산에서 뻗어 내린 한양도성은

청계천의 오간수문 위를 지나 광희문을

 거쳐 남산으로 오른다.  

   

 

 

 

한양도성 역사탐방 (10) 동대문(흥인지문), 청계천, 광희문 구간

 

 

 

 

사람이 항상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도리 (5상)

 인의예지신 仁義禮智信의 첫 번째 글자 "인"이 들어간 이름

이다. "의"자가 들어간 돈의문 (서대문), "례"자가 들어간 숭례문

 (남대문), 원래 북대문은 "지"자를 넣어 홍지문이라고 했지만 백성들이

아는 것을 꺼려한 유학자들의 반대로 개혁을 뜻하는 "정"자를 넣어 숙정문이

 되었다. "신"자는 4대문의 정 중앙 보신각에 있다. 이름에 특별히 지자를  넣은것은

흥인지문 앞은 평평한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의미라고 한다. 1453년(단종 1년)

 중수 된 것을 1869년(고종 6년)에 개축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다른

 성문과는 달리 성문 앞에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두른 것도

이때 조성된 것이다. 아래 사진은 아직 개발되기 전의

동대문과 그 주변의 모습이다. 

 

 

 

 

 

 이 사진에서 앞부분에 개방된 전차의 모습이

보인다.   뒷 부분의 전차를 타고 다닌적은 있지만

 앞 부분의 이런 모습의 전차는 못 보았다. 서울에서 사신

 80대 이상 되신들에게는 옛 추억을 떠 올리게 한 사진들이다.

 아래는 동대문의 오른쪽으로 성곽은 보이지 않지만 1891년에

창건되었다는동대문교회와 그 부속건물들이 있고 동대문 잔차

관리소가 있다. 해방되던때 촬영한 사진이라고 하는데

 그때 동대문 부근에 이토록 큰 버스들이 많이

 다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 병원 자리에는

디자인 지원센터라고 하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섰다.

그 옆에는 동대문교회가 낙신을 오르내리는 성곽에 둘러 싸여있고

그 앞에는 쉼터 8각정이 있으며  그 앞으로 이화동으로 통하느 큰 도로가

나 있다.  낙산에서 성곽따라 내려오다 보니 벽면에 큰 글자로 ◆동대문 

성곽박물관◆,   ◆동대문 성곽공원◆ 이라고 쓰여 있어서 성곽박물관이

 따로 있는 줄 알고 이리 저리 돌아 보았지만  교회만 있을뿐이다.

낙산의  성곽이 바로 동대문 성곽 공원, 박물관이다.

 

 

 

     

 

 

 

낙산공원에서 성곽따라 내려오다가

동대문 부근의 모습을 담았다. 높이 솟은 빌딩은

청계천 건너 평화시장 뒤 옛 덕수 상업고등학교 터에 지은

두산 타워다. 이 부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가 보다

 

 

 

 

   

  

  

 

홍예천정 용무늬 그림.

 

 

 

 

동대문과 전차 왼쪽에 전차표 판매소가 있다.

 

 

 

기로회가 열리는 숭례문 밖 난지부근

 홍사효의 집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1629년

 이기룡이 그린 남지기로회도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동대문 박 풍경 엽서 동대문을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으로 뒷쪽에 동대문이 보인다.

 

 

 

  

동대문 성곽에서 동쪽을 보고 촬영한

사진이다. 1904년에 촬영한 사진이라고 한다.

때는 동대문 밖이 대부분 초가로 형성되어 었는

 모습이다. 어린 아이들이 사진 촬영하는 모습이 신기한듯

 쳐다보고 있다. 아래는 1945년 미군이 진주하면서

항공촬영한 사진이다. 동대문 부근이 비교적

 선명하게 나와 있어서 대강은

지리적 집작이 된다.

 

1. 동대문

2. 전차차고, 3. 동대문 시장,

4. 오간수교, 5. 청계천, 6. 지금의 평화시장,

7.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동대문 운동장), 8. 지금의 두산타워

9. 동대문 교회 라고 생각한다. 잘 못이 있으면 수정 할 것이다.

역사 박물관 역 3번출구에서 광희문이 바로 옆에 보이고

그 위에는개인주택들이 있어서 성은 보이지 않다가

 장충체육관 부근에서 남산까지 성이 이어진다.

 

 

 

 

오간수교와 청계천

 

 

 

 

위 사진에서 보듯이 한양도성은 오간수교를

통해서 청계천을 건넌다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어서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된구멍을 만들었고, 그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해서 성벽 안쪽으로 길고 큰 돌을 연결한

 다리다.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사람들의 통로로 이용되기도 했고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곳으로 나갔다.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한다면서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리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면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청계천에 물줄기를 다시 만들면서 옆으로 옛 오간수교

모양을 만들어 물이 흐를 수 있게 해 놓아서 옛 모습은

 아니어도 그 모습을 짐작 할 수는 있다.

 

 

 

 

 

오간수교 아래 1760년 영조가 개천준설에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내린 글이 있다.「굴천 역사를

끝낸 것은 경들이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내가 듣건대 후한

광무제가 말하기를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 라고 하였다」

준설공사 때 파낸 모래 흙더미를 오간수교 부근에서 양 옆으로

길게 쌓아 작은 산이 만들어 졌는데 이것으로 해서 조산동,

芳山洞 (1914년)이나 방산시장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청계천은 인왕산, 북악산 등 한양 서북쪽에서

흘러내린 물을 한강으로 내 보낸다.

 

 

 

 

서울 도심의 한복판으로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를 이루는 청계천은 원래 자연천으로

 되어 있었지만 태종 때부터 시작된 치수사업은 영조 때에

이르러 물줄기를 바로잡고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벌려 개천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오늘에 사용되는 청계천의

이름이 쓰였고 1958년부터 복개를 했다가 헐어내고 지금의

청계천 물줄기를 만들어 물고기가 자라고

시민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

 

 

 

조선시대 청계천

 

 

 

 

1950년대 60년대 청계천 판자집이다.

필자는 저 판자집 2층에서 4개월을 살았고 그 부근

동대문에서 광나루로가는 전차길 가에서1년을 살았다. 시골

에서 무원을 동경하던 시절이라 총무처 공무원 시험을 보아

처음으로 서울에 왔지만 봉급은 말이 아니어서 쌀 한가마니에 3,000원, 

한달 하숙비 3,000원 하던 시절에 첫 봉급 3,931원을 받고보니 생활이

막막했다. 거기다가 동생이 서울 덕수중학교 시험에 합격해서

같이 있어야 했으니 부득이 방이 필요했다.

 

동대문 운동장 맞은편에 있었던

덕수중학교도 가깝고, 또 걸어서 남산까지 통근

할 곳을 수입수준에 맞추어 찾다보니 청계천 판잣집 밖에는

없었다.   1,600원을 주고 넉달을 살기로 했다. 2층 방 한칸 안에

연탄난로 놓고 땔 연탄 들여놓고 밥그릇이며 반찬 들여놓고 나면 두사람

누울 수 있는 틈도 잘 나오지 않았지만 여기서 생활하며 쭈그리고 잠을 자며

살았다. 먹는 반찬이지만 코로 하루 종일 맡는 냄새는 지긋 지긋했다. 화장실은

어떠했는가? 상상에 맡긴다. 4개월이 지나고 1년에 7,000원을 주기로 하고 그 부근

판잣집 1층으로 옮겼다. 작으나마 부엌이 따로 있어서 2층 판잣집보다 나았지만 동대문

에서 광나루로 다니는 전동차 길에 접해 있어서 잡을 깨는 일이 많았다.  이곳에서 남산

방송국까지 빠른 걸음으로 40분정도 걸린다. 버스요금 5원, 전차요금 2원 50전이었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아 날마다 걸어서 출퇴근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어렵게 살았고

 그래도 공무원들이 생활하기가 좀 나았다고는 해도 대한민국 국가공무원의

생활이 이랬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몇번이고 망설이다 이 글을 쓴다.

 

세월이 지나면서 급수도 오르고 봉급도 오르다보니

 1969년 행정주사 한달 봉급 25,000원이 되었다. 이 기간 6년 동안

물가가 세배나 뛰어 공무원들의 생활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필자는

방송국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민영방송이 생기면서 민영방송과 너무 큰 보수격차를

줄이기 위해 방송수당 8,000원과 연구수당 7,000원을 받아서 모두 합하면 40,000원이

 되었다. 그런대로 생활 할 수 있는 보수였지만 일반 공무원들은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필자는 늘 생각한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이어서 이나라 공무원들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였다. 그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가? 아들 딸 먹여 살리려다 보니

봉급만 가지고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는가? 그런가운데 말 못할,

또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사연들이 얽히고 설 켰다.

 

 

  

청계천 4가에 있던 천일극장 뒷편이 보인다.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판자촌, 움막을 철거하던때

 

 

 

복개된 도로위로 건설된 청계천 고가도로

 

 

 

 

오늘의 청계천

 

 

 

 

 

 

 

 

 

동대문 운동장

 

 

동대문에서 청계천 오관수문을 지나가던

한양도성이 1926년 경성운동장을 만들면서 훼손되었다.

해방되면서 행정구역 경성이 서울로 바뀌면서 서울운동장이

 되었다가  88올림픽을 앞두고 잠실둔동장이 개설되면서 1984년

동대문  운동장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동대문 역사 문화공원

조성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본 공원이 문을 열면

그 안의 성곽과 이간수문도  볼 수 있을것이다.

 

 

 

 

멀리, 가까이에서 본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그동안 공사를 진행하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2014년 3월 21일 개관했다. 

 

 

 

 

 

 

 

 

한양도성 역사탐방 글 더 보기

 

 

한양도성 역사탐방 종합 44편, (조선조 5대궁 5편, 관련 글 28편포함)  

http://blog.daum.net/jc21th/17781866

 

한양도성 역사탐방 (9) 낙산 길,

http://blog.daum.net/jc21th/17781859

 

 한양도성 역사탐방 (8) 혜화문 (동소문) - 숙정문(북대문) 구간

http://blog.daum.net/jc21th/17781856

 

한양도성 역사탐방 (7) 숙정문 북대문 청운대 말바위

http://blog.daum.net/jc21th/17781855

 

한양도성 역사탐방 (6) 창의문 자하문 백악마루 북악산 정상

http://blog.daum.net/jc21th/17781850

 

한양도성 역사탐방 (5) 인왕산 길 두 번째  

http://blog.daum.net/jc21th/17781848

 

한양도성 역사탐방 (4) 인왕산 선바위(禪岩) 국사당(國師堂)

http://blog.daum.net/jc21th/17781843

  

한양도성 역사탐방 (3) 돈의문 서대문 독립문

http://blog.daum.net/jc21th/17781835

 

한양도성 역사탐방 (2) 정동길, 서소문길

http://blog.daum.net/jc21th/17781831

 

한양도성 역사탐방 (1) 숭례문(남대문)에서 남산성곽 따라, 사적 제 10호

http://blog.daum.net/jc21th/17781821

 

 

 

한양도성 안의 5대궁

 

 

경복궁 역사 600년 수난사와 오늘 그리고 광화문

http://blog.daum.net/jc21th/17781718

 

 건청궁과 향원정

http://blog.daum.net/jc21th/17781872

 

건청궁 명성황(왕)후의 최후 이토 히로부미 을미사변 을사조약 한일합방

http://blog.daum.net/jc21th/17781829

 

세계 문화유산 창덕궁 사적 122호

http://blog.daum.net/jc21th/17781550

 

창경원과 창경궁 사적 123호 그 역사적의미를 되새기며

http://blog.daum.net/jc21th/17781500

 

덕수궁 600년역사 

http://blog.daum.net/jc21th/17781857

 

경희궁(경덕궁), 조선왕조 5대궁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http://blog.daum.net/jc21th/17781716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사적 제 257호

http://blog.daum.net/jc21th/17781878

 

조상의 얼이 새겨진 옛 정능의 청계천 돌다리 광통교

http://blog.daum.net/jc21th/17780572

 

청계천 돌다리의 옛 사진과 사연들을 모아

http://blog.daum.net/jc21th/17780573

 

 

 

유경환 여사님이 남긴 글

 

 

이제껏 그저 4대문의 이름이라고만 알았을 뿐,

생각없이 지났는데, 4대문의 이름 속에 仁 義 禮 知 에다

 보신각의 信까지가 다 들어가있군요. 제가 고교시절 수학여행  때

처음으로 서울에 왔었는데,  청계천은 이미 복개가 된 상태였던 것 같고,

동대문까지 다니는 딸랑딸랑 전차는 있었던 것 같군요. 청계천의 판자촌

 아래에 움막이라는 기막힌 주거형태가 있었군요.  그래도 세월따라 발전

되어 오늘의 청계천이 되었고, 도도히 흘러온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곳곳을 둘러보며, 많은 공부를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록들이   어느 싯점엔가에서든 값진

 자료로 쓰여지리라 여겨집니다.

 

 

경성방송국에서 어린이 음악을 지도 하셨던

유기흥 선생님 글 한토막을 올렸습니다,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동쪽어른 듭신다. 서울 구경 오셨다.

 

서서 서대문 서대문을 열어라

서쪽어른 듭신다. 서울 구경 오셨다.

 

홍띠 들띠 메시고 서울 오셨다.  

홍띠 들띠 메시고 시골손님 구경 오셨다.

기웃 기웃 저 아기 뉘 집 구경 오셨나

 

이 동요는 1930년대 목일신 (睦一信) 이란분이

지은 동요로 기억되는데 나에게는 잊을 수없는 노래이다.

홍띠 들 띠라는 말도 지금은 별로 듣지 못하거니와 그런 띠도

구경 할 수 없다. 이것은 그 당시 어린 아기가 입던 한복에 매던 띠였다.

1933년 나는 당시 녹성동요회 어린이들을 이끌고 음악에 열중하고 있는데

일본인 방송 검열관으로부터 목일신 작사의 서울구경의 서울표기를

 앞으로는 경성으로 고쳐 부르라는 주의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원작대로 부르게 했다 그러자 재차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유기흥 선생님 글 보기 영문자 클릭

 

동요 작곡가 유기흥의 경성방송국 (JODK) 방송 회고담 녹성동요회

http://blog.daum.net/jc21th/17780805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⑥냼(1).wma

 

?⑥냼(1).wma
2.5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