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단상

짜장면(자장면) 보릿고개에 얽힌 추억 1960년대 춘천방송국시절

이장춘 2013. 4. 8. 15:56

 

 

 

올해 85세가 된 김영우 방송선배를

 만나면 “그때 그 춘천방송국 시절 짜장면

있지 않니? 점심 때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던

그 짜장면! 그 짜장면을 먹던 추억을 쓰란 말이야."

 

 

짜장면(자장면) 보릿고개에 얽힌 추억 춘천방송국시절

 

 

인터넷을 잘 모르는 김선배지만 필자가

 인터넷에 글을 쓴다는 소문을 듣고 그 얘기를

쓰라는 것이다. 방송에 관한 객관적인 얘기만 쓰려는

것이 그때 필자의 생각이어서 안 쓴다고 했다. 그랬더니

만날 때마다 그 말씀을 하신다. 생각해보니 필자 개인적인

얘기라기보다는 그 시대에 삶의 얘기를 쓰는 것이어서

굳이 안 쓴다는 얘길 더하기도 안되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긴다.

 

짜장면을 워낙 좋아했던 필자는

 짜장면을 드는 것이 싫지 않았지만 김 선배는

 돈이 없어 짜장면을 먹는 것이 너무나 지긋 지긋하고

서글펐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때는 제일 싼 음식이 짜장면이었고

 그 이상의 음식을 먹고 지내기는 형편이 안 되어 짜장면을 먹지 않으면

안 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또 쌀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일주일에 점심 두 끼는

의무적으로 분식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원조 덕분에 그래도 밀가루는

먹고 살 수 있는 시절이 되어 분식을 장려했다. 그때는 의무적으로 혼식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도시락을 검사해서 잡곡 섞이지 않은 빕을 싸온 아이는

 기합을 받았는가 하면 직장에 도시락을 싸오는 경우에는  당연히 잡곡이 섞인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먹어야 했던 때라 짜장면을 먹는것은

 국가시책에 호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던 호주머니 사정따라

 짜장면 이상의 고급음식은 호주머니 돈 내서

 사먹을 형편이 아니었다. 혹시 돈 있는 분에게서 대접을

받는 경우 외에는...... 1963년 필자가 공무원신분으로 방송국에

 들어 왔을 때 첫 봉급 3,931원을 받았고 쌀 한가마니에 3,000원,

한 달 하숙비 3,000원이었으니 한 달 하숙비 지불하고 나면

남는 돈이라고는 교통비도 모자라 부모님

 신세를 져야 했던 시절이었다.

 

필자가 춘천에 간 것은 1964년의 일이고

 김 선배는 1965년에 만났으니 그때도 형편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춘천시내 한복판 옥천동에 자리하고 있던

춘천방송국 앞에 “대륙원”이라는 중국집이 있었고 조금 떨어져

 “취영루”라는 집이 있었다. 중국집이 더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두 집

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점심때면 단골로 찾던 집이다. 짜장면 한그릇에

 30원? 이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것이 제일 싼 음식이었다. 짜장면을

워낙 좋아했던 필자는 한그릇을 치우는데 40초면 끝났다. 다 먹고나서

김선배가 식사하는 모습을 한참동안 구경을 하며 앉아있어야 했다. 

이제 와 생각 해 보니 어쩔 수 없이 먹을 수 밖에 없었던

 짜장면이 내키지 않아 식사시간이 길었던가 보다.

 

필자는 김선배가 짜장면을 쓰라는 이유를

 잘 몰랐다. 필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드는 음식이어서

 별 생각이 없어서 짜장면에 관한 글을 쓰라는 말 끝에 짜장면의

 아름다은 추억을 얘기 했더니 반응이 나와는 다르다. “그 짜장면 먹고

 싶어서 먹었니? 마지못해서 먹은 것이지....” 그제서야 김선배의 그때 그

마음을 알았다. 그 김선배는 서울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 귀엽게 자라서

서울대학교를 나오고 군 장교생활을 했기에 별 고생을 하지 않다가 박봉

생활이 지긋 지긋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날이면

날마다 그 짜장면을 들어야 했으니 그때는 잘 몰랐지만

 이제와서 생각건대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시골에서 태어나 김 선배와는

 너무 다른 세상을 살았다. 필자가 6.25때의 생활에

 대해서 조금의 글을 쓴 적이 있다. 필자가 어려서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 시대 그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봄이 돌아오면 시골의 대부분의 농가에서 곡식이

 떨어진다.  쌀은 더 다시 말할 것 없고 먹을거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곡식이

되었던 감자, 고구마가 되었건 먹고 살 것을 구해야 한다. 그때 보리를 구하면 4개월이나

 5개월 후 보리가 나와서 그 빚을 갚을 때 1.5배를 주어야 한다. 그렇게라도 구하면

다행이다. 쌀은 엄두도 못낸다. 병이라도 걸려 쌀 죽 한 끼라도 쑤어 먹으려고

 쌀을 빌리면 쌀 두되에 보리수확 때 보리 한말을 주어야 한다.

 

보리 수확 때가 되어 수확을 해도 그갚고 나면

 먹고 살 곡식이 또 없어진다. 보리라도 또 얻어야 먹고 살 수 있다.

 이때 보리 한말을 빌리면 쌀 수확을 해서 쌀 한말을 주어야 한다. 농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쌀이 나오는 가을철에서 다음 보리가

나올 때까지 기간이 길고 길어서 곡식이 다 떨어지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래서 그것을

가르켜 “보릿고개“라고 했다. 한번 가난은 영원한 가난이었다. 이 나라 농민이 70%,

80%였을때 많은 농민들은 이렇게 생활을 이어갔다. 어려서 어른들이 “이찌와리”,

“니와리” 하며 일본말을 섞어가며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 돈이나 물건을 빌리면

 10%나 20%의 이자를 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 달에 그렇다는 것이다.

10%씩이면 5개월 만에 50%이고 20%면 배를 주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돈을 빌리고 먹을 것을 빌려야 했다.

이런 연속적인 생활 속에서 가난은 타고

 날 수밖에 없었다.

 

“피죽도 못 먹는다는 말이 있었다”

피죽을 먹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  필자는

 그 피죽을 먹어본 적이 있다. 피는 벼이삭이 올라올 때

미쳐 솎아내지 못한 피라는 풀이 자라 벼에 섞여 있다가 피어나고

그것이 익으면 피만 훑어다가 껍질을 대강 벗겨 갈아서 죽을 쑤는 것을 말한다.

먹기에 큰 불편은 없지만 그렇게 하기까지가 어렵다. 보리밥, 꽁보리밥이라고 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서 먹지만 그 꽁보리밥을 배채우기 위해서 먹었다. 도구통에서 보리

껍질을 대강 벗기고 학독에 갈아 밥을 해서 먹는다. 거무뒤티한 밥, 그래도 맛이있고  배불리

 먹으면 좋았지만 그 꽁 보리밥인들 배불리 먹기 힘들었다. 배 두들겨가며 배불리 밥 한번 먹어

보는것이 최대의 소원이었다. 지금 필자는 그 보리밥을 싫어한다. 그때 그 없이살던 생각

때문이다. 아내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혼식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도 싫다.  

 지금은 감자나 고구마가 쌀 보다 더 비싸다. 옛날에는 먹고살기 어려우면 감자나

 고구마를 먹었다. 그것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것이 여간 어려웠지만 그렇게

라도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콩비지라는 것이 있다. 지금은 콩을

통째 갈아서 맛있게 만든 음식을 콩비지라고 한다.

원래 콩비지는 그것이 아니다.

 

콩을 불려 멧돌로 갈아서 보자기에 넣고

 짜면 물이 나오고 그 콩물에 간수를 넣어 두부를 만든다.

그때 보자기에 남은 찌꺼기가 콩비지다. 아무 영양가도 없지만

 그것도 구해 먹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쌀겨로 개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지금은 벼를 현미로 만들어 그 현미 겨를 베껴낸 후 쌀이 나오지만

예전에는 벼를 기계에 넣어 쌀이 될 때까지 깎아냈다. 그러다 보면

일정부분 깎아낸 뒤에 나온 겨는 거칠기는 해도 쌀가루가

섞여있다. 이것으로 개떡을 만들어 먹었다. 먹기가

불편했지만 살기 위해서 먹어야 했다.

 

나물을 많이 먹어야 했다.

지금이야 영양식으로 먹지만 그 시절에는

 식량을 적게 먹기 위해서 가급적 나물을 많이 먹었다.

 때로는 밥에 넣어 밥 량을 늘렸다.  소나무에서 배껴내는

속살 껍질 생키라는 것이 있다. 소나무 두꺼운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이 나오면 그것을 벗겨다가 곡식과 함께 석거나 말려 가루를

 만들어 음식에 넣어 먹기도 하고 떡도 해 먹는다.

곡식을 적게 먹기 위해서였다.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얘기해서 뭐 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의 생애에 있었던 일이라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삶의 얘기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두 꿈 같은 얘기다

 얘기가 너무 길어져 오늘은 이만 줄인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2013.04.09 04:05에 올린글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역시 국장님의

젊으신 모습은 사진에서 설명 없이도 알아 뵐

수가 있군요. 저도 많은 실감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입학하던 해(1958年)에 을 처음 먹어보았

는데,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김 영우

어르신께서는 이해를 못하시겠지만요.

 

┗ 이장춘 이장춘 Y 2013.04.09 04:34

 

어두운데 세벽길에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그때는 학생들이 중국집에

가는것도 금지했어요.극장, 다방, 중국집 선생님들의

감사눈초리가 심했어요.중국집을 지나가다가 짜장면냄새가

 나면 그리도 먹고 싶었던지요. 지금도 자동차 타고 가다가

손짜장 하는 집이 있으면 그것 먹으러 간답니다. 명동에

동해루가 있었어요.어느날 가 보니 이민을 갔다던데

사연이 많습니다.짜장면 한그릇 대접 해야겠

네요. 고맙습니다.행복하셔요.

 

 

유카리나 Y 2013.04.12 11:56

 

 

옛날 어느 시골의 가난한 선비가 집안

경제는 아랑곶하지 않고 밤낮으로 공부만하니

 부인이 늘 남의 논에서 피를 훑어다가 살림을 꾸리다

 못해, 지쳐서 집을 나가 개가를 했답니다. 세월이 흘러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얻어 가마를 타고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인이 논에서 피를 훑고있는데, 모습이

낯익어서 저 여인을 고개를 들고 좀 보자고하여 보았더니,

자기를 버리고 집을 나간 바로 그 여인이 예나

지금이나 피를 훑고있더랍니다.

 

┗ 이장춘  Y 2013.04.12 16:46 

 

 좋은 옛 얘기를 알았습니다.

 

 

이혜지(이기인 보나)선생님 글

 

 

짜장면이야기에 가슴이 저려옵니다

 저는 아직 어려서인지 ㅎㅎㅎㅎ 먹고 싶을때

 먹는것이 짜짱면이라 생각하고 있고 그 짜장면은

 무슨 마력이 있기에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짜장면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옛날 박봉에 점심식사가 쉬운일은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국장님의 보릿고개도 만만치

않으셨네요 저희는 보릿고개 시절이 아니라 실감할수 없지만

 살면서 들어 본 보릿고개 흐릿한 추억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수 있습니다

 

 

신박사  2013.04.09 12:28

 

 

 좋은 작품에 감하고 갑니다

꽃샘추위가 시샘을해도 봄은 연초록

 잎으로 짙어만 갑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고

좋은일만 있으시길 바랍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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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춘천방송총국을 되돌아보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0968

 

KBS 춘천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1 )

http://blog.daum.net/jc21th/17780328

 

KBS 춘천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2 

http://blog.daum.net/jc21th/17780329

 

사진으로 본 KBS 춘천방송총국 역사

http://blog.daum.net/jc21th/17780330

 

춘천, 경춘 철길의 추억, 소양강 다목적댐

 http://blog.daum.net/jc21th/17781734

 

소양강의 추억을 더듬어 찾아간 소양강 처녀상과 반야월 

http://blog.daum.net/jc21th/17781363

 

 

 

 

 

1960년대 70년대 방송활동 하신

박재윤님의 아들 박진호님이 미국에 살면서

댓글로 긴 글을 남기셨기에 옮겼습니다.

 

아저씨!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제가 이곳 미국에 이민온지도 햇수로 9년이

넘었네요. 이민의 삶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보니 마음처럼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하게 되네요. 미국 경제도 불황이 꽤 오래

가네요. 만 4년이상 경기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이제는

 더 나빠지지 않기만 바랄뿐입니다.^^

 

 "짜장면"에 얽힌 어저씨의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고 코끝이

 찡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도 나고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도 점심 도시락 검사 시간이 있었는데... 보리가 40%이상

섞여 있지 안으면 선생님한테 굉장히 혼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kbs은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30원짜리 짜장면을 드시던

 아저씨와 같은 존경하고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부모님세대들

덕분임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꼭 명심하고 기억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씨! 다시한번 귀한 추억의 글

감사드리고 늘 주님 은혜 가운데 평안하시고

강건하시길 빕니다.* 글에 나오신 김영우 아저씨가

제 기억이 맞다면 저희 아버님도 잘 아시는, 예전에 79년,

80년경 kbs에서 미술부장을 하시던 분이 아니신지 모르겠

네요. 아마도 그당시에 저희 아버님이 연수원 교수나

교육국 문화교육부장을 하시던 시절이라

기억되네요. 암튼 넘 반갑네요.^^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박재윤, 박진호님 님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1357

 

 

답글 이장춘 Y 2013.04.19 02:50

 

그시절 그렇게 살았습니다.

요즈음 세계적인 불경기가 꽤 오래

 계속되는 군요. 어려움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래도 앞을 향해서 정진 하셔야지요. 꼭 좋은

 날이 오기를 빕니다. 김영우 선배! 그 분

맞으시고 1957년부터 근무하신

올해 85세가 되셨습니다.

 

추신:

 

지난 3월 KBS 해킹으로

주소가 모두 날아가 버렸어요.

다시한번 보내주세요. 즐겁고 행복 하세요.

이 글 본문에 옮겨 놓을게요.

 

 

  1965년 12월 제3공화국 수립 공로표창을 전수하고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그때 공보부장관의 감사패를 전달받은 조대진 춘천문화원장과 인근 군부대장이 함께

 했습니다. 왼쪽부터 필자 이장춘, 김영우, 최학수 방송과장, 조대진 문화원장 이은경

아나운서, 두사람 건너 한승은 춘천방송국장. 이용실 기술과장. 이범진 기자입니다.

 

 

1966년 전속가수를 선발하고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김영우선배, 최학수방송과장, 이용실기술과장, 윤병찬기자
정경래 아나운서, 필자 이장춘 등이 같이 하고 있습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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