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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표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스포츠기자 1호 마지막육성

이장춘 2012. 6. 1.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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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KBS기자로 방송계에

첫 진출한 이래 대한민국 1세대 스포츠

평론가로불리며 폭넓게 활동 하시던 조동표

선생님이31일 숙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조동표

선생님은 현재 사단법인 방우회 회원이십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일 오전

8시입니다. (02)3410-6901

 

 

 조동표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지금 들려오는 조동표 선생님 육성은

2012년 KBS TV창설 50년 스포츠특에서 방송한

내용으로 이 육성은 선생님이 마지막 남기신 공식 육성이

되셨습니다. 조동표님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KBS

방송기자 공개모집에서 채용되어 스포츠 기자 1호가 되고 그 후 오랜 세월,

방송과 신문에서 스포츠기자로 활약해서 스포츠기자의 대명사처럼 되었습니다.

올해로 88세가 되시기까지 늘 젊은 모습으로 활동하셨지만 금년들어 병환이

깊어져 오늘 (5월 31일) 세셍을 뜨셨습니다. 방우회 회원으로 활동하시다가

세상을 뜨신 조동표선생님이 일간스포츠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1983년

10월월간 방송지에 기고한 글한편을 옮겼습니다. 이 글 읽으시고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셔서 관련 내용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스포츠 50년, KBS TV 스포츠방송 50년

http://blog.daum.net/jc21th/17781089

 

 

KBS와는 두 번에 걸쳐 인연을 맺었었다.
 한번은 6.25동란 전, 한번은 동란 후……. 동란전인
 1949년 1월 KBS기자 모집공고가 나있어 응모하여 채용
되었다. 시험과목은 상식한가지, 당시 KBS는 대한민국 공보처
 서울 중앙방송국이었으니 필자는 공무원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샘이다.  
그때의 KBS청사는 두 곳에 있었다. 지금의 조선일보사 뒤편 원자력병원

자리로 이곳이 서울 중앙방송국의 본관이었고 하나는 지금은 어떻게

변모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덕수궁 북쪽 돌담길 끼고 있었던 분관.

 

 
 
시험은 본관 2층의 강당에서 치렀다.
아나운서와 기자를 모두 함께 모집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한 300명은 응시했던 것 같다. 시험문제는
그야말로 상식으로 바터무역이니 한천(寒天)이니 하는
 단어의 뜻을 쓰라는 것이어서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여겨 해답을 써 내려가다가 함씨(咸氏)라는 문제에
이르러 전연 그 뜻을 몰라 한참 머뭇거리다가
포기하고 뛰어나온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와 결과를 묻는 가족들에게
그럭저럭 보았다고 대답한 끝에 “함씨”를 쓰지
못했노라고 했더니 출가한 4촌 누이가 어째서 그곳에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조카란 뜻이 아닐까” 라는 조심스러운
 참견에 반신반의 하여 사전을 찾았더니 과연, 그런 뜻이라
옛 가정부인들의 박식에 놀랐던 것이다.
 
1차 시험의 합격통지를 받고 2차
면접시험을 받았다. 시험관은 서울 중앙방송국장인
 이관희씨였다. 이국장의 구한말 헤이그 밀사사건에 정사로 파견된
 이상설의사의 조카인지라 예의범절을 심히 따지는 이였던지, 이것저것
필자의 신상에 대해 묻다가 안행(雁行)이 몇 분이나 되는지 하고 묻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고개를 갸웃둥 했더니  나가시오
 하여 얼굴을 붉히고 나와 사촌 누이에게 전화로 물었더니
너 그것도 모르니 형제란 뜻이야 라는 대답에
한번 다시 얼굴을 붉혔던 것이다.
  
하여간 합격은 되었다.   2월초에
 사령장을 받았더니 임 서기 서울 중앙방송국
방송과 보도계 기자 근무를 명함 이었다. 근무처는
 덕수궁 북쪽 담과 맡 닿아있는 방송국 분관이었다.
말이 분관이지 KBS심장부가 이곳에 있었는데
이 분관에 올라가려면 두 길이 있었다.
 

 
하나는 지금의 경기여고 앞을 지나는
법원 쪽으로 오르는 언덕길을 오르다가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 하나는 지금의 원자력병원 (지금의 오양수산 자리에
원자력 병원이 있었습니다) 앞을 지나 덕수교회 옆 골목으로 꺾어져
샛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 그렇게 올라가면 지금의 덕수 국민학교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지하 1층(?) 이곳이 필자의 근무처인
보도계가 들어있는 방송국 분관이었다.
 
지하 1층에는 복잡한 방송국 송신기와
더불어 기술과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지금은
퇴임한 박경환 이사를 그곳에서 처음 만난 듯 한 기억이 난다.
1층에 방송과와 연출과가 있었으며 2층과 3층에 방송용 스튜디오와
국악실(국악 스튜디오)이 있었다. 방송과엔 방송계와 보도계 연출과엔
연출계와 음악계가 있었던 같으며 아나운서의 대선달(대先達)인
 지식인 민재호씨였고 연출과장은 송영호씨였다.
 
민 과장은 연희전문 문과출신, 학생시절부터
방송극본 제작에 풍부한 문재(文才)를 발휘하여 용돈에
 궁핍하지 않았다던 지성인이었으나 스포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1930년대 중반 연전 축구부의 메니져를 맡아 보았던

것이다. 민 과장은 출구부에 적을 두면서 심판 기술을 익혀 축구 연 보전

(延普戰), (延고戰)등 어려운 경기의 공식 심판을 맡아 볼 정도였으니 그는

스포츠에도 풍부한 식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민 씨였기에 아나운서가

되어서는 미개척분야인 스포츠 중계방송에 나서 보수적이었던 그의

세계에 신기원을 개척했던지라 그의 영명(令名)을 익히 알고 

 있던 터에 직접 조석으로 대하게 되니 20대 초반의 병아리

 기자로서는 방송과 근무에 가슴 설래임도 느꼈던 것이다.

 
 지척에서 본 민 과장은 체크무늬의 컴비를
멋있게 입은 가한이었다. 그의 방송이 하도 세련된
것이어서 스마트한 민 과장을 연상했던 것인데 실상 키는
중키였으나 커다란 혈색 좋은 얼굴에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옆으로 퍼진 위압감을 주는 거한이었던 것이다. 과장 책상 위에는

언제나 손때 묻은 한적(漢籍)이 있어 그의 교양이 다방면에 걸쳐 있다고

 감복했던 것인데 그가 황해도의 저명한 한학자의 자제라고 듣고 그랬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민 과장 밑의 보도계장은 조한긍씨.

성실한 선비의 선중거사였으며 훗날 춘천방송국장을 지낸

이였고 방송계장은 전인국씨 얼굴이 둥글둥글한

연전 출신의 복스러운 아나운서 출신이었다.
 
연전 재학 중에는 축구와 아이스하키의 
꼴 키퍼를 맡아 민 과장의 뒤를 이은 스포츠 아나운서였는데
 6.25동란 중에 납북되어 지금은 생사불명. 필자와 동기 기자는 모두
 8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선배는 5-6명, 그런 수로 보아  보도계의 규모는

크지 못했던 것 같다. 10수명의 기자 가운데 방송계에 끝끝내 종사한 이는

김인현선배 한 분 뿐으로 그는 어려웠던 50년대의 KBS시절을 거쳐 민방이 꽃을

피우게 되자 뒤에 MBC에 전신하여 보도국장, 주일 특파원을 거쳐 방송협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보도계 선배가운데 편용호, 김우용 양씨는  신문기자로

 전신하였다. 명 정치부기자로 자라난 편 선배는 신민당소속 국회의원으로

활약타가 작고했고 김우용 선배는 종군기자로 이름을 떨치다

서울 신문의 명 사회부장으로 활약하다가 끝에

은퇴, 지금은 사업가로 성공했다. 

 

 
 
 KBS에서의 수습과정을
 동기 아나운서들과 함께 받았다. 강사는
 방송과 고문인 템플 이라는 미국인이었다. 그의 강의는
 영어로 진행 되었으며 통역은 민재호과장이 수고해 주었었다.
첫날 강의를 통역한 민 과장이 수강생인 병아리 기자 아나운서들에게

통역이 없었다면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었느냐고 묻자 내용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대개가 5-6할 정도 알아들을 수 있겠더라고 하는 가운데 유독 

“완전히 알아들었어요. 하고 자랑스러운 듯이 생글 생글 웃음을 띤 안경을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는데 이 여성, 그 뒤 얼마 있지 않다가

사라지더니 도미 유학 후 대성, 귀국하여 지금은

숙대 총장을 맡고 있단다.

 
그 무렵 연출과 음악계에 인상에 남는
두 분이 있었다. 한분은 음악계장 전영철씨. 이분은
 간송 전영필씨의 친 아우로 일본의 우에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정통 음악인이었는데 워낙 부유했던 집안출신이라 조선 양악인의
스폰서가 되다시피 여러 음악인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다 마지막에는
 낙백하여 음악계장이 되었노라고 자신의 처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멋쟁이였다. 음악계에는 장엄한 저택에 장치되면 어울리는 밤나무로 짠

 짙은 갈색의 레코드장이 벽을 가득 채우고 그 속에 희귀 레코드가

1만여 장 들어있었는데 전 계장은 그 장과 레코드를 가리키며

저것들 이전에는 모두 내 것이었어, 하고

 껄껄 자조하는 것이었다.

 
전 계장은 6.25전에 작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음악계의 또 한 이는 장사훈씨, 부지런한 음악 계원이었다.
전 계장은 국악파트에 관한한 특히 아악 등 정동 고전 국악 등에
 관해서는 장사훈씨에게 일임하는 것이었는데 장 씨는 국악을 통한
 방송의 위치향상을 위해 무척 힘을 기울이는 듯 한 인상을 필자에게
주었다. 훗날 그가 서울 음악대학 교수로 학구생활에 몰입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KBS정동 분관에서의 그의
바쁘던 모습이 생각났던 것이다.
 
 

 
 
당시 분관을 출입하던 연예인 가운데
특히 생각나는 이가 여가수 송민도씨이다. 송민도양은
49년 그해에 이화여고를 졸업, KBS를 통해 데뷔했는데 아직
머리가 자라지 않아 갈라 땄던 단발머리를 하나로 묶고 교복에
손을 본 스커트에 운동화를 신고 스튜디오에 나타나 노래 부르는 것이
 무척 청초해 보였다. 연출과에 출입하는 성우 가운데 제 1의 미녀는
 최은희였다. 물론 결혼 전이었지만 활짝 핀 얼굴이 무척 아름답게
 여겨졌던 것인데 그 최은희를 누나 누나하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꼬마 성우가 구민씨이다. 요즘 스튜디오에서 만나는 구씨의
 큰 몸집에서 옛 구민 어린이를 상상 할 수 없다.
 
보도계에서 병아리 기자의 오전중의 일과는
외신 옮겨 쓰기이다. 그 당시 두 개의 통신만이 배달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AP와 특약한 고려통신과 UP와 특약한
 대한통신이었다. 김인현 선배가 옮겨 쓸 통신을 골라 나누어 주며
 아나운서가 읽기 좋게 한자를 많이 섞어서 정자로 원고지에 경어 체에
 대화체로 옮겨 쓰라고 일러준다. 원고지 한매를 세로로 12자 1행
11행을 써서 매꾸는 옮겨 쓰기 작업은 건방지기 짝이 없는
 풋내기 기자들에게는 아무 감흥을 주지 않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 재미없는 작업의 하고 한 날 반복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하루는 윤용노라는
 아나운서가 12시 뉴스를 끝내고 원고를 들고 와서 항의한다.
외신 뉴스를 잘 못 써서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다. 원고를  보았더니

런던*일발 UP-고려로 적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려란 한자가 팬으로

 디자인해서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필적을 감정했더니 조낙기 풋내기가

 장난한 작품이었는데 조 병아리의 변은 매일 통신을 옮겨 쓰다
 보니 진력이 나 장난을 부린다는 것이 깜빡해서 통신사 명을
바꾸어 쓰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조계장에게 조낙기군이
 호되게 당한 것은 물론이다. 기자 동료 간에 잡담이 오가다가
화재가 스포츠에 이르자 필자가 온축 (蘊蓄)을 피력했다. 스스로는
 허약체질이라 스포츠라곤 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구경은 좋아해서
경기장엔 얼굴을 상당히 내민 것이다. 아는 체하고 떠들어댔더니
 4월의 어느 날 조계장이 불러 체육기자를 해보라고 권한다.
 
아니 할리 없다. 출입처를 가지면
외신 옮겨 쓰기도 면할 것 같아 흥락하자
서울 운동장 나들이로 매일을 보내게 되었다.
마침 한성 실업야구 연맹전이라는 것이 펼쳐지고 있었다.
 경성전기, 남선전기, 식산은행 등등 오늘날에는 찾아 볼 수 없는
 기업 팀들의 리그전이었는데 이것이 그 무렵에 국내 최고 수준의
야구경기였다. 어느 하루 어느 한경기의 경과를 자세히 보도했더니
 이 뉴스의 청취반응이 좋았던지 그 며칠 후 필자를 부른 민 과장은
저녁 9시 정기 뉴스가 끝나면 9시 10분부터 30분까지 20분간을
줄 터이니 스포츠로 매 꾸어 보라고 지시한다, 이것을 멋있게
소화 해 내면 자네는 한국 체육기자 1호가 되는걸 세…….
라는 격려를 들으며 실치 않는 길이라 별 어려움이
따르겠는가고 경솔하게 응낙했으나 20분이란
시간이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운동장에서 하루종일 취재하고 지친 몸으로
 정동에 올라와 20분의 원고를 작성 하자면 족히 한 시간은
 팔이 아프도록 써 갈겨야 하는 것이었다. 이 방송에 대한 체육계의
반응은 좋았다. 그 당시 신문이 카버하지 못하는 스포츠 뉴스를
기록성은 적다고 하나 KBS가 20분이란 긴 시간으로 충분 량을
 보도 해냈기 때문이다. 8.15후 48년의 정부 수립
때까지는 정치의 혼란기였다.
 
쉴 날 없이 벌어진 좌우 대립 양상에
국내의 신문이란 신문 모두가 정론지여서
어느 하나도 스포츠 보도 뉴스에 중점을 두지 않은
형편이었다. 따라서 그날 있었던 스포츠 행사 중 중요한 것을
골라 몇 건의 기록 소화가 고작인 판에 경기경과를 소상히 보도하는
KBS의 9시 10분 스포츠 뉴스는 스포츠 존재를 알리는 대에는 고맙기
이를 대 없는 매체였다. 이래서 23세의 풋내기가 운동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조기자, 조기자 하여 대회 임원들이 추겨 올리니 이 철없는 것의
기분이 고양되어 저녁식사를 거르고서라도 신바람이 나서
원고를 써 재키는 것이었다.
 
간혹 경기가 없어 20분을 매꾸기 힘들면
스포츠 대담도 방송했고 좌담회를 기획 방송하기도 했다.
대담의 상대로 고른 이 가운데는 만능 스포츠맨 이영민씨도 있었다.
필자는 그가 서울 운동장에서 야구 심판을 맡는 것을 보았던지라
 야구선수 출신인줄만 알았는데 육상 경기에서 단거리, 축구의
명수였다는 것을 듣고 놀랬던 것이며 일본 프로야구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으나 유억검씨의 만류로 국애에
머물렀다는 사실도 들었다.
 
아마 국내에 5인제 배구단이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보도한 사람은 아마 필자였으리라.
 8.15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서울 대방동의 모 미군부대에서
미군 장병들이 배구경기를 하는데 이것이 6인제 배구였다. 그 부대에

출입하던 업자에 윤 씨란 사람이 있어 이 사람이 럭비 선수인지라 체신부에

취직한 동창 배구선수들을 이끌고 미군 팀과의 대전을 주선한일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거행된 최초의 6인제 배구였을 텐데 그 배구 선수들이

 2-3년 후에는모두 우리 배구 계를 리드하는 배구협회의 주력

멤버가 되어 기자의 기획인 배구 좌담회에 응하려

 정동방송국을 찾아준 것이었다.

 
5-6명의 좌담회를 할 스튜디오가 없어서
보물급의 국악악기가 놓여져 있는 2층의 국악 스튜디오에서
배구 좌담회를 개최했다. 그 자리에는 박계조, 오광섭등 고인도
참석하여 활발히 배구계의 이 얘기 저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필자는 46년의 한미 비공식 경기를 쳐들어 6인제 배구를
 설명 해 달라고 했더니 박계조씨가 놀라는 눈빛을
하다다 6인제 배구를 설명 해 주는 것이었다.
 

 

필자가 6.25동란 전 KBS와 인연을 가졌던 것은
49년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간이었다. 고루한 가형들의
눈에는 방송국 기자라는 것이 직업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가형들은 필자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모 중등학교에 교사 자리를 구하여

 전직 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집안에서의 지위가 미비했던 필자는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전직하고 말았는데 6.25전 KBS에서 수개월간 체육기잘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30세 이후의 인생을 줄곧 체육기자로 일관하고 있다. 55년 늦가을 군에서

제대하여 한국일보사에서 마침 체육기자를 구하고 있어 다리를 놓아 구직운동을

 했더니 장기영 사주가 스포츠 룰 몇 가지를 묻고는 채용 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체육기자라는 것이 답답했다. 4면신문의 사회면(3면) 한쪽

구석에 스코어 멎자싣는 것이 당시 체육기자의 모두였다.

 

 시간이 남아 견딜수가 없다. 56년 2월의 어느 날

 정동의 방송국으로 놀러갔다. 여전히 방송과 밑의 보도계였으며

계장은 7년 전의 같은조한긍씨였고 옛 동료는 김인현선배와 49년 입사동기인

 한영섭군이 있을 뿐이었다. 다만 49년 조직과 다른 것은 외신반이 있어서

훗날 해외 공보관으로 활약한 윤태로, 박상진, 청와대 비서관으로

중책을 수행했던 한기욱 등이 텔레타이프를 통해 들어오는

외신을 번역 정리하고 있었다.  
 

 

 

 

덕수궁 담 밑의 분관은 폭격으로 불타 못쓰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종전의 본관에 스튜디오까지
가설해서 북적거리고 있었으니 그것도 6.25동란에 따르는
후유사태였던 것이다. 필자가 농 삼아 틈이 많이 나 방송국과
겸직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조계장이 서슴없이 겸무를 허락한다,
아나운서 출신의 방송과장 윤길구씨, 독일어 학자 방송국장 이운용씨에게
 인사하고 또다시 공보처의 서기가 되어 보도계를 출근했다. 이번에는 체육기사만

다루는 기자가 아니었다. 외무부도 공보처도 카버 하라는 지시에 녹음기를 매고

뛰어 다니느라 동란 전처럼 수월스런 생활은 아니었다. 방송국이 남산으로

이전했다. 시설이 호화로웠다.  남산방송국 개국기념 연주회장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은 난숙한 송민도 여사를 만났다. 오래간만의 만남이었는데

내가 기억에 있었던지 눈이 마주치자 끄떡 하는데

 무척 반갑게 여기는 눈치였다.

 

남산에서 주사로 승진했다가

 60년 4,19후의 여름에 사직, KBS와의
두 번째 인연을 끊고 한국일보에서의 체육기자
생활만을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올 들어 KBS라디오
 프로그램에 1주에 두 번 출연하게 되어 구민씨, 연출가 이상만

씨와 종종 스튜디오에서 만난다. 30여년전에 익혔던

 얼굴들인데 몇 번을 마주쳐도 다정한 이들이다.

 

KBS TV 50년 특집방송 스포츠 50년(2011년 12월 31일 오후 7시 10분)에

출연 하셔서두가지 중요한 증연을 해 주셨습니다. TV시대가 열렸을때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누구인가?

민재호 아나운서 그때의 그 방송 육성을 여기에 올렸습니다.

  

 

조  동  표,  1925년 서울출생,
언론인, 1949년 KBS기자, 스포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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