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림 데뷔작 장마루촌 이발사는 1958년 KBS가 당시로서는 50만환 (쌀 40가마니 값) 거금의 상금을 걸고 모집한 방송소설로 그해 정부수립 10주년인 광복절을 계기로 드라마작가 최요안님의 각본으로 10회에 걸처 방송 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였습니다. 6.25가 낳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면서 1959년과 1969년 두차례 걸쳐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던 작품입니다.
드라마 장마루촌 이발사와 윤회설 박서림
드라마 장마루촌 이발사는 소개 해 드린적이 있어서 윤회설에 관해서 간단히 올리겠습니다. 박서림작 정유일 연출 윤회설은 1975년 부처님 오신날 특집방송으로 방송되어 그해 EBU 구라파 방송연맹에 출품되고 1980년 방송대상 극본상을 수상했습니다. 한 부도덕한 사나이가 죽어 암소로 태어나 그 아들의 손에 도살되는 과정을 그린 불교의 윤회설에 근거한 작품이었습니다.
작가 박서림님은 작품해설에서 「서양인들이 기독교영향에서 살고 있는것처럼 동양인들은 유(儒) 불(佛) 도(道) 3교의 깊은 영향속에서 태어나고 생활하며 죽어간다. 특히 불교의 윤회설은 민간에게 깊이 뿌리박은 내세관이다. 중생의 영혼은 불멸이다.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 멸하는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차례로 여러 육체로 (인간이고 아기 축생이고를 막론하고) 끝없이 전전하며 다시 태어나는것이 윤회설이며 이 윤회는 수업을 쌓아 해탈을 얻을때까지 쉬지않고 계속된다는것이다. 이 작품은 이 사상을 바탕으로 한 우화(禹話)이다.」라고 했습니다.
[줄거리]
탐욕스럽고 부도덕한 한 사나이가 죽어서 소로 다시 태어났다. 그것도 암. 수가 뒤바뀌어 황소가 아닌 암소로..어쩔 수 없이 운명 지어진 암소의 생애를 통하여 그는 전생에 아내를 구박하고 한 처녀를 짓밟은 죄를 뼈저리게 뉘우친다. 송아지 때 그는 그를 극진히 사랑해 주는 농부의 아내의 모습에서 그가 짓밟은 처녀 달래를 기억해낸다. 최초의 교 미(交尾)에서 그는 너무도 소홀했던 전생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되살리고, 최초의 출산에서 아내의 고통, 육아의 고초를 깨닫고 남편으로서 너무도 무관심 했던 자신을 뉘우친다. 그 뉘우침으로 하여 그는 암소로서 인종(忍從)하고 부지런히 일을 한다. 그리고 늙어 간다. 그가 늙어 가자 다정했던 그의 주인은 눈물을 머금고 그를 팔아넘긴다. 그는 그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도살장에는 악덕 상인들이 있어, 소를 도살하기 전에 중량을 늘이기 위해 소에게 강제로 물을 먹이고 심한 매질을 한다. 그도 그런 매질을 당할 운명에 놓이자. 인종도 한계가 있다고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는 악덕 상인에게 반항할 결심을 한다. 억센 뿔로 받아 죽일 각오까지 한다. 그러나 어찌 뜻했으랴! 그에게 물을 먹이고 매질은 한 그 악덕 상인, 그는 바로 그가 전생에 짓밟은 처녀 달래의 아들이었다. 곧 그는 자기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운명에 놓인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아들에게 전달하려고 울부짖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소의 울음일 뿐, 그의 아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다. 마침내 그는 아들의 손에 도살되어 푸줏간의 한 덩이 고기로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그의 영혼은 소의 육체를 떠났다. 그의 영혼은 다시 윤회하여 딴 육체에 머물 것이다. 어떤 육체가 다음에 기다리고 있을 지는 아직 모르나, 그의 영혼이 소의 생애를 통하여 다분히 정화된 것만은 분명하다
춘하추동 저는 이 작품이 1975년 석가탄생 특집 KBS무대를 통해서 방송된지 벌써 40년가까운 세월이 지난 작품이지만 책으로 14면의 대본을 다시 읽으며 눈 떼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라기 보다는 인간이 참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 작가의 내세관을 다시한번 생각 할 수 있었습니다. 늘 선하게 사시는 작가 박서림님의 인생관은 바로 이런 윤회설에 뿌리를 두고 살아 오신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박서림님 홈에서 글 한편을 옮겼습니다.
내 평생 TV 드라마는 40년에서 4년(?) 정도 밖에는 쓰지 않았으니까 접촉이 많았던 것은 탤런트보다 성우가 단연 많았다. 성우이면서 탤런트인 연기자도 있지만... 내가 처음으로 대한 성우들은 당연히 데뷔작인 <장마루촌의 이발사> 에 출연한 성우들이다. 이 드라마에는 당시 한참 이름을 날리던 구민, 고은정, 정은숙, 김소원씨 등이 아닌 주상현(周尙鉉)씨와 임옥영(任玉英)씨가 남녀 주인공이었고 윤미림(尹美林)씨가 주인공의 깜찍한 누이동생 정숙역을 맡아 잘 소화시켰다.
주상현씨와 임옥영씨는 KY (기독교 방송) 출신으로 KBS와는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안다. 연출을 맡았던 박동근 선생이 새 바람을 넣기위해 그들을 발탁한 것이나 아닐까? 주인공 동순 역을 맡았던 주상현 씨는 단신에 수더분한 농부의 인상인데다 목소리도텁텁했다. 동순의 애인 순영 역을 맡았던 임옥영씨는 목소리가 맑고 단발에 인형 같은 둥근 눈을 지닌 소녀였다. 명동의 밤거리에서 문예계 직원과 함께 처음 인사할 때 발랄한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주상현씨는 연속극과 단막극에서 자주 만났다. 개성강한 성격을 표현하는데 적격이었던 것이다. 연속극으로는 TBC에서 방송한 <허무한 미소>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단막에서는 단골이다시피 출연하여 나의 작품을 살려 주었다. 특히 방송대상 극본상을 탄 <윤회설>에서는 부도덕한 사나이가 소(牛)가 되어 그 아들에게 물고문을 당하는 (도살하기 전에 근수(무게)를 늘이기 위해 억지로 물을 먹이는)장면에서, "얘야. 나다 애비다! 내가 니 애비다!" 하고 외치지만 소의 울음일 뿐. 안타까이 통곡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는 후배 성우들이 입만 나불나불, 목에서 나오는 연기를 나무랐다. 목소리는 배에서 나오는 것도 모자라 발 밑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重厚)한 연기로 문학성 짙은 작품을 소화해 내는데 적격이었다.
그는 TV에도 출연하여 그 독특한 연기력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한운사 선생의 <아로운전>에 악명 높은 모리(森) 일병 역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그는 순발력을 요하는 외화 더빙에는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장마루>에서 상대인 인구 역으로 나왔던 이창환씨는 더빙으로 밤낮 가리지 않을 만큼 바빴지만 그는 그러지를 못했던 것으로 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미리 가있던 아우님의 권유 때문인지 그는 중년의 나이에 홀연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그를 아끼는 우리(작가와 PD중에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그의 이민을 아쉬워했지만 적극적으로 막을 길은 없었다. 그는 아쉬워하는 나에게 <윤회설> 을 비롯한 기억에 남을 작품들이 수록된 릴 테입을 가지고 간다고 했다. 생각나면 틀어 놓고 회상에 잠기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 자세한 소식을 모르고 지내고 있다. 그보다 앞서 오정한(吳丁漢)씨가 이민 가서 야채상을 하고 있다 했으니 절친했던 그들인지라 서로 만나면서 우정을 나누고나 있는지.. 나도 늙었으니 그들도 늙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임옥영씨도 그 후 내 작품에 여러 번 출연하기는 했으나 주상현씨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도 한때 미국에 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한참 후 돌아와 만나곤 했는데 그 땐 이미 아줌마가 되어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지금은 어떻게나 지내고 있는지 묻혀 사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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