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대하 역사드라마 KBS무인시대

이장춘 2012. 2. 17. 03:21
 

 

 

1170년 무신들의 보현원 참살로 시작되어

최충헌 4대에 이르기까지 100년간에 걸친 무신들이

 통치하던 그 시대를 드라마화한 KBS 역사 대하드라마 무인시대는

 2003년 2월 8일부터 2004년 8월 15일까지 약 1년 6개 월 여에 걸쳐 158회가 

방송되면서 숫한 화제를 남긴 드라마였습니다. 난을 일으킨 이의방(李義方),

정중부(鄭仲夫)로 부터 경대승, 이의민(李義旼) 그리고 최충헌(崔忠獻)으로부터

 최씨 4대의 집권기간 39년간의 몽고 침략을 비롯해서  만적의 난, 조위총의 난

망이, 망소이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 등 내우, 외환을 겪었던 이 시기는

 뒷날 문인(文人)들에 의해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나약한 문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대하 역사드라마 KBS 무인시대

 

이녹영, 정영철 프로듀서가 담당했던 이 프로그램은

유동윤이 극본을 썼고 신창식, 김성근 프로듀서가 연출을 맡았

습니다. 이의방 서인석, 정중부 김흥기, 경대승 박용우, 이의민

 이덕화, 최충헌 김갑수등이 출현해서그 시대상을 묘사하면서

 열연을 보여주어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곳 글 보신후

더 자세한 얘기를 보시려면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 하셔요.

 

 

 

 

 

  

 

 

1170년의 무신정변은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보현원 오문 앞에서 임종식,

이복기 등을 죽이면서 정변을 일으켰고 .

한뢰, 김돈중을 비롯해서 문관들과 왕광취 등 환관들 참살하면서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무신정변의 공으로 정중부, 이의방, 이고 벽상공신이 되고

공부낭중 유응규를 금나라에 파견했습니다.

 

 

 

 

의 종

 

 

 

 

대하드라마 더 보기

 

 

개국 開國 1983년 KBS 대하드라마 장형일, 이은성, 이태원,

http://blog.daum.net/jc21th/17781693

 

 

KBS 드라마 명성황후(2001) 녹화현장사진과 OST (조수미 나 가거든)

http://blog.daum.net/jc21th/17781107

 

 

각시탈,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실상을 그린 KBS 수목 드라마

http://blog.daum.net/jc21th/17781423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왕실 인물들



의 종(김규철) 1127-1173년, 44세-47세
-고려 18대 왕, 인종의 장남.
-인생의 허무를 탐미했던 군주.
-격구에 능했고, 문재가 뛰어났으며 복술(卜術)을 신봉했다.

-즉위초기 외척문벌귀족들을 견제하기위해 무관들을 발탁하여 친위군을 강화한다.이 과정에서 정중부,이의방,이의민등이 발탁되고 총애를 받는다. 같은 이유로 조정관료보다는 환관,내시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전형적인 환관정치를 펼쳤다. 말년에는 문관,환관들과 어울려 향락과 사치를 즐겼다. 이 과정에서 초기에 총애했던 무관들을 소외시켰다. 무신들은 푸대접속에서 천대받았고 무신정변이 일어나게된다.
-정변당시 황궁에서 문신들이 참살되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술에 취해 시를 지었다.
-폐위되어 거제로 유배당한후 총애했던 무비마저 곁을 떠나자 삶의 의욕을 잃는다.
-김보당의 난때 복위세력에게 이끌려 경주로 갔으나 이미 기력을 잃은 촌부에 불과했다.
-곤원사에서 총애하던 이의민에게 죽임을 당한다.
-2년뒤 정중부정권에 의해 국상이 치뤄지고 복권된다. 능은 희릉,시호는 장효다.

 


명 종(김병세) 1131-1202년, 즉위40세-72세
-고려 19대 왕. 인종의 3남.
-무신정변으로 정중부등에게 추대된 뒤 무신집권자들의 교체속에서
외줄타기를 하며 보위를 지켜냈던 군주.

-무신집권자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함으로써 보위를 유지하는 능숙한 정치술을 구사했을만큼 영민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모후였던 공예태후가 병이 들자 친히 약을 달이고, 여러달동안 옷을 벗지 않았으며 눈이 짓무를정도로 울었다고 한다. 종실과 외척들의 화목을 이끌며 무신정변이후 풍전등화였던 왕실을 지켜냈다.
-민란과 반란에 와중에도 ‘그들도 내 백성이니 참혹하게 죽이기 보다는 은혜로 감복시키라!’ 당부하였고, 원기가 허약해 백자인(柏自仁)이란 술을 장복하였는데 계림의 백자인이 좋다는 말을 듣고도 농사철에 바쁜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며 이후 그 술을 먹지를 않았을만큼 자애로운 군주였다.
-그러나 김보당 난때 반군이 의종을 경주로 데려오자 이의방등이 모의한 의종시해를 묵인할 만큼 냉정함도 지녔다.
-일찍이 강릉공 왕온의 딸, 김씨(의정왕후 추존됨,모계 성씨를 따라 김씨다)를 처를 맞이하였으나 즉위 전에 잃고 왕후를 들이지 않았다.즉위한 이후 궁녀들을 곁에 두었으며 특히 총애하던 궁녀 순주, 명춘이 죽자 통곡을 하였을만큼 감성이 풍부했다.이후 모든 애정을 수안궁주에게 쏟았다.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수안궁주를 처로 취하려들자 배후에서 경대승을 부추켜 제거하였다.
-그러나 이지영이 애첩을 겁간했을때는 징치하지 못한 유약한 군주였으며 두경승이라는 충신을 왕권강화보다는 일신의 안위를 위한 방패막이로 썼을만큼 우유부단한 보신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최충헌의 정변으로 폐위되고 창락궁에 유폐된 지 6년후에 병을 얻어죽는다.
-능호는 지릉이고 시호는 광효(光孝).

 

 

신 종 (이우석) 1144-1204년, 즉위54세-61세
-고려 20대 왕. 인종의 5남.
-명종이 폐위된후 최충헌에 의해 추대된다.
-54세에 즉위하여 7년의 즉위기간동안 최충헌의 정적살해와 전횡에 면죄부를 내려준 허수아비 군주.
-능호는 양릉이고 시호는 정효(靖孝).

희종(1181-1237년, 즉위24세-31세)
-고려 21대 왕. 신종의 장남.
-젊은 나이에 보위에 올라 왕권회복을 위해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폐위된다.
-능호는 석릉이고 시호는 성효(誠孝).


공예태후 임 씨(김윤경) ?-1183년
-인종의 세 번째 왕후.
-의종,명종,신종의 모후.
-유약했던 명종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왕실정치를 주도한 인물.
-이의방등이 의종을 폐위시킨뒤 인종의 2남 대령후 왕경과 5남 왕탁(후에 신종)등을 추대 물망에 올리자 3남이었던 익양후 왕호를 지명함으로써 명종이 즉위하는데 핵심역할을 했다.
-이의방의 집권기때 왕실을 좌지우지하려는 무비(無比)와 끊임없이 대립했다.
-김보당의 난때 이의방이 의종시해를 결정하자 왕실의 안위라는 대의를 위해 아들(의종)의 죽음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갸날픈 늙은여인의 몸이었지만 살기등등한 장군들 앞에서 준엄한 질타를 했을정도로 왕실의 권위와 체통을 지키려고 애썼고 무신집권자들의 찬탈을 막기위해 그들과 타협하고 대립했다.
-왕실은 물론 무신집권자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인이었다.
-인종과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들에 대한 모정이 남달랐는데 다섯 형제중 3명이 왕위에 오른다.

선평왕후 김 씨(김보미) ?-1179년, 50대후반-60대후반

-인종의 네 번째 왕후.
-공예태후와 함께 왕실의 큰 어른. 호칭은 왕태후 연수궁주.

수안궁주 (최하나) (20세전후)

-명종의 1남2녀중 막내.
-빼어난 미모와 청순한 자태. 생후 얼마안되어 어머니(의정왕후)를 잃었으며 그 일로 아버지의 연민속에서 총애를 받았다. 아버지가 무신정변으로 즉위하자 궁주로 책봉된다.

-어린 나이에 중서령(관직명)에게 시집을 갔다.
-애첩 명춘이 죽고 외롭던 처지의 명종을 곁에서 위로하며 궐내에서 지냈다. 이 무렵 경대승과 첫만남을 하였고 연정을 품는다. 동시에 정균의 눈에 띈다. 정균은 수안궁주의 남편이었던 중서령을 압박하여파혼지경으로 이루게 한 후에 호시탐탐 그녀를 노린다.
-수안궁주는 명종에게 하소연해보지만 정균은 왕을 발 아래로 보던 권신이었다. 수안궁주는 명종의 언질을 받고 경대승에게 자신의 처지를 눈물로 하소연한다.
-경대승은 정균과 정중부를 제거한 뒤, 수안궁주는 아버지 명종을 위해 이혼을 하고 경대승과 정략결혼을 하려고 마음 먹는다. 그러나 연정을 품은 경대승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었다. 경대승은 그런 수안궁주의 속내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수안궁주는 경대승과 가슴아픈 이별을 하게된다.
연희궁주 (오수민)

-명종의 1남1녀중 장녀

명종과 의정황후 사이의 궁주

강종 (박병선)

-고려 22대 왕. 강종 13년, 즉위60세-62세
--명종의 장남으로 22세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명종의 폐위때 강화로
유배를 떠났다. 최충헌이 희종을 폐위시키자 유배지에서 10년만에
개경으로 돌아와 60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다.
-재위기간 2년을 못채우고 죽는다.
-능호는 후릉이고 시호는 원효(元孝).


고종 (1192-1259년, 즉위 22세-28세)

-고려 23대 왕. 강종의 장남.
-명종이 폐위되고 아버지 강종이 유배되었을 때 7살의 나이로 안악현에 유배되었다. 강종이 즉위하자 개경으로 돌아와 왕태자에 책봉되고 강종 사후 즉위했다.
-어린나이에 혼자 유배되었기에 즉위하였을 때 연륜도 없었고 왕족으로서의 자부심도 없었다. 정치를 몰랐기에 국정의 모든 사안을 최충헌에게 맡겼으며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의지했다. 최충헌에게 왕씨성을 내려주어 국부로 공경했다.
-최충헌 사후에는 권력을 승계한 최이에게 의존했고 대몽항쟁의 혹독한 시련기를 맞이하는 국왕이 된다.

 

명춘 (이자영)

-명종의 후궁

최상궁 (정영숙)

-명종의 상궁

조상궁 (허 진)

-공예태후의 상궁

조환관 (이경영)

-명종의 환관

 

 

 

 

 

 

 

 

  

 

 

 

 

 

 


 

문신들


문극겸(김종결) 1122-1189년, 49세-68세
-본관은 남평(南平郡).
-태학사를 지낸 문공유의 아들. 자는 덕병(德柄).
-의종 당시 정사를 농단하는 환관들을 탄핵하다 좌천되었을만큼 충직했고 무신정변때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지조를 지켰다.무신들도 그의 명성과 기백 때문에 감히 죽이지 못했다.

 

-이후 이의방의 동생 이인을 사위로 맞이한 인연 때문에

무신정권동안 유능한 재상으로 조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이의방과 친족관계를 맺은 것을 평생 후회했다.
-청렴하였으나 무신집권자들과의

돈독한 관계 때문에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의종실록」을 편찬을 주도하였으며 죽은뒤 명종묘종에

배향된 무신집권기의 명유(名儒)였다. 시호는 충숙(忠肅).

염신약 (1118-1192년, 50대후반-70대초반)
-본관은 봉성군. 자는 공가.
-키가 작고 담은 컸다. 범엽이 편찬한 <漢書>에 정통했으며 문장이 수려했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정중부정권때 정중부에게 토지를 강탈당한뒤 맞서다가 탄핵을 받았다.
-조위총의 난때는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공을 세웠다.
-시호는 효문(孝文).


 

문장필 (30대초반-40대후반)
-충의있는 문신.
-무신정변이후 문극겸과 함께 명종을 보필하였다.
-경대승정권때 연등회에서 장군들과 친위군이 명종앞에서 술에 취해
소동을 일으키는것에 분개하였고 끝까지 명종을 보필하였다.


 

조영인(박병호) 1133-1202년, 38세-70세
-횡천 조씨.
-인후한 성품에 재상의 도량을 지닌 충신.
-학식이 해박했고 문장이 뛰어났다.
-명종의 즉위후 태자를 보도(輔導)하였고 이후 조정의 정치를 주도하며 국사를 바로 잡아 명망이 높았다.

 

-최충헌이 집권하였을 때 금나라 사신이 명종의 폐위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였을 때 무마시켰던 일로 최충헌도 그를 인정하였다.
-조준과 조충 두 아들을 두었다. 시호는 문경(文景).

 

 

이인로 (이일웅) (50대초중반)
-평장사 이오의 증손.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재가 있었고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무신정변때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어 난을 피했다.
-명종때 오세재,임춘,조통,황보항,함순,이담지와 벗을 맺고 시와 술을 즐기며 자신들의 칠현(七賢)에 비유하였다.
-성정이 편협하고 조급하여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
-대표적 문집으로 <파한집>이 있다.

조 충 (최상훈) (1771-1220년, 40대초반-40대후반)

-조영인의 아들. 자는 담약.
-생후 한달반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자라면서 어머니를 지극히 사모하고 슬퍼하여 효동
(孝童)으로 불렸다.
-기억력이 좋고 옛제도와 문헌에도 익숙하였다.
-장중한 체구에 위엄을 갖췄으며 관대하고 온후하였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어진 사람들과 풍류를 즐겼다.
-최충헌이 집권한뒤 최충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원수가 되어 거란군을 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기세등등한 몽골군들도 “고려에 조충이 있는 것은 하늘의 복이다”라고 할만큼 충의와 신의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모질지 못하여 관후한 사람으로 보였으나 대군을 지휘할때나 중대사를 처결할 때는 비범한 거인의 풍모를 보였다. 조정과 백성들은 그를 태산처럼 믿고 소중하게 여겼다.
-고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광정(光定)이다.

왕준명 (남영진) (?-1211년, 40대 후반)

-희종때 내시낭중.
-희종의 밀명을 받고 최충헌 암살을 주동한 인물.
-장사와 승려들을 불러모아 궐내에서 최충헌을 살해하려다 실패하여
참수당한다.

 

 

민영모(1115-1194년, 50대중반-60대 후반)
-본관은 황여현.
-명종즉위후 벼락출세를 거듭했고 무신정권과 친화력이 강했던 인물.
-겁이 많고 말을 더듬었으며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유약한 성품.
-경대승정권때 퇴직하여 10여년뒤 80세에 죽는다. 시호는 문경(文景).

우승경(?-1211년,50대후반)
-희종때 참정.
-희종의 밀명을 받고 왕준명과 함께 최충헌 암살을 기도한 인물.
-암살실패로 귀양을 간다.

금 의(1153-1230년, 60대중반)
-본관은 김포(원래는 봉화현사람이다). 자는 절지.
-훤??한 외모에 도량이 넓었고 의지가 강했다.
-최충헌집권시 ‘능문능리(能文能吏)’ 정책에 편승하여 발탁되었으며
이후 최충헌의 측근문사(文士)가 되어 승승장구한다.
-강종 즉위시 무례한 금나라 책봉사신을 질타하였으며 팔관회에서

 난동을 부린 병사들을 꾸짖을 만큼 직설적이었다.
-고려가요 <한림곡>에 나오는 금학사가 바로 그를 지칭한다.
-후에 벽상공신에 올랐고 78세에 죽는다.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이규보(1168-1241년, 40대중반-50대중반)
-본관은 황려현. 자는 춘경.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문장이 뛰어나 기동(奇童)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경전,사기,백가,불경,노자등을 통달하였다.

관직운이 없어 과거에 말석으로 합격하였다.
-술을 즐겼으며 활발한 성품이었으나 그당시 이인로 임춘등이

칠현(七賢)을 자처할 때 그들을 시한수로 조롱하는등 인간관계가

원만치 못해 오랫동안 등용되지 못했다.
-최충헌이 이규보의 글에 감탄하여 직한림원에 올랐다.

 그뒤 최충헌의 집에 드나들며 승차를 거듭했다.
-몽고병사들이 국경을 위협할 때 원나라에 진정서를 보내 원황제를

 감동시켜 철병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문재가 뛰어났다.
-독자적인 문장을 개척하여 53관의 문집을 남겼으며,

74세로 죽는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김돈중(박영지) ?-1170년,40대후반
-김부식의 아들.
-인종때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고, ‘김돈중의 화살사건’으로 친위대들이 죄를 받은 일로 무신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보현원 참살 때 감악산으로 몸을 피했다가 체포되어 정중부에게 참살된다.

 



한뢰(정진각) ?-1170년, 50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린일로 무신정변의 불길을 당겼다.
-보현원참살 때 이고에게 참살당한다.

 



왕광취(유병준) ?-1170년,50대
-환관.
-보현원참살에서 살아남아 황궁으로 돌아온 뒤 이의방, 정중부등을 죽이려다 살해당한다.

 



윤인첨(김인태) 1110-1176년, 61세-67세
-본관은 파평. 윤관의 손자.
-명문가문 출신. 의종 당시 정사를 농단하던 내시와 환관들에게 적대적이었기에 무신정변에서 살아남았다.
-‘문신지장(文臣之長)’칭호처럼 문신들의 수장으로써 문극겸과 함께 무신집권기의 조정을 이끌었다.

 

-조위총의 반란때 진압군의 원수(元帥)가 되어 서경을

함락시키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공신에 제수되었지만 얼마후 사망한다.

유응규(김준모) 1130-1175년, 41세-46세

-본관은 무송(茂松). 의종묘정에 배향된 유필의 장남.
-자는 빈왕(賓王), 옥골선풍에 총명함과 뛰어난 언변,기개를 겸비하여 무신집권기에 탁월한 외교술을 펼친다.
-청렴했던 명성 때문에 무신정변에서 화를 면했다.
-명종이 즉위한 후 공부낭중이 되어 책봉조서를 받기위해 금나라로 갔다.

 

-금 황제가 명종의 즉위가 왕위찬탈이라고 양위승인을

거부하였을때 유응규는 죽기를 각오하고 닷새동안 단식투쟁을 벌였다

.유응규의 충정에 감복한 금황제는 책봉조서를 내려주었다.
-김보당이 거병했을 때 김보당과 내통한 문신들이 학살되는 과정에서
윤인첨을 죽이려는 무신들을 호통치고 정중부등과의 담판으로

윤인첨을 구명하였다.-조위총이 거병했을 때 서경으로 가서

조위총을 설득하여 항복문서를 받아내기도 한 걸출한

외교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한문준(김성원) ?-1190년 50대초반-70대초반
-본관은 대흥군. 평장사 한유충의 아들.
-온후하고 공평무사한 성품.
-송유인의 탄핵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줄곧 명종의 총애를 받았던 문신.
-문재가 뛰어났고,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뛰어나 무신집권기에 많은 명유(名儒)인재들을 발탁하였다. 시호는 정의(貞懿).

 

 

 

 

 

 

 

 

 

  

    

 

 



무신들

>>이의민 집권기

두경승 (임 혁)
1174년, 30대중반-50대후반
무인의 정도를 걸었던 불세출의 명장
-본관은 만경헌(김제).
-소박하고 가식없는 성품. 이의민과 맞상대를 할만큼 용력이 뛰어났고 병법에도 밝았다.

부 루 (정흥채) (20대중반-50대)
-이의민의 충복.

-천출. 우람한 체구에 힘이 장사였다. 과묵한 성격.
-이의민을 그림자처럼 호종하였으며 변치않는 충성을 보였다.
-이의민이 일인자가 되어 황궁을 출입할때는 80근이 넘는 이의민의 부월(斧鉞)을 들고 주인의 뒤를 쫓았다.
-미타산에서 이의민이 참살당할 때 끝까지 주인을 지키려다 죽는다.


백임지 ?-1191년, 30대중반-50대중반 (김기복)

-본관은 남포현.
-농사를 짓다가 개경으로 올라와 장작을 팔았다.
-의종때 내순검군이 되었다가 무신정변으로 승차를 거듭했다.
-맡은바 직분에 충실하여 병마부사로 있을 때 현현고의 은그릇도난과 관련된 살인사건을 해결하여 명성을 떨쳤다.
-고려때는 신료가 사사로운 일로 왕을 찾아가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백임지는 사사로이 명종을 찾아가 환대를 받고 나온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백임지를 탄핵하지 못했을 만큼 권세를 누렸다.


박순필 ?-1191년, 30대초반-50대초반 (최낙희)

-천출.
-수려한 외모와 아름다운 수염, 언행이 방정하였다.
-무신정변이후 문신들의 대량살상으로 공문서가 산더미같이 쌓였을 때 글을 아는 이유로 중용되었다.
-성실한 직무태도로 대장군에 올랐으며 곧 병부상서가 된다.
-박순필이 태자궁옆에 큰집을 건축하였는데 명종조차 말리지 못했을만큼 위세가 대단하였다.
-조원정의 난때는 미리 알고 병을 핑계대고 당직을 서지 않아 화를 면했다. 그 후에도 승승장구한다.

 

 

전존걸 (?-1193년, 40대 중반)

-지략과 용맹으로 명성을 날렸다.
-김사미와 효심의 난때 진압군을 이끌었다. 이의민의 장남 이지순이 적당과 내통하여 연전연패하였다. 의심을 품고 이지순을 적발하였는데 오히려 진퇴양난에 빠진다. ‘이지순을 처단하자니 집권자 이의민에게 죽임을 당할테고 모른척하자니 적당패에게 궤멸될 것이고..’ 이런 고민속에서 이지순은 협박과 회유로 그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결국 전존걸은 무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택한다. 그의 죽음으로 이지순의 내통사실은 조정에 알려진다.

 

 


이광정(황범식) ?-1194년, 50대중반-70대후반
-사졸출신.
-무신정변으로 대장군에 올랐고 이후 승승장구했다.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나가는’ 성급하고 직설적인 성품으로 경시서령 왕총부가 청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욕지거리를 하며 뜰아래로 끌어내려 의관을 벗기고 매질을 하였을 정도였다.

 

-정존실을 면책한 일로 장보에게 탄핵을 당하였을 때, 크게 노하여

 장보를 귀양보내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죽였다.
-불학무식했으나 이의방,정중부,이의민정권에서 승차를 거듭했을만큼
처세에 능했다.
-노년에 명종이 그의 연로함을 애석하게 여기자 관직에서

 해임될까봐 대성통곡을 하여 문무백관의 조소를 받았을만큼 탐욕이 강했다.


최세보(민 욱) ?-1193년 30대후반-60대초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불학무식했다.
-이의민정권의 실세.
-의종때 금군대정이었다가 ‘김돈중의 화살사건’으로 귀양을 갔다.

 

-무신정변때 개경으로 돌아와 승승장구하였다.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정권에서 동수국사가 되어 <의종실록>

편찬시 무신들의 입장에서 사실을 왜곡하였다.
-천성이 쾌활하여 농을 즐겼으며 탐오하여 매관매직으로 치부하였다.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기위해 한집의 사면에 4채의 집

을 따로짓기는등 도참을 신봉하였다.
-용모가 수려했던 아들 최비는 태자가 총애하던 여종과

 간통하였으나 이의민의 비호로 벌을 면했다.

 그러나 최충헌 집권후 유배에 보내졌고 얼마뒤 최세보의 가문은 멸족되었다.

박존위 (박철호) ?-1175년 30대초반-30대후반

-이의민과 행동을 함께했던 막역한 동료.
-김보당의 난때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다.
-조위총의 난의 진압군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움.
-의종의 국상이 선포된 직후 운주(평북 운산)백성들에게 참살당한다.

 


조원정(김주영) ?-1187년, 30대중반-50대초반
-옥공(玉工)의 아들. 모친은 관기.
-무신정변때 이의방의 측근으로 활약하여 장군이 됨.
-탐욕스럽고 포악했다.
-동북면 병마사시절 말안장까지 걷어갔으며 머리가 긴 사람을 보면 모발을 자르게 하여 빼앗을 정도로 탐욕과 수탈이 심했는데 빼앗은 머리칼이 말 2마리 짐이 되었다고 한다.

 

-1187년에 중서성의 조(租)를 횡취한 일로 두경승과 문극겸등의

 탄핵을 받고 좌천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일로 앙심을 품고 무뢰배들을 모아 석린등과 반란을 모의하였다.
두경승의 사병들이라 자칭하고 야밤에 수창궁에 월담하여 내시들을

 닥치는대로 참살하다가 권절평이 이끌던 진압군에게 패퇴하였다.
체포되어 석린등과 참수당한다.

석 린(?-1187년, 30대중반-50대초반)
-창고근처 나락으로 연명하던 천출.
-금군이 되었다가 무신정변때 이의민의 휘하에서 낭장으로 승급.
-조위총의 난때 두경승을 도와 공을 세워 이후 상장군이 되고 병마사까지 역임하였다.
-용력이 출중하고 교만하고 광폭한 성격.

 

-안찰사 강용유가 청탁을 거절하자 그를 면직시킬 것을 참소하였으나

명종이 청을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휘두르며

‘두번다시 벼슬살이 하지 않겠다!’며 관대를 벗어던졌다.

명종이 석린을 두려워해 오히려 위로주를 내렸을 정도였다.
명종이 강용유를 파직하는 조서를 거두어들이자 앙심을 품었다.
-평소 막역하던 조원정과 의기투합하여 정변을

일으켰으나 패퇴하여 참수당한다.



이영진(유종근) 30대초반-50대초반
-고령군 사람으로 생선장수였다가 나졸이 되었다.
-잔인하고 흉폭하여 무신정변때 잔악한자로 악명이 높았다.

 

-경대승정권때 위축되었다가 이의민정권에서 다시 위세를 떨었다.
-가혹한 수탈로 엄청난 축재를 했는데 보는 이들이 ‘너무 과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반란의 주역과 관련 인물들

:: 김사미,효심의 난


 

김사미 (강우석) (?-1194년, 30대 중반)
-사미승출신으로 이의민 집권시 경주부근 운문(청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개경정부에 끝까지 항거하다 패퇴하고 참수된다

 

 

 

효심(40대 중반)
-김사미가 봉기할 때 초전(울산)에서 함께 거병함.
-경주출신 집권자 이의민에게 한가닥 희망을 걸고 이지순과

 내통하였으며 이후 소극적인 저항을 벌이다 투항한다.

 

 

:: 만적의 난

 

만적(윤승원) (30대 초반-40대 초반)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을소냐?!’는 신분해방의 외침으로 노비들의 봉기를 주동한 지도자.

-최충헌의 가노(家奴).
-최충헌의 호위를 맡았던 충복이었고, 최충헌이 정변을 모의할 때 측근세력에게 밀서를 전달케 했던, 누구보다 신뢰하던 충복이었다.

 

-만적은 그당시 개경정부의 문무신료들의 노비들과

비밀결사를 맺으며 거사를 모의했다.
-최충헌이 무력으로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움켜쥐려한 야심가였다면 만적은 고려의 신분질서

 자체를 전복시키려했던 선각자였다.
-최충헌이 왕을 폐위시키고, 동생 최충수를

제거하자 보제사에서 수천명의 노비들과 거병한다.

그러나 한충유의 노비 순정의 배신으로 격렬한 저항 끝에

 진압된다. -최충헌은 평생 아꼈던 만적을 살려주려 하였지만

만적은 당당한 태도로 죽음을 택한다.

 

:: 망이 망소이의 난

 

망이(박진성) (?-1177년, 40대초반)
-명학소 천출로 뛰어난 판단력과 담대함을 갖췄던 민란 지도자.
-지방수령의 탐학에 항거하여 산행병마사를 자칭하며 공주를 함락시키고 일대를 장악했다.

 

-개경으로 올라가 집권자였던 정중부와 담판을 짓고 곡식과

호위를 받으며 귀환했을 만큼 담대했다.
-그후 진압군이 어머니와 처자를 감금하자 2차 봉기를 일으켜 개경정부

타도를 내걸고 진압군과 결사항전을 펼치다가 항복한다.
-그가 주도한 민란은 이후 전국적인 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망소이 (?-1177년, 30대중반)

 

-망이의 동생. 망이가 머리로 민란을 주도하였다면 망소이는 뛰어난 용력을 바탕으로 진압군을 무력으로 제압한 선봉장수였다.
-끝까지 형을 믿고 따랐던 과묵한 행동파.

 


손청 (?-1177년,40대 초반)


-망이,망소이 봉기때 일대를 휩쓴 민란 주동자.

-망이,망소이와 노선을 달리했던 과격파로 진압군을 연전연파한다.
-성급함과 난폭함한 성격으로 진압군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망이의 2차봉기가 진압된 후 참수된다.

:: 김보당의 난

김보당 (?-1173년, 40대중반)


-영광김씨. 성종때 명재상 김심언의 5대손

-명종원년,정사를 농단하던 이의방의 형 이준의와 문극겸을 탄핵할 정도로 강직한 성격. 그 일로 공부시랑으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이의방정권에 적대감 품었다. 후에 복직되고 동북면병마사를 겸임하게되자 이의방에게 불만을 품은 조정세력과 내통하여 의종복위를 내걸고 거병한다.

 

-의종을 앞세워 개경으로 진격하려던 그의 계획은 의종이

 이의민에게 시해당한뒤 명분을 상실하게 되고 한달여만에

진압군에게 패퇴한다.

-포로가 되어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를 당했다.
-당시 김보당과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수많은 문신들이

 참살되어 제 2차 무신의 난이라 불린다.

장순석(?-1173년,40대 초반)


-김보당의 측근장군.

- 김보당의 난때 거제에 머물던 의종을 경주까지 호종한 장군.
-이의민에게 제거된다.

 


 

:: 조위총의 난


 

조위총(?-1176년,50대초반)


-서경유수.

-의종을 시해한 의방 정권을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 그는 개경정부가 북계사람들을 토벌하기 위해 대병력을 출동시켰다는 거짓격문으로 북계사람들의 개경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감을 선동하여 거병하였다.

 

-윤인첨과 정균의 1차 진압군을 격퇴하였으며, 두경승과 이의민의

 파상공세를 끝까지 버텨냈을만큼 탁월한 전술가였고 북계 각지에서

 모인 반군세력을 일사분란하게 이끌었던 덕성과

정치력을 겸비한 지닌 인물이었다.
-이의방이 직접 진압군을 몰고왔을 때 아들 조경과

 장수 우위선을 잃었지만 결국 이의방을 패퇴시켰다.
-개경정부의 총공세에 위기감을 느끼고 금나라에 자비령이북

 40여성을 내속시키겠다는 조건으로 원군을 청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윤인첨과 두경승이 이끄는 정부군이 서경을

 함락시키자 체포되어 참수 당한다.

현덕수(?-1215년, 30대초반-40대중반)


-본관은 연주(延州)

-붉은 얼굴에 호방한 성품. 의기와 담력을 지녔다.
-조위총의 난때 북계지역의 모두가 서경에 집결하였는데 혼자 조위총에게 반기를 들었다.

 

-개경진압군과 협력하여 조위총의 반군을 진압한 공로로

내직에 올랐으나 청렴강직한 성품에도 변방출신이라는 이유로

 좌천을 거듭하다가 신종때 재임명되어 병부상서까지 올랐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무인시대-1.wma

 

무인시대-1.wma
1.9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