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58년 박종세 아나운서의 첫 야구 중계방송으로부터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를 창단해서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 우승팀으로 올려 놓기까지의 생생한 현장기록을 담은 회고록으로 체험을 통한 현대 한국 야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 70 면에 해당하는 방대한 글입니다. 저는 방송선배 박종세 아나운서의 회고록 ◀ 방송, 야구 그리고 나의 삶 ▶ 을 읽고 방송선배 박종세 아나운서의 배려아래 2010년 5월 16일을 기해서 ◀ 5.16새벽 첫 방송 박종세 아나운서 ▶ 글을 올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글을 읽어 주셨고 카페, 브로그 등에 스크랩 해 옮겨주셨습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저자 박종세 아나운서의 허락을 받아 그 회고록 야구에 관한 글을 모두 발췌해서 올립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박종세 아나운서에게 있습니다. 이 글은 원글의 변형없이 블로그나 카페 등에 스크랩해서 옮길 수 있도록 승인을 받았지만 사이버 이외의 무단 복사 사용은 금한다고 하셨습니다.
1972냔 7월 19일 군산상고 역전승, 그때 그 화면
1972년 7월 19일 황금사지기 결승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중계 방송되었던 감격과 환호성! 밤늦도록 서울 거리에 울려 퍼진 팬들의 함성! 지금도 귓전에 울려오는 것 같고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그것은 군산상고의 야구팀 창단 3년간의 결실이었고 그 팀의 활력을 불러 넣어준 박종세님의 노력이 곁들여 있기도 했습니다. 군산상고의 우승으로 호남의 야구가 빛을 보기시작 하면서 야구는 전국적인 붐이 일어 1980년대의 프로야구 창단으로 이어졌습니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프로야구 창단시기에 중계빙송 대신 프로야구 창단을 위해 힘을 기울였습니다.
1982년 창단되어 오랜기간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해태타이거즈! 그 팀 탄생의 주역 그리고 해태 팀을 전국 제일의 팀으로 양성한 주인공이 박종세 아나운서였습니다. 30년 가까운 방송생활과 해태 타이거즈의 야구단장을 맡으면서 한 일 할 얘기가 많은 님은 2004년 회고록「방송, 야구, 그리고 나의 삶」에 그 얘기를 담았습니다. 박종세 아나운서의 삶은 이 나라 야구 현대사와 함께 한 세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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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6 새벽 첫 방송 박종세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0461
5.16 첫 새벽방송 그로부터 반세기에 올리는 그때 그 아나운서 박종세님 글 http://blog.daum.net/jc21th/17781252
박종세 아나운서 야구중계방송, 한국야구 반세기 생생한 현장기록
생애 첫 중계방송
1958년과 1959년에 나는 내 생애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하는 주요한 계기를 맞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향후 “박종세” 하면「야구중계방송」과 「대한 뉴스 해설」을 떠 올리게 되는데 이 두 가지의 시작이 이때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나의 첫 야구 중계방송은 동대문에 있는 서울 운동장 메인 스타디움에서 이루어 졌다. 훗날 일본 프로야구계의 신화적인 존재가 된 장훈 선수가 재일교포 선수대표로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 고교 대표와 경기를 하는 실황을 중계 방송한 곳이다. 메인 캐스터는 윤길구, 황우겸 아나운서였고 나는 경기 시작 전에 양쪽선수 오더(order)를 소개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때의 정경이 지금도 가끔 꿈에 보인다.
오른쪽 엔지니어 박준병
1958년 당시 서울운동장 야구장은 확장공사의 마무리가 안 된 상태여서 야구방송의 중계방송은 주로 용산에 있는 미 8군 야구장과 육군 야구장에서 이루어 졌는데 나의 첫 번째 야주 중계방송은 서울운동장의 축구장에서 시작되었다. 축구 골대를 뽑아낸 운동장에 육상경기에 쓰는 허들을 일렬로 세워 외야 펜스로 삼고 동쪽 끝의 아래쪽에 홈 베이스를 만든 원시적인 시설에서 치러진 대전이 내가 야구중계의 첫 입을 땐 경기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길고 긴 나의 야구 중계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고교야구 중계
1960년대 초부터 고교 야구가 붐을 이루었는데 나는 지금도 붐 조성에 내가 일조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때까지 야구중계방송은 어떤 대회를 막론하고 준결승과 결승에 한정되어 있어서 야구에 대한 청취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야구에 관한 화제도 준결승과 결승이 진행되는 기간에만 반짝 하다 말았다. 더군다나 그 당시는 축구와 농구, 권투중계가 중계방송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동준 해설위원과
나는 어쩌다 생각나면 한 번씩 하는 중계방송으로는 절대로 야구는 붐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PD와 편성책임자 아나운서 실장을 상대로 끈질긴 설득작전에 돌입했다. 그 결과로 야구 중계방송시간이 점차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나는 청취자를 라디오 앞으로 끌어내는 방법을 연구했다.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나는 일본 야구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그 방안을 모색했는데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와 중계를 위해 대만에 갔을 때 일본 NHK 아나운서에게서 들은 말들도 참고가 되었다. 결국 방송국에서는 나의 주장을 받아들여 황금 사자기 대회, 청룡기 대회, 대통령기 고교 야구대회, 봉황기 고교 야구대회 등을 시작 첫날 경기부터 끝나는 날까지 매일 중계방송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대진표를 꼼꼼히 살펴 첫날의 경기 중 사람들이 관심을 끌만한 카드를 중계방송 자리에배치하고 둘째 날, 셋째 날도 중계방송을 계속했다. 준 걸승은 두 팀을 다 중계해서 결승 팀을 골라냈다. 이런 몰아치기 방송은 처음에는 다소 무리가 가는 듯 했으나 차츰 야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 되면서 고교야구 결승전은 사회적 관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결승전이 열리는 날에는 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급기야는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는 사람까지 늘어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이런 식으로 중계를 계속 하다 보니까 언제 부터인가는 야구장이 첫날부터 만원을 이루기 시작했고 이렇게 조성된 야구 붐은 고교 야구에만 대학야구, 실업야구로도 이어져 갔다.
야구 경기가 전부 다 재미있고 아슬아슬한 것은 아니다. 투수전으로 게임이 지루해지면 하품을 하는 관중도 나오게 된다, 이럴 때 중계 아나운서는 투수의 볼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도록 청취자를 이끌면서 한 점 승부를 부각시켜 나가야 한다. 반대로 점수 차이가 많이 나서 경기가 싱거워 질 때는 과연 지구 있는 팀을 한 점이라도 낼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떠 홈런 한방으로 승부가 갈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흥미를 유발시키기도 해야 한다. 이렇게 고교 야구 중계가 중계방송의 꽃으로 등장하면서 마침내 다른 중계방송을 다 합친 것과 야구 중계방송 하나가 같아지더니 야구 중계방송 횟수가 오히려 더 많아지는 경우도 생겼다. 애초부터 야구 중계방송만 관심이 있던 나는 다른 중계는 거의 거들떠보지 않았다.
윤길구, 황우겸 선배와 함께 오직 야구 중계에만 몰두 했었는데 두 선배가 떠난 후 혼자서도 나는 마이크를 다 잡아 고교 야구 중계방송의 개화를 위한 나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했었다 물론 대학야구, 실업야구 중계도 많이 했다. 그때 해설을 맡아 나와 콤비를 이루었던 분들은 손희준, 박상규, 이호언, 풍기명, 서동준, 신현철, 김동엽, 하일성 해설위원 등이었고 야구 중계방송에 정성을 쏟은 아나운서들은 최두헌, 이규항, 이장우, 김인권, 변웅전, 원창호, 김재영, 김용, 유수호, 전우벽, 정도영, 손석기 아나운서 등이었다.
4회 대만(臺灣) 아시야 야구대회 중계
1961년 12월말 나는 마침내 외국에서 벌어지는 야구 중계방송을 맡아 난생 처음 국외선 여객기를 타게 되었다. 62년 1월에 “타이페이”에서 벌어지는 제4회 아세아 야구 선수권대회 중계방송을 위해 해외로 나가게 된 것이다. 김포 비행장이 건설되어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내가 탑승할 프로펠러 쌍발기는 서울에서 도꾜, 오키나와 나하를 거쳐 대만의 타이페이로 갈 예정이었다. 방송국에서는 장기범, 임택근 선배 등이 비행장까지 나와 주었고 집에서도 어머니와 형님들이 나오셔서 나는 턱없이 융숭한 환송을 받았다. 더군다나 아나운서실에서는 어려운 살림에도 반코트 양복과 모자까지 마련 해 주었다.
처음 나가는 엔지니어, 프로듀서도 없이 혼자 중계방송을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기에 나는 필마단기로 적진에 들어간다는 용사같은 비장한 모습으로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나는 그렇게 서울을 떠나 도꾜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는데 대만으로 바로 가는 여객기가 없어서 그곳에서 이틀을 묵어야 했다. 그날이 마침 정월 초 하루여서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도꾜의 새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집집마다 솔가지와 흰 종이로 만든 것에 큰 귤을 꽂아서 대문을 장식했는데 텅 빈 거리에는 가끔씩 일본 전통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 다녔다. 나는 어릴 때 생각이 나서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혼자서 동경 번화가를 걸어 보았는데 워낙 어려운 시기였기에 달러 몇 푼을 남대문 시장에서 바꾸어 꼬깃꼬깃 넣고 떠나온 처지여서 먹고 싶은 일본 우동 집도 그냥 지나치고 정월이라고 특별히 진열 해 놓은 싶은 “모찌떡”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이틀이 지나서야 나는 하네다에서 대만 행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비행기 연료 때문에 오키나와 나하에 내려 몇 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대만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당시 송산 공항으로 불린 대만의 타이페이 공항은 지금과는 달리 간이역처럼 보잘것없었다.
공항에는 우리 대표팀의 4번 타자 박현식 선수와 3번 타자 김정환 선수 등이 마중을 나와 주어서 나는 그간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우리 선수들이 묵고 있는 후수환뗀 (福壽飯店)이라는 조그마한 호텔에 여정을 푼 나는 곧바로 중계방송 준비를 위해 대만 방송국과 대만 전신 전화국을 방문했는데 그쪽 관계자들은 대만 해협의 자기(磁氣) 방해로 서울까지의 전화상태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을 모였다. 걱정이 되어 서울까지 연결한 후 시험을 해 보았는데 역시 소리가 잘 들리다가 차츰 멀어지고 다시 차츰 가까워지고 하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대만방송에서 엔지니어를 지원 해 주었지만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앞줄 가운데 분이 박종세님이고 왼쪽은 해설 허 곤님 뒤에 단장 선우인서님이 보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선수단의 단장은 선우인서씨였고 감독은 김영조씨가 맡았다. 선수는 4번 박현식, 3번 김정환 외에 5번은 부산 상고에 재학 중이던 김응룡, 그리고 경동고 졸업반 이던 백인천이 포수로 참여했다. 고교생 선수 백인천(白仁天)과 김응룡 두 사람은 특히 주목을 받았다. 대회는 예정대로 1월 1일 개최되었지만 중계방송은 닷새 뒤에야 시작되었는데 마침 우기여서 장대같은 비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홈베이스(Homebase)와 1루 2루 3루 그리고 피쳐 마운드까지 천막을 덮어 놓은 상태에서 경기가 진행되었다.
박종세 아나운서와 백인천
특히 홈베이스에서 백네트(back net)앞 까지는 톱밥을 잔뜩 뿌려 덮었지만 그래도 논 바닥 같았다. 주최 측에서는 가끔 불을 질러서 빗물을 말리기도 했다. 송산 비행장 근처에 있는 송산구장은 새로 만들어 비교적 깨끗했지만 시설은 너무 부실했고 백네트 바로 뒤 운동장보다 조금 낮은 곳에 만들어 놓은 중계방송 석은 그야말로 엉터리여서 그곳 에서의 중계방송은 말 그대로 악전 고투였다.
중계방송은 운동장 전체를 내려다 보아야 진행이 가능한데 그런 기초부터 무시되었다, 파울 볼이 중계방송 석 앞에서 빗물을 튀길 때는 그야말로 도망치듯 몸을 피해야 했고 저절로 비명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 “악!” 하는 소리가 그대로 방송을 타기도 했다. 대회 기간중 우리 선수들이 묵었던 호텔에서 불이 나기도 했는데 다행이 무사히 빠져 나온 일도 있었다. 이 대회는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필리핀 등 네 나라가 참가하여 리그전으로 치뤄 졌는데 아무래도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기가 큰 관심사였다. 이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아깝게 패했지만 경기 승패와는 상관없이 고등학생인 백인천 포수의 타격과, 앉아서 1루로 공을 던져 주자를 잡아내는 강한어께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또한 백인천 선수는 이 대회에서 유일하게 홈런을 치기도 했다.
드디어 일본을 누른 우리 야구
1963년으로 접어들면서 고등학교 야구 붐에 이어 실업야구도 사람들의 관심을 끓기 시작했다. 중계방송의 위력을 실감한 나는 고교 야구뿐만 아니라 실업야구 중계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 하게 되었는데 이때 상업은행, 제일은행, 서울시청, 체신부등 여러 곳에서 야구단을 창단했다. 우리 실업팀들은 일본 사회인 야구팀을 초청하는가 하면 미 8군 야구장에서 미군들과도 경기를 가졌는데 나는 이 경기들을 중계방송 하기도 했다. 이 해에는 대학야구도 활발해서 야구계 전체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1963년 9월, 마침내 서울에서 제 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우리 대표팀은
감독 박점도 코치 김영조
투수 신용균(재일동포) 백수웅〮김설권〮최관수〮김청옥〮 포수 서정리(재일동포)〮김금현〮〮〮 내야수 김응룡 성기영 오춘삼 감희련 박정일(재일동포) 하 일 외야수 박현식 배수찬(재일동포) 김삼용 박영길 등으로 짜여졌다.
일본팀은 사회인 대학 우승경력이 있는 세끼스이 화학(積水化學)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역대 최강팀이었고 그밖애 필리핀 팀, 대만 팀이 모두 우승을 노리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 독무대여서 어는팀이나 일본팀에게 한차례만이라도 이겨보는 것을 목표를 삼았다.
손희준선생과 홍기봉 엔지니어 앞에 트란지스터가 보인다.
9월 21일, 제 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가 증축으로 새 단장을 한 서울 야구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날은 관중도 2만 5천여 명이 들어 열기가 대단했다. 중계방송 석은 야구장 백네트 뒤 꼭대기에 마련되어 있어서 운동장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지만, 운동장과의 사이가 너무 멀어서 처음에는 투수의 구질(球質)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몇 번 중계방송을 하다 보니 그것도 익숙해져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관중들 함성이 운동장을 울리면서 중계방송 마이크에 흡수되어 극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대회의 일본팀과 우리팀 경기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감격적이었다. 그동안 우리 야구가 일본에게 너무 눌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본팀과의 첫 경기는 재일동포 투수 신용균 선수와 포수 서정리 선수의 활약을 발판삼아 5대 2로 승리를 거두어 운동장을 가득메운 관중들뿐만 아니라 중계방송을 청취한 국민들에게 우승의 예감을 안겨 주었다. 드디어 2차 리그가 시작되고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속에 결승전에서 일본과 격돌 하게 되었다. 1차 리그전과 마찬가지로 투수 신용균과 포수 서정리가 배터리(Battery)를 이룬 라인 업(Line up)이 소개되자 관중들이 열광이 시작되었다. 경기는 투수전의 양상으로 종반으로 치달았다.
신용균 투수가 일본의 막강 타선을 꽁꽁 묶어 둔 가운데 1:0으로 이기고 있는 8회초 포볼로 나간 박현식 선수를 1루에 노아 두고 김응룡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앞 타석에서도 빨래줄 같은 타격으로 상대 투수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는 유리한 볼 카운트를 만든 뒤 큼지막한 두 점짜리 홈런을 날리고 말았다. 나는 목청이 터져 나갈 정도로 “홈런!”을 외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관중들의 환호는 그칠 줄을 몰랐다. 마침내 우리나라 야구가 일본을 물리치고 아시아의 패자(覇者)가 되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이날 결승전은 3:0으로 일본을 제압하고 우리나라가 우승했다.
트랜지스터라디오와 중계방송
그 무렵 트랜지스터라디오가 처음 나올 때여서 운동장의 관중들이 중계방송을 들으며 경기를 관람하는 경우가 많았다. 확률과 기록의 경기인 야구는 타자의 타율, 출루율, 장타율, 홈런, 도루 등의 기록이 투수의 경우 승률, 방어율, 피홈런, 탈삼진, 볼넷 등 여러 기록이 따라 다닌다. 야구경기에서는 선수 개개인이 달고 다니는 이런 기록은 물론 타석에 나온 선수가 앞 타석에서는 어떠했는지 현재 투수는 어떤 공을 던지고 있는지 등 세세한 것 모두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트랜지스터가 보급되면서 관중들은 스탠드에 앉아서 중계방송을 통해 모든 기록을 들으며 경기를 관람 할 수 있게 되었다.
해설 풍기명
트랜지스터가 야구 관람의 중요한 도구가 되면서 운동장에는 중계방송 소리가 울려 퍼졌고 몇 군데 방송국에서 중계방송을 같이 할 때면 내 목소리가 가장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신이 나곤했었다.한때는 운동장에서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트랜지스터라디오에 이어폰을 사용하도록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아무튼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야구를 국민들과 더욱 가깝게 만들어 주었고 중계 아나운서들의 사기를 올려 주는 등 우리 야구 발전에 한 몫을 했다.
대통령 베 고교 야구
1966년에 우리나라 야구계에는 기억될 만한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처녀 출전하여 최하위를 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운동장 야구장에 야간 경기 시설이 완공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야간에 야구 경기를 즐길 수 있게 된 일이다. 이 해에는 또 청룡기대회에서 인천 동산고가 대구상고에게 역전승을 거두어 인천을 뒤흔들어 놓았고, 운동장이 만원사례를 이룬 가운데 치러진 지구별 초청대회에서는 선린상고 (善隣商高)가 부산고(釜山高)를 물리치고 우승했다. 이처럼 고교야구가 날로 재미를 더해 가는 시점에서 야간 경기 시설까지 완공되자, 고교 야구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67년에는 내가 속한 중앙일보, 동양방송이 주최하는 대통령배 쟁탈 전국 고교 야구 대회가 마침내 시작 되었는데, 이 대회의 개최와 함께 고교 야구는 절정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대회는 아주 드문 경우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운동장에 나와 시구를 했다. 나는 첫날 첫 경기부터 결승까지 매일 한 두 게임씩 중계방송을 했는데, 내 방송 일정이 다소 무리하게 잡힌 데에는, 중계방송 스폰서였던 신신파스(대표 이영수) 측에서 '박종세의 중계방송' 을 조건으로 내건 것도 작용했다. 나는 연일 신들린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방송에 매달렸고, 관중들은 구름처럼 서울운동장 야구장으로 몰려들었다. 중계방송 관계자들도 운동장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결승전은 선린상고와 경북고의 격돌로 치러졌다.
서영무 씨가 감독을 맡은 경복고는 투수 임신근 선수의 쾌투에 힘입어 강팀 선린상고를 3대 0 으로 물리치고 개교 이래 처음으로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대구에서는 선수들을 태운 카퍼레이드가 실시되는 등 경북고 선수단 환영으로 온 시가지가 떠들썩 했는데, 이 우승이 계기가 되어 경북고는 이후 몇 년 동안 전국대회를 휩쓸면서 고교야구 열기를 더욱 고조 시켰다. 한편 이 대회에서 인기상을 받은 조창수(趙昌秀) 선수와 나의 인연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로까지 이어졌다.
제9회 아시아 선수권대회
1969년 우리나라 야구는 바닥을 헤맸다. 자유중국 대만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필리핀에게도 패하고 최하우를 함으로서 그동안 일본을 물리치고 우승까지 했던 우리나라 야구의 채면은 말이 아니게 구겨졌다. 그렇지만 고교 야구는 전성기글 계속 이어가고 있었는데 선린상고와 경북고성남고 등이 우승을 나눠가지며 팬들을 열광시켰다. 나의 야구 중계방송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계속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1971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제9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는 다시 한 번 일본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때 감독은 김영조, 코치는 김영덕씨가 맡았으며 투수로는 투수 김호중(제일교포) 유백만, 포수 정동진 우용득, 내야수 김응룡 한동화 강병철, 외야수 김우열 박영길 하갑득 등이 활약했다. 이 대회에는 새로이 호주가 참가해서 5개국이 경기를 했는데 1차 리그에서는 일본에게 2대 3으로 패하는 등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쇼크를 받은 김영조 감독이 쓰러져 입원하는 불상사가 생기고 김영덕 고치가 감독 대행으로 2차 리그를 맞았는데 심기일전으로 분발한 한국 팀은 마지막 날 결승에서 3만 관중의 응원 속에서 마침내 8대 3으로 물리치고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날 서울 운동장 야구장의 관중은 물론 전 국민이 환호 했는데 나도 중계석의 마이크를 붙들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라댔다.
군산상고(群山商高)의 등장
이때 동양방송은 군산에 있는 서해방송과 광주에 있는 전일방송과 제휴를 해서 가청(可聽)지역이 서울, 경기, 충청지역에서 호남지역가지 넓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나의 중계방송도 전남 〮북의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게 되었고 이지역의 잠자는 야구 열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전북지방에 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군산상고가 야구부를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다. 군산상고의 야구 재건에는 당시 경성고무의 이용일(李容一) 사장이 적극적으로 후원했는데 나는 이사장의 성화를 못 이겨 몇 차례 군산에서 벌어지는 야구를 중계방송 하기도 했다. 그렇게 호남지역 야구의 상징으로 일어선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라는 닉네임을 얻을 만큼 강력한 팀으로 자라나면서 전국대회 우승을 예약했다.
1972년 지구별 초청 야구대회에서 군산 상고는 강호 부산고와 결승에서 격돌했다. 3만관중이 운집했고 부산고와 군산상고의 재학생, 졸업생들이 응원전을 펼치는 가운데 명승부는 계속됐다. 군산상고 송상복 선수는 안타를 계속 맞으면서도 완투했고 부산고는 편기철과 조기호가 이어 던졌다. 안타는 부산고가 훨씬 많았다. 부산고가 4대 1로 앞서있던 9회 말에 기적은 일어났다. 김우근 김일권 양기탁 김준환 선수의 선전으로 마침네 군산상고가 전통의 명문팀 부산고에게 역전승(逆轉勝)을 거두고 우승을 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고 이때부터 호남야구의 기둥들인 김봉연 김성한 같은 대형 선수들이 계속 군산상고에서 배출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오자 동양방송과 군산 서해방송, 광주 전일방송의 제휴가 중계방송을 통해 잠자던 호남야구를 일깨우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군산상고의 뒤를 이어 광주일고가 전국을 재패하며 돌풍을 일으킨 것도 세 방송의 제휴로 내 중계방송이 호남지역에 울려 퍼진 이후의 일이다. 그때까지는 서울과 인천 그리고 대구와 부산의 고교야구가 전국을 휩쓸고 있었고 장태영(張泰英)으로 대표되는 영남야구가 김양중(金洋中)으로 대표되는 호남야구를 완전히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호남야구의 재기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야구발전의 균형을 잡아준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김윤환선수 3연타석 홈런
1975년은 우리나라 야구계에 큰 불꽃이 타오른 해이다. 중앙일보가 주최한 제9회 대통령배 야구대회에서 전남야구의 희망인 광주일고가 준결승에서 세광고를 물리치고 마침내 결승에 진출했고 전통의 명문 경북고는 역전의 명수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전북의 군산상고를 아슬아슬하게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 바람에 대통령배 고교 야구대회는 당시의 정서인 영호남 대결로 그야말로 빅 카드를 연출했다. 연일 만원을 이루었던 서울 운동장 야구장은 결승을 맞아 경기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벌써 3만관중이 들어차 야구장 문을 모두 닫아 걸아야 할 지경이었고 우리 중계방송 반들도 전투를 치르고서야 입장 할 수가 있었다.
동양방송국은 그동안 TV 부산국을 통해 부산과 대구에 내려가 중계방송을 하며 영남야구를 전국에 소개 했지만 호남지방에서는 전파가 미치지 못해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는데 군산에 서해방송이 등장하면서 제휴가 이루어져 군산상고의 야구팀 급성장에 일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전남광주의 광주일보(당시 전남일보)옥상에 전일방송이 생겨 동양방송이 생겨 광주에서도 중계방송을 하는 등 전남 야구 붐 조성에도 힘을 보탤 수가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전남 야구협회 회장이기도 한 김종태(金鍾太)광주 일보 회장이 큰 몫을 했다. 그런데 이번 대통령배 고교 야구대회에서 군산 상고와 함께 호남야구의 축을 이루고 있는 광주일고가 마침내 결승에 진출 1회 대회의 우승팀인 경북고와 결승을 갖게 된 것이다.
멀리서 올라온 두 학교 전교생과 졸업생들이 열렬한 응원전을 펼치는 가운데 경기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광주일고 4 번타자 김윤환(金允煥)선수가 5회 초에 솔로 험런, 6회 초에 쓰리런 험런, 그리고 8회 초에 다시 솔로 홈런을 쳐냄으로서 3연타석 홈런이라는 고교 야구사상 초유의 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이날 광주는 관중들뿐만 아니라 야구 중계를 듣는 전국의 시청자들을 흥분 시킨 가운데 경북고를 6대 2로 물리치고 마침내 김양중(金洋中) 선수 이후 26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값진 결과를 일구어 냈다. 이 대회의 3연타석 홈런 중계방송 실황은 지금도 야구 역사를 말하는 극적 상황을 엮을 때 마다 자료로 쓰이고 있어 나는 그때의 목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으며 당시의 흥분을 되새긴다. 광주일고는 이 26년만의 우승을 계기로 오랜 잠에서 깨어나 군산상고와 함께 호남 야구 붐의 주역이 되었으며 전국대회를 여러 차례 석권함으로서 야구 명문의 명예를 되찾았다.
광주일고에서는 아주 좋은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지금 미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하고 있는 뉴욕 메츠의 투수 서재웅선수, 시카고 컵스의 강타자 최희섭 선수, 보스턴 레드삭스의 투수 김병현 선수가 모두 광주일고 출신들로 전 국민의 기대와 희망을 모으고 있어 흐뭇하다.
제 11회 아시아 선수권대회
이 해 1975년에는 서울에서 벌어진 제 11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가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했다. 우리나라 대표선수로는 투수에 김호중 강용수 이선희 포수에 우용득 박해종 내야수에 김봉연 김재박 강병철 외야수에 김우열 윤동균 이해창 김차열 선수등이 출전했다. 일본팀은 대학선발의 주축인 비교적 약체로 결승에서 우리나라와 만나 0대0으로 비기는 바람에 승점이 많은 우리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과 싸울때는 아슬아슬하게 극적인 요소가 가미되어야 중계방송도 신이 나는데 서로 점수를 내지 못해 맥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우승을 해서 야구 붐을 이어가는데 일조를 했다.
대륙간 컵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
같은 해 가을에는 제 2회 대륙간컵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가 케나다의 “몬트리올”과 “멍톤”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어 나는 중계방송을 위해 KBS의 이규항 아나운서와 함께 케나타로 향했다. 우리는 미국 LA로 가서 에어 캐나다로 갈아타고 캐나다의 토론토를 거쳐 몬트리올에 도착했는데 선수단은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멤버에 함학수 선수와 박영길 선수가 추가 되었다. 영어보다는 불어를 먼저 하는 몬트리올에서 선수단과 합류한 중계방송단은 캐나다의 동쪽 끝에 있는 뉴브룬스위크주의 멍톤으로 향했다.
지방을 수도나 대도시 못지않게 중요시 여기는 캐나다 당국은 지방도시 멍톤에서 경기전반을 치르고 후반은 대도시 몬트리올에서 마무리하기로 스케줄을 짜 놓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그 먼 거리를 오가면서 대회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캐나다 동쪽에 있는 작은 항구도시 멍톤을 참 잘 갔다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의 ‘마그네틱 힐’이라는 언덕에서 크고 힘이 좋은 자철석(磁鐵石) 때문에 자동차가 저절로 언덕으로 끌어 올려지는 희한한 체험을 할 수 있었는데 제주도의 착시에 의한 자동차의 움직임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다. 또 세계의 가장 깨끗한 바다 중의 하나인 멍통에서 잡힌 바다가제(Lobster)는 어찌나 크고 맛이 있었던지 대단한 맛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몬트리올 엑스포스’ 팀의 홈구장
대회에서 우리나라의 성적은 신통치 못했지만 콜롬비아와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마지막 날에는 니카라과를 이겨 4위를 기록 그런대로 채면을 세웠다. 우리 중계빙송단도 지는 게임이 상대적으로 많아 별로 신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기는 경기를 중계 할 때는 덩달아 힘이 솟았다. 우리 팀이 마지막으로 이긴 경기가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바람에 프로야구 ‘몬트리올 엑스포스’ 팀의 홈구장에서 중계방송을 할 수 있었는데 6만 관중을 수용 할 정도로 거대한 구장이 예쁘고 멋있게 꾸며져 있어서 부럽기 한량없었다. 최종 결승은 역시 세계 야구의 강호 미국과 일본이 격돌했는데 8대 0이라는 점수 차로 미국이 이겨서 동서양의 벽을 실감케 했다.
군산상고 4년 만에 다시 우승
나의 중계방송이 무르익었다는 평가를 받던 1976년, 고교야구에서는 군산상고가 1972년에 우승한 이후 4년 만에 다시 한 번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군산상고와 격돌한 팀은 대구상고로 두 팀은 피를 말리는 투수전 끝에 1대 0으로 군산 상고가 승리를 했다. 이 결승전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누구도 결과를 예측 할 수 없었던 역대 고교 야구의 최고의 투수전으로 기록될 만한 멋진 한판이었다. 군산상고의 투수는 김용남, 대구상고의 투수는 김시진이었는데 이 대회에서는 이들 외에 광주일고의 투수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 하여 서해방송을 통한 나의 중계방송도 자연스럽게 이들 투수전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불을 붙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신일고와 충암고가 한창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국야구 마침내 세계정상에
1977년에 이르러 마침내 한국 야구는 60년 야구사에 전환점을 이루는 이정표를 세웠다. 이해 11월에 중앙아메리카 중부에 위치한 ‘니카라과’ 수도 ‘마나구야’에서 열린 제3회 슈퍼 월드컵 세계대회에서 우리나라가 미국과 일본 같은 세계 야구강국을 꺾고 세계대회 첫 금자탑을 쌓은 것이다. 세계대회에 우리 야구가 뛰어든 것은 1975년 캐나다 몬트리올 대회로 나는 현지에서 중계방송을 하면서 세계의 벅이 높고 험난한 것을 지적하며 실력차가 큰 마큼 4위를 한 것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불과 2년 후에 우리 야구는 그 험난한 벽을 넘어 세계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우리나라는 준결승에서 일본을 만나 3대 2로 물리쳤고 최종 결선에서 미국을 5대 4로 이겨 두 경기 모두 한점 차의 짜릿한 승리를 거둠으로서 기쁨을 배가 시키며 60년 한국 야구의 숙원을 풀었다. 니카라과 세계대회의 선수단은 감독 김응룡, 투수 유남호 이선희 최동원 김시진 유종겸, 포수 박해종 심재원, 내야수 김봉연, 배대성 천보성 김재박, 외야수 윤동균 이해창 김일권 장효조 김우근 등이었다. 귀국한 한국 야구팀은 우승컵을 안고 김포공항에서부터 서울 시청 앞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려 시민들의 환호에 답했다. 이날 나는 퍼레이드 중계방송을 지켜 본 후 선수단을 동양방송 스튜디오로 초청해 직접 인터뷰를 하면서 스스로 감회에 젖었다.
국무총리 표창
1958년 야구 중계방송을 시작한 이래 고교 야구 붐에 불을 당겼고 그렇게 일어선 한국 야구 가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대회가 열리는 곳마다 뛰어 다니며 승리를 외친 내 중계방송의 목소리를 타고 세 번이나 우승을 하더니 마침내 세계야구를 재패하고 만 것이다. 나는 나의 야구 중계방송에 쏟은 열정이 결실을 맺은 것 같아 홀로 숙연 해 졌다. 결국 이해에 나는 방송발전에 이바지 한 공으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처음으로 쿠바에 이긴 우리야구
우리나라 야구는 쿠바에게는 유난히 약해서 항상 꼼짝 못하고 패 했었는데 1978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할렘 국제 야구대회에서는 두 차례 대결에 6대 3, 4대 2로 모두 승리 하는 바람에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또한 우리도 세계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같은 팀을 만나 11대 0으로 7회 콜드께임으로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1978년은 우리 야구가 역사상 처음으로 쿠바를 꺾은 해로 기록되었다. 이때 선수단은 감독 김응룡, 선수는 최동원 김시진 유남호 박철순 박해종 김봉연 김재박 김일환 장효조 김일권 이해창 김준환 김우역등이었다.
김삼열 교장의 건배
같은 해 고교 야구에서는 대통령배에서 부산고가 대구상고를 물리치고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는데 결승전에서 선전한 부산고 양상문 투수의 투구가 각별히 인상적이었던 대회였다. 부산고는 청룡기대회에서도 경북고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해 2관왕이 됨으로서 군웅활거의 야구 판도에서 단연 강자로 떠올랐다.
황금 사자기 대회에서는 신일고가 결승전에서 서울고와 맞붙어 일방적인 경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는데 나의 대학 선배였지만 강의는 같이 들었다 김삼열(金三悅)교장선생님이 감격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나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신일고 설립 이사장의 큰 사위기기도 했던 김교장은 독실한 신앙인이면서도 이날만은 건배를 몇 번이나 왜치면서 만취했던 일이 새삼스럽다.
1978년은 우리 야구사에 또 하나의 족적이 남겨진 해이다. 한국 청소년 야구팀이 콜로비아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다. 10개국 참가한 이 대회에서 부산고의 양상문 투수와 광주일고의 이상윤 투수가 크게 활약 강적 쿠바까지도 벌벌 떨게 하면서 준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이상윤 투수는 투구뿐만 아니라 타격에서도 크게 활약해서 우리나라 야구의 대들보로 떠올랐다.
유수호 아나운서와 하일성 해설위원
1977년부터 고교야구는 서울 운동장 야구장의 관중이 연일 만원을 이루면서 단연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1977년에는 충청도 팀으로는 처음으로 공주고가 전국 대회의 우승을 차지해서 화제를 낳았고 이 우승 이후 공주출신 유력인사 모임에서는 안병준(安炳俊)사장 김광회(金侊會)박사등이 등이 나서서 나를 공주교 졸업생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또 이 해에는 이만수 선수가 활약을 펼친 대구상고가 우승컵을 않았으며 광주상고도 인천고와 접전을 벌린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게 고교 야구의 황금기를 맞은 1979년에는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운동장 주변이 교통마비가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중계방송 청취율도 절정에 달해서 야구중계방송 담당자들의 사기도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내가 중계방송을 할 때 가장 많은 보조를 해 준 유수호 아나운서와 김동엽 감독에 이어 해설을 맡은 환일고 교사 출신의 하일성 해설위원이야 말로 나의 야구 중계방송을 가장 빛나게 해준 분들이다. 이 기회에 두 분에게 심심한 감사와 고마움을 전한다.
준우승 인천고에 보낸 기립박수.
이해 1979년의 고교 야구는 대통령 배 대회에서 선린상고가 부산 상고를 물리치고 우승한 것들 비롯해 청룡기 대회에서는 부산고가 선린고를 물리치고 우승 했으며 고요 야구 붐에 따라 대구에서 새로 생긴 대붕기 대회에서는 신예 배재고가 전통의 인천고를 물리치고 우승했다. 또 17일 동안 연일 많은 관중기록을 남긴 봉황기 대회에서는 광주상고가 인천고를 물리치고 1977년에 이어 다사한번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 해 마지막 전국대회인 황금사자기 대회에서는 경북고가 인천고를 1대 0으로 아슬아슬하게 물리치고 우승을 했다. 관중들은 이 해에만 세 번 결승에 도전해서 준우승에 머문 인천고 선수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세계 야구 준우승
1980년 도꾜에서 열린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는 미국, 일본, 쿠바등 12개국이 모야 자웅을 겨루었다. 우리 한국 팀은 미국에게는 지고 홈팀인 일본에게는 이겼는데 쿠바와의 경기에서 이해창선수가 선제 홈런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패하는 바람에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쿠바가 일본을 1대 0으로 물리치더니 미국마저 5대 4로 이기는 바람에 쿠바가 우승 우리나라와 일본은 나란히 준우승을 차자해서 한국야구의 위상을 그런대로 끌어 올렸다. 이때 우리나라 선수단은 감독에 김응룡, 선수로는 이선희 최동원 김용남 황규봉 유승안 이만수 김봉연 김인식 김용희 김재박 김일권 이해창 종효조 선수 증 쟁쟁한 맴버들이었다.
동향끼리의 격돌
이 해의 고교 야구는 인상적인 경기가 많았다. 대통령 배 대회에서는 결승에서 동향인 광주일고와 광주상고가 격돌했는데 광주일고에서는 발군의 투수 선동열 공주 상고에서는 김태업이 나셨으며 타격은 물론 빠른 발로 정평이 나 있던 허 세환, 이순철 선수가 눈길을 끌었다. 결국 광주일고가 우승을 차지했는데 광주 서중 시절부터 따져서 개교 60주년이 되는 해의 우승이라고 해서 광주일고 선수단은 더욱 뜻 깊어했다. 이때 광주일고의 감독이었던 조창수는 나중에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 코치가 되어 나와의 인연이 계속되었다.
청룡기 대회에서는 투수 박노준 김건우가 활약한 선린상고가 처음으로 결승에 올라온 마산상고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봉황대기에서는 신예 천안 북일고가 전통의 야구명문 배재고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해 천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황금 사자기 대회에서는 이 해에 우승을 한번씩 차지했던 선린상고와 광주일고가 격돌했는데 선린상고의 우승으로 결말이 났다.
해태그룹과 해태 타이거즈
注 : 동양방송에서 국장급 주간으로 근무하다가 1980년 방송 통폐합으로 KBS 방송위원실 주간(국장)을 맡아 재직 중 프로야구 창단을 위해 해태그룹으로 옮겨 달라는 해태 측의 제의를 받고 그곳으로 옮겨 (주) KORAD 대표이사 사장 부회장직을 수행하면서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를 창단, 단장 직을 맡았습니다. 그 과정의 얘기가 생략되었음을 이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침내 해태로
1981년 12월 1일 나는 해태그룹 해태기획 대표이사로 첫 출근을 했다. 광고에 관한사항은 김명하 상무가 알아서 해 주었지만 프로야구 창단는 나도 신경을 많이 써야 했기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해태기획은 본업인 광고대행을 하는 파트와 프로야구 팀을 창단하고 그에 따르는 사업을 관장하는 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프로야구팀의 구단주는 물론 해태그룹 박건배 회장이었고 나는 단장을 김명하 상무는 실행이사를 맡았다. 그리고 초대 감독으로 김동엽씨가 영입되었는데 우선 시급한 문제가 호남 쪽에 절대부족한 선수를 확보하는 문제였고 그밖에 팀의 명칭 유니폼을 정하는 문재도 남아있었다. 선수문제만 빼놓고 다른 문제는 해태기획에서 책임을 맡고 결정을 해야 되었는데 다행히 그 분야의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아져서 하나하나 결정이 되었다.
이름은「해태 타이거즈」로 정해졌고 유니폼은 빨간 윗도리에 까만 바지로 강력한 이미지를 심을 수 있게 했으며 마스코트인 호랑이 얼굴은 용맹하면서도 어린이들ㅇ게 친근감이 느껴지도록 형상화 하는데 힘을 기울이도록 했다.
14명의 선수로 출범
모든 것이 하나하나 갖추어져 갔으나 절대 부족한 선수문제는 계속 숙제로 남은 가운데 마침내 1962년 1월 30일에는 양평동 해태제과 본사 강당에서 해태 타이거즈 창단식이 열렸다. 창단 식에서 처음으로 외부에 선을 보인 해태 타이거즈의 면모는 다분히 기형적이었다. 구단주 박건배, 단장 박종세, 실행이사 김명하, 야구부장 김현진 그리고 감독 김동엽, 코치 조창수 유남호 선수로는 투수 김용남 강만식 신태종, 포수 박전섭 김경훈, 내야수 김봉연 차영화 김성한 조충열 임정면, 외야수 김준환 김우근 김종모 김종윤 선수등으로 짜여져 있었는데 선수가 14명밖에 안 되어서 프로야구 선수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던 것이다.
창단 직후에 홍보담당 이상국, 투수진에 이상윤 방수원이 보강되었고 포수로 김용만 홍순만 등 연습생도 가세했으며 내야수 최영조 외야수 김일권이 합류하여 선수는 가까스로 20명 선을 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후에 도루왕으로 프로야구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김일권 선수가 팀에 합류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한국 프로 야구의 첫 경기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3월 27일 동대문 운동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 전으로 화려한 첫 장을 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시구를한 이 경기에서 MBC는 연장 10회 말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11대 7로 삼성을 누르고 프로야구 첫 경기 승리를 따냈다. 이때 만루 홈런을 맞은 이선희 투수는 그해 시즌을 마감하는 한국 시리즈 최종 6차전에서 OB베어스의 김유동 선수 에게 또다시 만루 홈런을 허용하는 비운을 맞아 국가대표로 날리던 이선희라는 이름에 안타까운 꼬리표를 달고 말았다.
의외의 복병
해태 타이거즈 프로야구 첫 경기는 개막식 다음날인 부산 구덕 경기장에서 제과업계의 라이벌인 롯데 자이언츠 팀과 갖게 되었다. 해태그룹에서는 현장에서 응원을 위해 해태제과 직원들이 50대듸 버스에 나누어 타고 부산으로 향하기로 하는 등 전 임직원이 첫 경기의 승전 분위기 조성에 나셨다. 그렇지 않아도 절대 선수가 부족한 해태 타이거즈 팀이 똘똘 뭉쳐서 파이팅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김동엽감독이 김일권 선수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개막경기를 못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는 다음 날 2시까지 대한 야구 협회로부터 김일권을 출전시켜도 좋다는 도장을 받아오지 않으면 경기를 보이콧트 하겠다는 것이니 단장인 나와 김명하 실행이사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개 격인 낭패를 만난 것이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칼을 들이미는 격인 김동엽 감독의 행태에 어이가 없었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런 막무가내 성격을 알고 있는 나와 김상무는 프로야구 위원회와 대한 야구협회 그리고 이용일 사무총장 댁으로 직접 뛰어 다니면서 사태해결에 안간 힘을 썼다. 그러나 경기 당일인 26일이 밝았는데도 뾰족한 수가 나타나질 않았다.
「김일권 문제」
「김일권문제」는 아주 복잡한 실타래였다. 1974년 봄 군산상고를 졸업한 김일권은 상업은행에 입단하여 실업야구계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3년 뒤인 1977년 야구와 공부룰 병행하겠다는 생각으로 한양대에 입학을 했는데 그해 9월 병역 적령기에 걸려 1한년도 마치지 못한 채 군에 입대하여 경리단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김일권은 1980년 6월 제대를 한달 앞두고 약혼을 한 상태에서 모친을 여의자 생계유지를 위해 실업팀으로 복귀하고자 했고 포항제철 야구팀의 입단 교섭이 물밑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업에서 대학으로 옮긴 선수는 졸업하지 않으면 쌍방 감독의 합의가 이루어지더라도 이적 할 수 없다는 규정에 얽매어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실업선수들이 대학을 디딤돌로 삼아 대학을 옮겨 다니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규정대로라면 김일권이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한양대로 복귀뿐이었지만 1학년으로 복귀하려 해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양대의 김동엽감독이 그의 복귀를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는데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실업의 문을 다시 열어 보려고 여러 모로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김일권은 궁여지책으로 1981년 봄에 한양대 1학년에 복학했다. 이 복잡한 김일권선수의 해태 타이거즈 개막전 출전을 대한 야구협회와 프로야구위원회에서 선뜻 허가 해 줄 리가 없었다. 개막날 아침 너무나 급한 나머지 김상무와 나는 반포동에 있는 이용일 사무총장 댁을 또다시 찾았다.
우리의 긴박한 사정을 알고 있는 이총장은 대한 야구협회 쪽과 전화를 의논한 끝에 프로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직권으로 김일권선수를 해태 타이거즈팀으로 보낸다는 각서를 써서 날인을 해 주었다. 이 각서는 김일권선수가 개막경기 3일 뒤인 3월 31일에 해태 타이거즈 팀에 정식으로 합류하는 보증서 역할을 했다.각서를 받은 시각이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김포비행장으로 나가 비행기를 타고 김해비행장에 내려 오후 2시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구덕 경기장에 도착해야 했다. 그야말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포비행장으로 나가는 길은 그날따라 왜 그렇게 막히는지 이리 돌고 저리 돌면서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12시 15분전, 비행기 표는 미리 사람을 보내 사 놓았지만 제대로 수속을 밟고 탑승하기에는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나는 김상무의 소매를 잡고 무작정 비행기 트랩 쪽으로 내 달렸다. 공항 관계자들이 우리를 제지했고 보안경찰들도 놀라서 달려왔다. 나는 급하게 소리쳤다. “중계방송이 급해서 그렇습니다. 부산에서 두시에 야구 중계방송을 해야 됩니다.”모두들 멈칫했고 그 사이 내 얼굴을 알아본 직원이 우리를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 부산에서 프로경기가 열린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고 박종세가 야구 중계방송을 위해 그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때까지도 아주 당연한 일어였던 것이다.
무사히 비행기에 올라탄 우리는 김해공항에 내렸고 대기한 차에 올라 구덕경기장에 도착한 시각은 1시 40분 경기시작 20분 전이었다. 예상한대로 김동엽감독은 우리가 도장을 받아오지 않으면 경기를 보이콧할 기세로 선수들을 아무렇게나 놔두고 있는 상태였다.김감독은 우리가 받아온 김일권선수에 대한 각서와 사무총장의 날인을 확인하고서야 손에 빨간 장갑을 끼고 운동장에 나가 선수들에게 출전준비를 시키기 시작했다. 김동엽감독은 이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본부석 앞에 와서 인사도 하고 관중석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는 등 독특한 제스처와 쇼맨십으로 ‘빨간 장갑의 마술사’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인기몰이를 했다. 김 상무와 나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행동을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구덕 경기장에는 부산 롯데 팬은 말 할 것도 없고 광주와 서울 등지에서 몰려온 수천 명으로 헤아려지는 해태 응원단도 뒤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도 모른 채 응원에 열중하고 있었다. 김상무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 채 본부석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 마침내 해태 타이거즈 첫 경기는 막이 올랐다.
참패를 당한 첫 경기
이날의 경기는 제과업계 라이벌끼리 격돌인데다가 영호남의 대결이라는 정서도 어우러져 흥미를 배가시켰고 그래서 응원단들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해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해태투수 신태중 선수는 초반부터 얻어맞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볼을 아무데나 던지는 것이었다. 감독이 투수를 교체 해주지 않으니까 몸이 지쳐 가면서 오기가 난 신태중 투수는 볼을 포수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고 백네트로 던져대는 것이었다. 프로야구가 아니라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구단 관계자들이 김동엽감독을 가까스로 달래 투수가 교체 되면서 야구 경기는 정상으로 돌아 왔지만 경기결과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14:2 프로야구 첫 경기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그야말로 참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멀리 부산까지 응원을 왔던 그 많은 해태 응원단의 분노는 대단했다.
프로야구와 돈
이렇게 프로야구는 시작 됐는데 해태 타이거즈는 운영자금이 뒷받침 되지 않아서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김상무와 나는 이 문제를 강력히 거론 ‘초창기부터 프로 야구단이 돈 걱정을 하면서 어떻게 팀을 제대로 이끌 수 있겠느냐? 자금의 넉넉한 지원이 없을 경우 우리는 야구단 운영에 손을 때겠다.’ 는 발언을 남기고 회의장을 나와 버렸다. 사장단 회의에서는 즉각 여러 반응이 나왔고 회장님 앞에서 말을 너무 함부로 한다는 질책성 항의도 들어왔다. 그러나 나와 김상무의 뜻은 변할 수가 없었다.
프로팀은 역시 돈이었던 것이다. 며칠 후 박건배 회장은 나와 김상무를 술집으로 불러 소주를 따라주면서 회의엣 올바른 지적을 해 주었다며 오히려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그룹사에서 돈을 내야 구단을 운영 해 갈텐데 회장인 자기가 너무 앞서 나갈 수도 없어서 그동안에 고민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해태군단에는 다시 윤기가 돌았고 팀 성적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김동엽 감독의 사퇴
해태 타이거즈는 선수 14명으로 시작햇지만 김봉연 선수의 홈런, 투스 겸업인 김성한 선수와 김종모선수의 타격 김용남 이상윤 투수의 활약등으로 그런대로 중간성적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하루는 대구에서 경기를 보기위해 나와 김상무가 대구 구장에 도착했는데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그 아웃에 있어야 할 김동엽감독디 일루 베이소 쪽 코처스 박스에 있고 3루쪽 코처스 박스에는 코치대신 신태중선수가 서서 손을 흔들며 사인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것을 알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진상을 따저 보았더니 전날 밤 술을 마신 김 감독이 조창수 코치와 윤남호 코치를 불러 야단을 치는 과정에서 맥주병 몇 개가 날랐고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는데 코치들의 가족까지 끄집어내어 모욕적인 말을 하는 바람에 두 코치가 자리에서 보따리를 싸 서울로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른쪽 해설 김동엽
이 문제는 언론에 알려졌고 나는 기자회견까지 하는 등 골머리를 알았는데 결국 김동엽감독의 사퇴로 결말이 났다. 김동엽감독은 황해도 사리원 출신으로 니의 경복고 후배인데 아주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한때는 나와 야구 중계를 같이 하면서 명쾌한 해설로 인기를 얻었고 야구지식이 풍부해서 프로야구 창단에도 큰 공헌을 했는데 술이 문제였다. 술만 마시면 사람이 돌변해서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1997년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식장에서 나는 그와 함께 했던 시절의 미운 정 고운정이 떠올라 흐르는 눈물울 감출 수가 없었다.
연패의 사슬을 끊고
결국 해태 타이거즈는 얼마간을 조창수 코치가 감독대행을 하는 체제로 팀을 운영해야 했는데 나와 김상무도 덩달아 팀 운영에 힘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불광동에서 문제의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78동 604호로 이사를 했는데 나는 집 내부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아침에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 출근했다가 김상무와 함께 자동차로 오후 2시에 야구 경기가 열리는 광주나 부산 아니면 대전으로 달려가서 경기를 본 후 저녁 7시쯤 다시 귀경길에 올라 자정이나 새벽 한, 두시에 집에 들어오는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를 이긴 날은 그래도 몸이 가벼웠지만 진날은 온몸이 무겁고 신경이 날카로워서 집에서는 온 식구가 나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전에 없이 조심을 하곤 했다. 한번은 팀이 8연패 인가. 9연패를 당한 일이 있었다. 구단 전체가 깊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정말 난감하고 죽을 맛이었다. 반전시킬 아이디어를 짜내다가 팀 전체가 뱀탕을 먹어보기로 했다. 구단주도 나도 뱀탕은 처음인데다가 특히나는 어려서 뱀에게 물린 적도 있어서 아주 질색하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팀을 위해서 동참하기로 했다. 박건배 구단주도 한 사발 마셨고 나도 눈 딱 감고 마셨다. 구단주와 단장이 마시는데 선수들이 우물거릴 수는 없을 터였다. 김일권 선수가 좀 버티었지만 결국은 모든 선수들이 뱀탕을 마셨다. 그런데 다음날 뱀탕의 효과가 기분 좋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해태 팀은 연패의 사슬을 끊고 그날 경기를 이기더니 그로부터 연승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심리적인 효과였겠지만 정망 놀랄 정도의 역전 상항이 벌어진 것이다.
선수부족에 감독도 없이 대행 체제로 꾸려진 해태 타이거즈는 그러나 홈런왕 김봉연선수 타점왕 김성한선수의 뛰어난 활약에 김종모, 이상윤, 김용남 선수 등이 힘을 보태 프로야구 원년을 4위라는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군산상고, 광주일고의 야구가 바탕을 이루는 막강한 저력의 팀 해태 타이거즈는 우승이 멀지 않았다는 예감으로 시즌을 마쳤다.
김응룡 감독 영입
프로야구 원년 시즌을 마친 직후부터 나는 감독 영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마침 미국에서 야구연수를 마친 김응룡감독이 귀국해 있었고 나는 그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김감독은 1962년 대만 아시아 대회 때 나와 인연을 가졌는데 그때는 부산상고 졸업반으로 국가 대표가 되어 크게 활약을 했다. 그 뒤에도 선수 생활을 하다가 감독으로 변신 아마추어 국가 대표 팀을 맡아 큰 족적을 남겼었는데 이번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한것이다. 누구나 욕심을 낼만한 야구계의 인재였다. 나는 프로 야구 위원회 이용일 사무총장의 도움을 얻어 그와의 만남을 계속했는데 해태에서도 그룹차원의 뒷받침을 해 주어서 마침내 김응룡감독을 해태 타이거즈 사령탑으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또 투수로 재일동포 주동식선수, 포수로 재일동포 김무종선수를 영입해서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해태 나이거즈는 이처럼 김응룡 감독 체제로 분위기를 일신 원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프로야구 2년째를 맞이했다. 해태 팀의 실행이사도 김명하 상무에서 정기주 상무로 바뀌어서 나는 상무와 같이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다. 새벽에 서울로 돌아오면 정상무를 서초동 아파트에 내려주고 압구정동 집애 도착하는 강행군이 계속 된 것이다. 그래도 첫 해와는 달리 해태 팀이 이기는 날이 많아서 피곤한 줄 모르고 다닐 수 있었다.
해태 타이거즈 한국 시리즈 우승
1983년의 프로야구전기 리그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김응룡 감독의 특유한 뚝심과 경기운영의 정교함, 프로야구 최초의 자율 야구가 성공을 거두어서 마침내 우승을 차자했고 후기 우승팀인 MBC청룡과 하국시리즈 우승컵을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그때의 MBC 청룡 감독은 전 해에 해태 팀과 결별한 김동엽 감독이었는데 그는 겉으로 보기에도 눈에 불을 켜고 칼을 갈고 있는 모습이었다. 양 팀 간에는 불꽃이 튀는 긴장감이 흘렀다. 더군다나 MBC팀에는 하기룡, 이길환, 오영일 투수와 김재박, 이해창, 이종도 등 물이 오를대로 오른 선수들이 버티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섣불리 경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 그런데 10월 12일 개막 예정이던 한국 시리즈가 사흘 뒤로 미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10월 9알 미얀마에서 아웅산 묘소 폭파라는 참변이 터진 것이다. 한국 시리즈는 국장을 치르고 난 10월 15일부터 시작이 되었다.
매스컴에서는 한결같이 MBC가 해태보다 객관적인 평가에서 우세하다는 예상을 싣고 있어서 나의 심경은 답답하기만 했다. 나는 열세 분위기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경기 바로 전날 또 한 번 예상 밖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김동엽감독 음주후 택시기사 폭행” 도하 일간지 스포츠 면을 장식한 것이다. 김감독의 슬 사고는 MBC팀의 사기에 악영향을 기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보너스 액수에 불만을 품은 MBC선수들이 지리멸렬 해 있다는 정보도 있었던 차였다.
광주에서 벌어진 한국 시리즈 1차전은 7대 4로 해태가 이겼고 서울 잠실구정에서 2차전은 8대 4로 이겼다. 3차전도 잠실에서 펼쳐졌는데 또다시 5대 3으로 해태가 승리를 차지했다. 4차전은 1승이라도 거두려는 MBC와 4차전으로 끝을 내려는 해태 간에 연장 15회의ㅣ 혈전을 벌렸으나 1대 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최종 5차전은 잠실구장에서 벌어졌는데 이날은 주동식이 잘 던지고 김일권, 김종모, 김성한의 눈부신 활약으로 결국 8대 1로 대승을 거두었다.
마침네 해태 타이거즈가 프로야구 첫 번째 패권을 차지한 것이다.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당했던 김봉연 선수가 재기하여 MVP가 되었고 어깨부상을 이긴 이상윤투수 그리고 김용남 투수도 제 몫을 다 해 주었다. 3만관중이 환호하고 폭죽이 터지는 가운데 해태 타이거즈 한국시리즈 우승은 전 국민의 축하를 받았다. 나는 만감이 오가는 가운데 잘 싸워준 김응룡감독과 코치 선수들을 얼싸안고 기쁨의 환호성을 마음껏 질러댔고 박건배 구단주도 감격에 겨워서 눈시울을 붉혔다.
1958년부터 여구 중계방송을 시작해서 우리나라 야구의 근간인 고교야구를 흔들어 깨워 붐을 조성하는데 일조를 했고 아마추어 성인야구의 세계진출을 위해 마이크를 챙겨들고 여러 차례 해외 나들이를 했으며 프로야구 원년 팀 창단에서부터 참여해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우승의 감격까지 맛 볼 수 있게 된 나는 나에게 너무나 큰 행운을 주신 하늘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月 松 박종세
동영상 보기
1972년 7월 19일 군산상고 역전승 그때 그 화면 동영상입니다. 음악을 끄시고 보셔요.
이혜자 (미국 보나기획 대표) 선생님 글
저도 엄청난 팬이었어요 체력은 국력이라고 참 좋은 프로그램 이었습니다 중계방송 보느라 서울 시내가 응원의 함성소리로 가득했었는데요 화 보
2,000년 7월 13일 대한 체육회 창립 80주년을 맞아 대한 체육회에서 박종세, 임택근, 황우겸아나운서에게 스포츠 중계방송 공로로 공로패를 수여했습니다. 대한 체육회가 중계방송 아나운서에게 공로패 수여는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박종세님이 KBS에 근무하던 시절 정동연주소를 남산으로 옮기고 첫해 연말특집 아나운서 언 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입니다. 박종세 아나운서를 비롯해서 장기범, 민병연, 강영숙 ,황우겸, 김인숙, 최세훈, 송석두, 윤영중, 이현숙, 장금자, 송영필, 박종세, 이광재, 임택근, 강찬선, 임동순, 문복순, 강익수, 최계환님이 함께 했고 박종세, 이광재, 임동순님은 1956년 KBS아나운서 입사 동기였습니다.
KBS 야구선수시절 박종세, 임택근, 조백봉님입니다.
박종세님이 훈장을 받던날 부인 구숙자님과 함께한 사진입니다.
5.16민족상을 받던날의 박종세님과 부인 구숙자님입니다.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박종세 아나운서
2014년 4월 7일 박종세 아나운서 조형미술의 선구자 최만린 선생님 현대미술관 초대전에서
앞줄 왼쪽부터 문복순, 박종세, 황우겸, 최만린, 박찬숙, 뒷줄 왼쪽부터 윤영중, 황인용, 이헤옥, 박민정, 이혜옥, 김규홍 아나운서
왼쪽부터 문복순, 탤런트 김민자, 최불암 내외분, 김규홍, 박찬숙, 황우겸, 윤영중아나운서
문복순, 박종세아나운서 1950년대 60년대 초 KBS에서 함께 방송했던 시절의 추억을 떠 올리며 반가운 마음으로
김동건 아나운서 방송 50년 기념회에서
박종세 원로아나운서와 김동건
박종세 아나운서와 황우겸, 전영우, 전응덕, 임국희, 성선경, 차인태님등 원로 아나운서와 전 전경련 회장을 지내신 강신호 회장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박종세님 가족 부인 구숙자, 아들, 박준수, 박증수, 며느리 유선영, 황재선 손녀 박신애, 박소현, 박상희, 손자 박상일님이 함께했습니다.
2014년 80회 생신을 맞던 그해 박종세님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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