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방송

일제 강점기 우리말 방송인들과 해방공간의 방송

이장춘 2011. 8. 10. 01:50

 

 

 

 
일제 강점기 우리말 방송인들과 해방공간의 방송
 

 

일제 강점기 경성방송국에서 우리말 방송을

하시던 분들이 해방이 되면서 해방공간의 방송을 이끌어

왔습니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 방송을 하신 분들이여서 세로운

세상에서 방송을 할 수없는 일이라고 사양했지만 비록 일제 치하에서

 방송을 했다 할 지라도 우리말과 문화를 지키기위해 힘을 기울여 온분들이고

또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도 벌려서 이 나라 독립에 기여 한 분들이어서

해방된 나라에서 방송을 한다해도 그 성향에 별 문제가 없었던 터라

 새로 방송국을 접수한 군정청은 일제 강점기의 방송인들들

주축으로 새로운 방송국을 이끌어 갔습니다.   

 
 
 
 

 

 

일제때 우리말 방송을 하시겠다는 분 가운데는
지성과 인격을 갖춘 인사가 많았습니다.  우리말 방송을
 실시하던 초대 방송과장 윤백님이 그렇고 그 뒤를 이은 김정진님,
제 3대 심우섭님, 또 심우섭님 시절을 전. 후해서 방송국에 들어오신
시인으로  소월을 길러 내시기도 한 안서 김억님, 김억님과  동시대에
 비슷한 길을 걸으셨던 청천 김진섭님,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을 나오시고
언론인으로 명성 높던 이정섭님,  우리나라 초기 국악과 양악을 겸비한
이혜구님, 널리 알려진 문학가로 알려지신  이하윤님. 교향악의
 선구자이고 봉선화를 작곡하신 홍난파님, 여류시인 모윤숙님
이런 분들이 우리말 전담방송인  제 2 방송을
이끌어 오신 분들입니다. 

 

 

 

 

이 분들이 꼭 방송 전문가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우리말과 문화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하신 신 분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계셨기에 방송국 안에서는
우리방송인이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일본 방송인보다 우위에 있었고
고집 스럽게 우리말과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고 선배 방송인들에게 얘기를
 들어왔습니다. 이분들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다른 곳에서 말씀을 드렸기에
 줄이겠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서 우리말을
공식적으로 사용 할 수 있던 제 2방송과는 기본적인 먹고 살거리를 
 해결 하면서 스스로의 생각을  펴 나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장이기기도 해서 방송국에 들어와 소신을

편 경우가 많았습니다.

 
김정진님이 우리말 강좌를 신설해서 우리말을
 바르게 보존 하려는 노력을 기울열는가 하면  심우섭님은

제 2방송에 일본어를 섞으라는 지시에 그것을 받아드리지 않고

물러 나셨습니다. 홍난파님은 봉선화 같은 항일 음악을 작곡해서 널리

보급했습니다. 이혜구님은 국악을 제대로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국악이론을 집대성 하셨습니다. 방인근님, 이서구님, 이관구님 등

우리가 귀에 익은 분들도 제 2방송과에서 알게 모르게 항일

운동에 참여 하신 분들입니다. 부산방송국에서 서종호님이

중심이 되어 구국동맹을 결성해서 항거 했습니다.

 

 

  

 

 

 
경성방송국에서 방송을 직접 담당하신 외에도

얘기 할 사항이 있지만 다른 곳에서 말씀을 드렸기 때문데

사진없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술인들 역시 힘이 미치는 한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외국에서  들려오는  방송을 듣고

  독립 운동가들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해서 우리나라 독립에

보탰습니다.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단파 수신기를  가지고 해외방송을

 듣는 일은 지하에서 계속되었습니다. 한덕봉님이 일상 쓰시던 방송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던 얘기는 해외에서 들려오는 방송이 국내에 영향을 

미치면서  위력을 발휘 했습니다.  일본방송인 한 간부가 해방 되던 날 

 말하기를조선옷을 입고 있으면 미군 폭격을 받지 않는다는소문이

 있어서 그런 일이 있겠느냐 싶었지만 일본이 항복하는

날이 현실화 되었다고 했습니다.

 
위 말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소문은
외국방송을 듣고  전한 것이  소문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1942년 단파수신 사건이 일어나던 그 무렵부터 중국 중경과

센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되는 VOA는 해방이 머지 않았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일본에 협조 하지 말고 참고 기다려라. 미국 B-29가

조선 상공을 날더라도 한국인에게는 폭격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

하라. 등등을 비롯해서 광복군의 활동, 임시정부 구미위원회

활동, 연합군의 전쟁 승리소식 등의 내용을 담은

 방송은 계속되었습니다.

 

중경에서 김구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의 목소리로,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는 힘차게 들려오고 이 방송을 듣는 분들에게 피를 끓게 해서

말은 소문, 소문으로 세상천지에 퍼져 나갔습니다. 이미국의 소리(VOA)

아나운서로 방송을 한사람은 학생신분의 황성수, 유경상님이었고 중경에서는

신기언님이 방송을 하셨습니다. 이분들은 국내에 있는 가족의 생명을 위협 받으며

독립운동을 한디는 마음으로 방송에 임했습니다. 황성수님이나 신기언님은 뒷날

해방된 조국에서 입법의원, 국회의원을 하셨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살아온많은

지식인들이 마지 못해 한 일들이 간혹 친일 행각으로 지탄 받는 가운데서도

방송국에 근무하셨던 분들이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이분들의 투철한

항일 의식으로우리말과 문화를 지켜오면서 독립운동에도

도움을 주어 왔기 때문으로 봅니다.

 
 

  

1934년 연말 특집 방송극을 끝낸 제2방송과 직원들의 모습으로

이하윤선생님을 미롯해서 그시절 제 2방송과 우리말 방송을 했던 이혜구,
김문경, 최아지, 이석훈, 박충근, 남정준 님이 같이 하셨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동심초 이규도-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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