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박사, 김구선생님 환국과 해방정국, 그때의 방송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 박사가
군정청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10월 17일오전 그 소식을 KBS를 통해서 알렸습니다. 지금 육성은 그때 그 상황을 취재한 방송기자 1호 문제안 선생님이 그때의 얘기를 들려 주고 계십니다.
10월 17일 KBS 첫 방송을 통해 그 유명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라는 말이 방송되었고,그 말은 이승만박사가 기회 있을때마다 강조했습니다. 곧이어 10월 20일 중앙청광장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첫 대중 연설을 통해 스스로의 입장과 나름대로 국민들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 했습니다. 말로만 들어오던 이승만박사를 국민들이 처음 대하던 날이었고 이승만 박사의 환국으로 해방되던날부터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의 우위정국에서 좌, 우 균형을 찾아 갔습니다.
중국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는 그 정통성을 인정받으면서 국민들의 환영속에 환국하려는 생각이 있었지만 군정은 누구에게도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그랬듯이 김구선생님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환국도 모두 개인자격으로 이루워 졌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입국이 비밀리에 이루워졌지만 임시정부의 귀국은 공개리에 국민의 환영을 받는 가운데 이루워 졌댜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포공항을 통해서 들어온 김구선생님은공항에서 곧바로 방송국으로 향해서 방송을 통해 제 1성을 전했습니다. 내용이 간략함으로 전문을 올리겠습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강산에 발을 들여 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무르다가 23일 상해를 떠나 당일 경성에 도착되었
습니다. 나와 나의 閣員 일동은 한갖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 왔습니다.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동포가 하나로 되어 우리의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과접촉할 기회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기에 오늘은다만 나와 나의 동료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김구선생님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의 입국환영식은 1945년 12월 19일 중앙청 광장에서 있었고 그 다음날인 20일에는 이승만박사와 김구선생님, 하지 사령관이 중앙청에서 만나 제반 상황과 대응책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로서 국내에서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 했지만 신탁통치등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고 날이 갈 수록 굳어져 가는 3.8선으로 모든것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1948년 8월 15일 결국 남한만의 대한민국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승만박사, 김구선생님 귀국방송 체험답
중앙 방송국장 이혜구선생님 글
방송인으로 가장 유쾌한 것의 하나는 해외요인의
귀국 제1성 방송이었다. 각신문사의 기자와 사진반원은
요인 귀국 예정일에 앞서 여의도 비행장에 파견되어 해외요인이
고국 땅에 제 1 보를 내디디는 것을 대기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어떤
신문은 김구씨 귀국 때에 예정일시에 도착 못한것을 예정일시에 도착한것처럼기사를 꾸며내서 보도한 것경우도 있었다. 설래는 아나운서들은 신문보다 더 신속한 보도를 해야 할 방송국이 요인 환국방송에 대하여 여태까지 지시를 하지 않으니 무었을 하고 있느냐. 고 화급히 재촉하였다. 나는 해외 요인이 도착하는 즉시로마이크를 통하여 그 정견을 말하고 인사말을 단 몇 마디라도 들려 주도록 해야겠다고 켈른 퍼시블과 상의하였던
것이고 방송에 대하여 이해성이 있는 “캘른”은 염려말고자기에게 맡기라고승낙 하였던 것이다.
과연 이승만 박사는 귀국 다음날
김구씨는 11월 23일 환국 당일 바쁘신 몸으로
방송국에오셔서 고국동포들에게 마이크를 통하여
첫 인사를 하셨다. 방송이끝난 후 이렇게 신속하게 그 음성을 직접 방송하기에 성공한 것은 당신의 공덕이라고 치하하는 캪튼 “퍼시블” 은 “아유 해피 나오” 즉“ 이젠 좋으냐?"라 하고 생긋 웃었다. 그 당시의 방송 뉴스가 신속하고 정확한것은 정평이었고 그런 호평을 받은것은 우연지사가 아니었다.
문제안 선생님의 글에서
1945년 10월 17일 오전 11시 30분 !
서울중앙 방송국 제3스튜디오, 3평도 못되는 작은
방송실에서 윤용노 아나운서가 “본 방송국 문제안 기자가
지금 방송실에 뛰어들어 와 중대 기사를 쓰고 있으니 잠간만
기다려주십시오“ 하면서 신나는 행진곡을 틀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서 나는 전날 10월 16일 금요일 오후 4시에 쥐도 새도 모르게환국한 후 당시의주한 유엔군 사령관 하지중장의 안내로 다음 날인 10월 17일 토요일 중앙청 회의실에서 국내기자단과 첫 회견을 한 이승만 박사 환국 기자 회견 기사를 쓰고 있었다.
첫 장을 다 쓰자 윤용노 아나운서는
더 참을 수 없어 첫 장을 낚아채다시피 해서
방송을 하고는 다음을 기다릴 수 없어서“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다시 한번 되풀이 읽는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둘째 장을 쓰고 그러면 윤용노 아나운서는 다시 첫 장과 둘째 장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 하고 나는 계속해서 셋째 장을 쓰는 그야말로 숨 가쁜 순간의 연속 이었다.
바로 내 옆에는 기사를 하나 하나
세심하게 검열하던 미군대위 검열관도
너무 흥분한 탓인지 검열할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내 옆에 묵묵히 선채 기사 쓰는 내 바쁜 손끝만
내려다 볼 뿐이었다. 이렇게 쓰여진 나의 기사는
써지는 대로 전파를 타고 전국방방곡곡에 퍼져
나갔다. 이시간이야 발로 내 일생 최고의
시간이었던 것만 같다.
노정팔 선생님의 글
1945년 11월 23일 중국 중경에
머무르고 있던 김구주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이
귀국했다. 김구선생은 비행장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중앙방송국으로 직행, 고국동포들에게 귀국 제 1 성을
발표했다. 소개하는 아나운서마저 약간 흥분한 어조로
“우리들의 지도자 김구선생의 애국동포에게 고하는
귀국 제 1 성을 모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할 정도로 감격 속에 싸여 있었다.
이때 방송국은 그야말로 뉴스의 진원지가 되어
카메라의 집중세례를 받았고 내외신 기자의 취재 경쟁으로
남대문시장을 방불케 했다. 스튜디오 주변을 비롯해서 복도, 현관
까지 사람들로 꽉 차서 방송을 제대로 진행하기도 어려울정도였다.내가 방송국에 처음 들어가 나흘 만에 일어난 큰일이라어안이 벙벙해 눈앞에 벌어지는 모든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방송국이란 이렇게 대단한 힘을 가진 기관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 환국때의 모습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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