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6.25전쟁이 낳은 불후의 명작, "장마루 촌의 이발사"와 작가 박서림(朴西林)님

이장춘 2011. 8. 6. 11:19

 

 

6.25전쟁이 낳은 불후의 명작, "장마루 촌의 이발사"와 작가 박서림(朴西林님)

 

 

인류억사에 수많은 전쟁이 있어왔고

삼국지를 비롯해서 전쟁과 평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수많은 불후의 문학 작품들이 전쟁을

바탕으로 테어났습니다. 1958년 KBS에서 드라마로

 방송된 이래 영화로, 소설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준

 박서림 작 "장마루촌 (마을) 의 이발사"도 한국전쟁

 6.25가 낳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습니다. 

 

 

 

 

 박서림의 데뷔작이면서 불후의 명작이 된

 장마루 촌 이발사는 KBS가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

기념으로 거대한 상금을 걸고 모집한 방송작품이었습니다.

50만환! 쌀 한가마니에 만 삼천환, 서울의 한 달 하숙비 만 삼천환

그때의 5급 공무원 초봉 만 7천환정도 이었습니다. 지금이야

40가마니 별것 아닐는지 몰라도 어려웠던 시절에 KBS가

쌀 40가마니 값을 걸고  작품을 모집 한 것은 그때까지

유례를 잦아 볼 수없는 일이었습니다.

 

 

 

97편의 작품이 응모한 가운데 김팔봉,

정비석, 김희창, 최요안, 박동근, 이호원등 당시

명성을 떨치던 분들이 심사를 해 주셨습니다. 심사결과

박서림 작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단연코 우수작으로 뽑혔습니다.

심사위원 김팔봉님은 “작가가 전란 후 어지러워진 사회질서를

어떻게 하면 바로잡고 국민들의 생활감정을 윤택케 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 같다” 고 평가했습니다.

 

 

 

원래 소설로 된 이 작품을 인기작가 최요안님이

드라마로 각색해서 박동근님의 연출로 동순역에 주상현(周尙鉉),

 순영역에 임옥영(任玉英), 정숙역에 윤미림 그리고 고은정, 오승룡. 구민

정은숙 등 인기 성우들이 출연해서 그해 광복절을 계기로 방송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1959년 당대의 최고 스타 최무룡과 조미령이 주연하는 영화로,

또 1969년 최무룡과 김지미가 주연한 영화가 상영되었으며 그로부터

박서림은 방송드라마 작가로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주제곡은 박재란이 불렀습니다.

 

 

지금 듣고 계시는 박재란의 노래

「장마루촌의 이발사 」그 영화의 그 주제곡

그 노래! 실로 심금을 울려주는 노래입니다. 장마루촌

 이발사의 작가 박서림님이 이 노래를 들으시고 메일울

 보내 오셨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깁니다.

 

 

이장춘 선생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보내주신 박재란의 노래, <장마루>주제가

 맞습니다. 얼마나 찾았던지.. 참 그리웠습니다.

군부대 위안무대에서 순영이 노래 부르고 관객석에

 숨어서 동순은 들으며 누물짓고.. 그 장면이

되살아나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사랑을 맹세했던 동순, 순영 한 쌍의 남녀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동순은 성 불구가 되어 순영을

 만나기가 어려웠고 동순을 그토록 사랑했던 순영은 동순이

전사한줄 알고 간호장교가 되면서 두 사람의 엇나간 사랑 이야기, 

그 감동의 드라마는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

습니다. 작가가 군에서 5년간에 걸친 심리전을 전개하면서 특히 지리산

일대의 공비 토벌 작전에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공산당의 세계로

변하는 전쟁의 참상체험하면서 작가의 머릿속에 그려진

 그 상황을 고향 장마루에 접목시켜 훌륭한 작품을

쓰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염대하님은 "자유세계" 에서 박서림님과 함께

 일하던 선배 기자로 소설가입니다. 

 

  

1930년 충남 舒川郡 서천읍에서 테어난

 작가 박서림님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2하년 재학중

 6,25를 만나 5년간 군 심리전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KBS밖에

 없던 시절에 대구, 남원방송국을 통해서 대적 선무방송을 했고

특히 지리산 공비 토벌을 벌리면서 남원방송국 직원들과는

한 식구처럼 지내기도 했습니다. 

 

 

 

 

장마루 촌 이발사의 배경이 된  그 마을이

어디있는 정마루촌인가를 놓고 여러 얘기들을 듣습니다.

장(長)마루ㅡ 이것은 곧 긴 산마루를 뜻하는 것이어서 전국에

같은 이름이 종종 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고 또 崔薰 감독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강원도 일선지구에서 찍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장마루 촌의 배경은 박서림님의 고향

충남 舒川郡 서천읍 新松里 1구 장마루이고 여기에

 村을 붙여서 장마루촌이 된 것입니다.

 

 

 

 

장바루촌 마을에는 2004년 10월 28일에 세운

 박서림님의 장마루촌 이발사 문학비가 있습니다. 박서림님은

1960년대로부터 오랜기간 방송된  KBS의  “즐거운 우리 집” 3,000회와

그와 비숫한 시기에  TBC에 이어 방송통합후 KBS에서도 계속 방송된  ‘아차부인,

 재치부인“ 4,000회를 비롯, 라디오, TV 에서 수많은 드라마 작품을 써 1960년대에서부터

 방송작품을 끝낸 1998년까지 인기 드라마 작가로 활동했으며 방송 작품중에서 영화로

촬영되어 상영된 작품도 많고 또 책으로 발간 되기도 했습니다. 방송작품을

끝냈어도 시를 쓰고 지난날의 작품을 정리 하는 등 80이 넘으신 

지금도 쉴 사이 없이 활동 시는 모습을 봅니다. 

 

2015년 2월 24일 방송기술인 이인관 선생님

 8주기 글을 보내드렸더니 답글로 메일을 보내 주셨

습니다. "1937년이면 저의 큰 형님이 이리방송국에 근무할 때

입니다. 옛일을 생각케 하는군요." 라고 하셨습니다. 전화를 드렸더니

 형님 성함은 박윤근으로 6.25무렵까지 방송국 기술과에 근무하시다가 6.25후

정동 옛 방송 협회자리 부근에서 한국방송산업주식회사를 경영하셨고  KBS 중앙

방송국장을 지내신 적이 있는 이운용선생님이 그 회사의 사장으로 재직하신적이

 있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송영호, 유병은 선생님과도 친분이 깊고 그런 인연

으로 남원방송국 심리전 요원으로 근무할때 그 방송국 개국책임자였던 유병은

선생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으로 일했던 박서림 (본명 박홍규)

선생님 자신이 작가가 된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로 하셨다.

  자세한 사항은 약력과 홈페이지로 대신 합니다.

 

 

 

박서림님 홈페이지 바로가기

 http://www.parkseolim.pe.kr

 

 

동영상 보기

 

 

 

 

박서림-본명 홍규님의 약력

 

 

0. 1930년 충청남도 서천(舒川)에서 태어나 서천국민학교 졸업

0. 1942년 욱구(旭丘)중학(지금의 경동)에 입학 3학년 때 해방.

0. 1949년 경동(京東) 6학년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입학 

0. 1950년 12월 군에 입대해 5년간 군복무 56년 3월 대위로 전역  

0. 1958년 KBS 50만환 현상 방송소설모집 장편 <장마루 촌의 이발사>당선

0. 40년간 방송작품 활동

0. 1980년 <아차부인. 재치부인>을 출간 (일월 서각)

0. 1998년 방송원고를 절필(絶筆)하고 <일기와 작품>정리

0. 2002년 시작(詩作) 시작, 시방문학회(詩房文學會) 참여

0. 2004년 한맥문학 6월호에 <조개구이> 등을 추천받아 시작 계속

0. 2004년, 홈페이지에 수록한 <고전산책>(古典散策) 발간, 책명 : 한여름밤의 고전산책 (샘터사)  

0. 2005년 <즐거운 우리 집> 발간, 책명 내 안에 파랑새가 있다. (KG 북플러스)  

0. 2006년 3월 첫시집 <4차원 동물> 발간.

0. 2007년, 한국문인헙회 시분과에 가입

0. 2008년, 데뷔50주년을 맞아 작품집 출간 추진 중

 

    <방송 작품활동>

 

* 40여 년간 수많은 단막극, 라디오 연속극, 홈드라마, TV 홈드라마,

  다큐멘타리 등을 썼고 그 중에서

 <장마루 촌의 이발사>(두 번),<목요일에 만납시다>,

 <시동생>,<계동아씨> <사랑의 느티나무>(<고향>는등은 영화화 되었음

 

* 장기간 집필한 작품으로는 <아차부인 재치부인> (4.000여회),<즐거운 우리집>(3,000여회),

  <절망은 없다>, <고승열전>, <TV‘부부만세>, <TV ‘즐거운 우리집’> 등

 

* 단막극 <윤회설>, <즐거운 우리집>은 방송대상 극본상 수상

 

  

 

 

박서림님 홈에서 글 한편을 옮겼습니다.

 

내 평생 TV 드라마는 40년에서

 4년(?) 정도 밖에는 쓰지 않았으니까 접촉이

 많았던 것은 탤런트보다 성우가 단연 많았다. 성우이면서

 탤런트인 연기자도 있지만... 내가 처음으로 대한 성우들은 당연히

데뷔작인 <장마루촌의 이발사> 에 출연한 성우들이다. 이 드라마에는

당시 한참 이름을 날리던 구민, 고은정, 정은숙, 김소원씨 등이 아닌

주상현(周尙鉉)씨와 임옥영(任玉英)씨가 남녀 주인공이었고

윤미림(尹美林)씨가 주인공의 깜찍한 누이동생

정숙역을 맡아 잘 소화시켰다.


 

주상현씨와 임옥영씨는 KY(기독교 방송)

출신으로 KBS와는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안다.  연출을 맡았던 박동근 선생이 새 바람을

넣기위해 그들을 발탁한 것이나 아닐까?

 

 

 

주인공 동순 역을 맡았던 주상현씨는 단신에 수더분한

 농부의 인상인데다 목소리도 텁텁했다. 동순의 애인 순영 역을 맡았던

 임옥영씨는 목소리가 맑고 단발에 인형같은 둥근 눈을 지닌 소녀였다.

 명동의 밤거리에서 문예계 직원과 함께 처음 인사할 때 발랄한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주상현씨는 연속극과 단막극에서 자주
 만났다. 개성

 강한 성격을 표현하는데 적격이었던 것이다. 연속극으로는

 TBC에서 방송한 <허무한 미소>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단막에서는

단골이다시피 출연하여 나의 작품을 살려 주었다. 특히 방송대상 극본상을 탄

<윤회설>에서는 부도덕한 사나이가 소(牛)가 되어 그 아들에게 물고문을 당하는

(도살하기 전에 근수를 늘이기위해 억지로 물을 먹이는)장면에서, "얘야. 나다 애비다!

내가 니 애비다!" 하고 외치지만 소의 울음일 뿐. 안타까이 통곡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는 후배 성우들이 입만 나불나불, 목에서 나오는 연기를 나무랐다.  목소리는

배에서 나오는 것도 모자라 발 밑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重厚)한

연기로 문학성 짙은 작품을 소화해 내는데 적격이었다.

 

그는 TV에도 출연하여 그 독특한 연기력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한운사

선생의 <아로운전>에 악명 높은 모리(森) 일병 역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순발력을 요하는 외화 더빙에는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장마루>에서 상대인 인구 역으로 나왔던

이창환씨는 더빙으로 밤낮 가리지 않을 만큼 바빴지만

그는 그러지를 못했던 것으로 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미리

 가있던 아우님의 권유 때문인지 그는 중년의 나이에

홀연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그를 아끼는 우리(작가와 PD중에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그의 이민을 아쉬워 했지만 적극적으로

막을 길은 없었다. 그는 아쉬워하는 나에게 <윤회설> 을 비롯한 기억에

 남을 작품들이 수록된 릴 테입을 가지고 간다고 했다. 생각나면 틀어 놓고

회상에 잠기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 자세한 소식을 모르고 지내고 있다.

그보다 앞서 오정한(吳丁漢)씨가 이민 가서 야채상을 하고 있다 했으니

 절친했던 그들인지라 서로 만나면서 우정을 나누고나 있는지..

나도 늙었으니 그들도 늙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임옥영씨도 그 후 내 작품에 여러 번 출연하기는

 했으나 주상현씨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도 한때 미국에 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한참 후 돌아와 만나곤 했는데 그 땐 이미

아줌마가 되어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지금은 어떻게나

지내고 있는지 묻혀 사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박서림선생님 홈에서 소개한 이장춘



<춘하추동 방송>의 이장춘 선생을 소개합니다.



이장춘 선생은 1963년부터

 공사가 될 때까지 kbs에서 기자, 피디로

 근무하셨고 공사창립시 기힉관리실 차장으로부터
본사 각국장과 제주방송총국장을  역임하셨습니다.
퇴직하고 사우회(社友會)에서  10년간 일하셨으며  
회원 600명시대로부터 2,000명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사, 부회장 감사등을 역임하셨습니다.
지금은 방우회 이사로 계십니다.

선생께서는 회원들간에 마음의

끈을 연결해주는 길이 없을까. 해서

<춘하추동 방송>을 장만하여 방송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 제공하고 계십니다. 고맙

게도 저에 대해서도 방송인물(129)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래의


브로그를 소개합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0917


 

김옥탁 선생님 글


선생님! 폭우가 쏟아지는 오후 집앞

도서관에 와서 오랜만에 들러 귀한 역사의

 기록들을 읽습니다.  오전에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 관련   책자들을 읽으면서 6.25직전 일선

지휘관들을 대거교체히고 그때까지 비상대기를 해제해

 많은 병사들을 외박 휴가보내고 6.24일 밤에는 장교회관

준공 파티를해서고위 장교들을 술취하도록 만들고   --과연

 이런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날수 있었을 까? 했습니다. 그러면서

해방의 기쁨도 잠시 채 피지도 못하고 숨져간   남과 북의 영혼

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선생님의 블로거에서 다시 한번

 역사를 읽으면서 늘 새벽 관악산 입구 과천교회에서

 내외분과 자녀분들의 강건과 평안하심을 기도

드리는   마음으로 더위에 건안하시길

기원하며 다녀갑니다



 

글 더 보기 영문자 클릭

 

 

드라마 윤회설과 장마루촌 이발사 박서림

http://blog.daum.net/jc21th/17781271

 

 

1987년 2월 16일은 우리나라에서 방송을 실시한지 60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해 방송의 날에 방송 공로상을 받는 모습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장마루촌 이발사 박재란-1.wma

 

 

 


장마루촌 이발사 박재란-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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