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라디오방송만 있던
그 시절의 방송편성과 방송실시과정
등을 강찬선 아나운서의 해설로 듣는다.
그 시절의 방송모습과 함께 윤길구, 장기범,
임택근, 김인숙, 윤영중 아나운서, 미국으로
건너가기전 세계적인 인기 보컬그룹 이난영의
딸들로 구성된 김씨스터즈와, 현씨스터즈 등의 모습도 볼 수 있고 조남사, 조한긍, 한기욱, 박상진, 조부성, 오사랑, 이상만 등 그 시절 많은 방송인들을 함께 볼 수 있는 귀중한 동영상이다. 프로듀서 조부성님이 턴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동영상중의 연출 오사랑 (조부성님 확인)
강찬선님은 1947년부터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까지 오랜동안 방송의 마이크를 잡고 오직
한길을 걸으시며 살다 가셨습니다, 라디오에서, TV에서
극장에서 본영화를 상영하기전의 대한 뉴스나 문화영화에서 강찬선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밤 12시가 되면 최소한 3개 라디오 채널에서 박진감있고 스테미너가 넘치는 님의 특유한 목소리 대북방송이 들렸습니다. 1964년부터 67년까지 VOA 목소리를 기억 하실 줄 압니다ㅣ
부산피난 시절 군복입은 강찬선님입니다.
아나운서 한길로 살다가신 강찬선 님
6.25전에 평양방송국에서 방송을
시작 했지만 6.25사변으로 일단 방송국을 그만 두시고 월남하시어1951년 부산 피난방송시절 아나운서 공개 채용시험이 있어서 이 시험에 합격하시고 들어 오셨습니다. 일세를 풍미한 임택근 아나운서를 비롯해서 황우겸, 이수열, 홍일점 정순향님과 함께 출발하셨습니다. 제가 방송국에 들어 왔을 때는 보직은 없이 방송관이었는데 강 과장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방송관이면 아나운서로서는 제일 높은 직급으로 아나운서 실장을 했고 그 이상의 직책을 맡으려면 행정서기관, 부이사관으로 직종이 바뀌게 되어 있었습니다.
방송관도 서기관 급이지만 과장 보직을
받으려면 일단 서기관으로 바뀌어야 했습니다.그때
아나운서 실장은 같은 방송관 직급이었던 임택근님이었고 방송과장은 서기관이셨던 장기범님이었습니다. 1964년 임택근님이 문화방송국 상무로 자리를 옮기시면서 이광재님이 아나운서 실장이 되었고 강찬선님은 미국의 소리 방송으로 떠났습니다.
강찬선님이 돌아 오면서 송한규 아나운서가
판견되었고 그 뒤를 이어 아나운서 실장이던 이광재
아나운서가 가면서 강찬선아나우서가 아나운서 실장이 되었습니다. 아나운서 실장이라는 보직은 1950년대 말 정동에 있던중앙방송국이 남산으로 옮기면서 제1방송과가 남산으로 옮기고제2방송과가 정동에 남았을때 제2방송과 아나운서실 실장직을 수행 한 이래 오랫만에 갖게 된 보직이었습니다.
1968년 방송 3국이 중앙방송국으로 통합되고 조금 뒤에 방송과장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스포츠중계나 대북방송의 논설 등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시면서도 보직운은 늦으셨지만 1970년
전후 아나운서실장, 방송과장을 하시면서 명성을
싸아 가셨습니다. 아래사진은총리와의 대화 프로그램으로 야외 녹화장면입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공을 세운 실세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이 들어서고
총리와의 대화 프로가 생길 때 이 프로그램의 사회를
보면서 신뢰를 싸으셨습니다. 1973년 공사가 발족 되면서 쟁쟁한인사들을 뒤로 하고 과장직급으로는 파격적인 공사 창립 이사가 되고 사원 연수를 맡으셨습니다. 님은 보직도 중요 하셨겠지만 현업에 많은 애착을 가지셨습니다. 언제나 방송마이크를 놓지 않있습 니다. 특히 대북방송의 "논설" 프로그램은 강찬선때문에 있었 다고 할 정도로 밀접 했습니다.누구도 박진감이나 설들력이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박헌영 비서를 지낸 적도 있는
방필주님이 오랬동안 집필한 논설 원고는
'라면' 글씨라고 해서 다른사람은 접하기가 어려운 글이
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비쁘셔도 이 논설만은 직접
하셨습니다. 방송시간도 1라디오에서 자정 시보가
나가고 이 프로그램이 이어졌습니다. 이시간을
박정희 대통령도 애청 하셨다더군요.
( 글씨는 羅麵 글씨라고 해서 지금의
싸인 팬 같이 두툼한 만년필 팬으로 라면처럼
쓴 글씨인데 강찬선님 밖에는 낭독을 못했습니다.
( 그 원고 남아있으면 방송박물관에
보관해야 할 것입니다. )
님이 방송 하던중 가장 섭섭하셨던 일은
대북방송 종료 맨트를 넣으셨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이 종료 맨트는 1972년 11월 10일 오후 2시 국제방송국부조정실에서 낭독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 방송 담당이던 제가 찍은 사진 이고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방송내용의 일부를 옮겨 봅니다.
'여러분들 에게 향하는 전파가 비록 멈춰졌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조국의 수도 서울의 맥박을
항상 느끼면서 유구한 우리 민족 역사의흐름 속에
살아가리라고 생각 합니다.' 중략 .........
강찬선 님에게는 이 방송의 중단이
마음에 너무도 허전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대북방송에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임해오셨을 뿐만 아니라
“ 논설 ” 같은 프로그램은 다른 사람이 하기도 힘들었고 양보 하지도 않았을 만큼 여기에 집착 하셨기 때문입니다. 방송을 끝내고 나오시면서 “ 이장춘씨 감회가 어때? ” 하고 물으십니다. 저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웃음으로 눈 인사만 했습니다.
1973년 공사창립 이사가 되었던 님은
1976년 이사 임기가 끝난 후에도 직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방송위원등의 이름으로 사회교육방송 등에 참여 하셨습니다. KBS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 뒤에도 방송은 계속 하셨 습니다. 1990년대에 KBS 이사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는 떠나셨습니다. 1987년 KBS사우회가 구성될 때에는이사로 참여하셔서 부회장을 거쳐 1995년부터 회장을하시던 중 1998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님은 방송과 함께 그리고 방송인과 함께 살다가신
2005년 제가 KBS회원님들에게 메일을
보내 드리면서 올려 놓았던 강찬선 ( 전사우회 회장 ) 님의
따님 강경화님 얘기를 같이 올려 봅니다.
특 이 사 항
비 외무고시 출신 국장 1호
위 사항이 인물데이타 베이스 맨 뒷줄에
쓰여 있는 한줄의 글입니다. 강경화님은 55년 생이니
우리나이로 보면 51세가 되는군요. 원래 유창한 영어실력과 맑은목소리로 국제방송국 영어아나운서 (국제국은 대부분 아나운서와 PD의 겸직임) 로 출발 했는데 국민의 정부 때 고급 관리로 발탁되어 이번에 외교 통상부의 주요 국장자리에 올랐다고 합니다.
다음은 인물 데이터 베이스를
그대로 퍼올린 것입니다.
직업 공무원, 외교관
직장주소 서울 종로구 도렴동 95-1
직장전화 (02)3703-2114 E-
인물평 빼어난 영어구사능력을 바탕으로
각종업무를 매끈하게 처리한다는 평
학력 사항 기간 내용 ~ 1973 이화여고 졸업 ~
1977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국 매사추제츠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 1984
미국 매사추제츠대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경력 사항 기간 내용 KBS국제국 프로듀서,
아나운서, 시사토론프로그램 진행자
미국 클리블랜드대 커뮤니케이션학과 조교수
세종대 조교수 1990 ~ 1998
국회의장 국제담당 비서관(3급) 1994 ~ 1998
세종대 인문대 영어영문학과 조교수 1995
베이징세계여성대회 비정부단체 대변인
여성단체협의회 국제관계 위원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이사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이사
1997 김대중대통령과 빌 클린턴대통령
전화통화 통역
1998 김대중대통령 미국방문 정상회담 통역
1998 ~ 1999 외교안보연구원 미주연구관
(부이사관급)
1999 ~ 2000 외교통상부 장관보좌관실 보좌관
2000.08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 국제기구심의관
2001 ~ 2005.06 駐 유엔대표부 공사참사관
2003.03 ~ 현 유엔 여성지위위원회 의장
2005.07 ~ 현 외교통상부 국제기구정책관 국장급
가족 사항 관계 이름 생년월일 근무처 직위
부 강찬선(康贊宣) 前 아나운서
배우자 이일병(李一昺) 1953.01.24
연세대 공과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차녀 이예지
장남 이준녕
상훈 사항 ▶
2003 올해의 여 동문상/
2003.05/연세대여자동문회
관련 기사 NO 제목 매체명 게재연월일 기고자
1 강경화씨, 비고시 출신으로 첫 국장 올라
조선일보 2005.07.01 권대열
2 유엔의 스타’;유엔 ‘여성지위위’의장 맡은 강경화
씨 조선일보 2003.04.26 김재호 |
아나운서 한길로 살다가신 강찬선 님
이 제목의 글을 쓴지가 벌서 9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군요. 글쓰기 시작하면서 쓴 글이라 미숙하기 짝이 없는 글이지만 誤, 탈자 외에는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그 글을 보려고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리 봐주셔요.
이성화 원로 아나운서님 글
아나운서클럽에서 윤영중님이랑 문복순님이랑 그 당시의 현역이셨던분들 얼굴이 떠오릅니다. 귀한 자료 취합해서 이렇게 좋게 꾸며주시는 춘하추동방송국장님 감사합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강경화 외교부장관 지명자 삶과 인생역정 http://blog.daum.net/jc21th/17783175
강찬선 아나운서의 평양방송 재직시절 회고담
http://blog.daum.net/jc21th/17780931
아나운서 강찬선 회고록, 부산방송 피난시절
http://blog.daum.net/jc21th/17780861
강찬선 아나운서 방송회고록 / 1964년, 미국의 소리 방송 (VOA) 부터
http://blog.daum.net/jc21th/17780932
아나운서 강찬선의 그 일대기(회고록 종합편)
http://blog.daum.net/jc21th/17780079
강찬선, 임택근, 황우겸 / 1951년 입사 동기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0813
1958년 KBS 아나운서 앞줄 왼쪽부터 1.송영필, 2.강익수, 3.장기범, 4.임택근, 5.박종세, 6.최세훈, 7.이규영,8.강영숙, 9.전영우, 10.황우겸, 11.유석춘, 12.강찬선, 13.김동만, 14.최계환, 15.최두헌, 16.문복순, 17.장금자, 18.유창경, 19.이광재, 20.한경희 21.김준철,22.최만린, 23.이현숙, 24.윤영중, 25.조영준, 26.이본 아나운서.
1957년 연말특집 아나운서 언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으로 앞줄 오른쪽부터 장기범, 민병연, 강영숙, 황우겸, 김인숙, 최세훈, 송석두, 윤영중, 이현숙, 장금자, 송영필, 뒷줄 왼쪽부터 박종세, 이광재, 임택근, 강찬선, 임동순, 문복순, 강익수, 최계환.
위: 1962년 9월 10일 KBS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동아방송과 동양방송이 발족하기 전이어서 뒷날 민영방송 아나운서 책임자가 된 박종세 임택근, 최세훈, 김인권 아나운서 등을 볼 수 있는사진이다. 전영우아나운서등 몇분은 그 기간중 군 복무 등 사정이 있어 참여하지 못했다. 아래 같은 사진 번호따라 1, 배덕환, 2 박종세, 3 이광재, 4 장기범, 5 강찬선, 6 임택근, 7 최세훈, 8 한경희, 9 최두헌 10 홍종선, 11 김주환 12 이규영, 13 길종휘, 14 유영옥, 15 이정희 16 최승일 17 김인권, 18 박노설 19 최정현, 20 인주희, 21 이규항; 22 송영규; 23 이병열. 24 송한규 아나운서
1938년에 방송국에 들어와 농구중계방송을 처음으로 개척한 이현님과 1957년 최초의 KBS프로듀서로 출발한 김영우님이 함께한 사진입니다.
박종국, 문시형, 임택근, 김창희, 방흥안님이 함께 했습니다.
제 6 회 방송문화상 1963년 1. 손석우, 2 박능상, 3 강찬선 4 임성희장관, 5 이운용, 6 고은정, 주태익님입니다
강찬선, 이현숙, 윤영즁, 문복순 아나운서 1.송석두, 2.이현숙, 3.문복순 4.강찬선, 5.민병연, 6.송영필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1958년 방송문화상이 발족하면서 장기범아나운서가 보도부문의 제1회 방송문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날 시상식이 끝난후 장기범 아나운서와 1.최계환, 2.강익수, 3.김인숙, 5.윤길규 방송과장, 7.문복순, 8.민병연, 9.강찬선, 11.이규영, 12.황우겸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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