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이광재 아나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이장춘 2011. 7. 16. 11:23

 

 

 

이광재 아나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전국에 계시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에서, 이광재가 중계방송

드리겠습니다.  그 방송 첫 멘트가 나오면 청취자들은

자신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트여 시원해지고 그 방송을 듣노라면

저절로 애국심이 솟아 오른다던 그 시절! 때로는 방송에서 흥분은 

금물이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방송을 들어야

 진짜 방송을 듣는  같다던 시절이었습니다.

 

 

 

 

다 같이 환호하고, 다 같이 즐기며

때로는 다 같이 안타까워하며, 국민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던 그 시절! 어려운 시절에도 방송은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지금도 그날의

억을 되살리는 청취자분들이 오늘도 춘하

추동방송 블로그를 찾습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포공항에서 박정희 대통령 외국 외국순방 실활을 중계방송하는 이광재 아나운서입니다. 

고흥복 엔지니어가 함께 했습니다. (사진제공 : 고흥복)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 이광재가 방송국에 들어온 것은 1956년

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이름을 날리던 임택근, 전영우,

 그리고 이광재 아나운서가 어쩌면 그리도 똑같이 시험을

 볼 자격도 갖추어지지 않은 대학교 2학년 재학 중 방송국

공개채용에 응시하고 그 재능이 인정되어 방송을 했던

분들입니다. 이 세분에게 똑 같은 얘기를 들었을 때

아나운서 재능은 특별히 타고나는가 보다.

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아나운서가 방송국에 들어오면

 5년 정도는 지나야 스포츠 중계방송이나 공개방송,

골든아워의 뉴스의 마이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관례가

되었던 시절에 2년 만에 스포츠 빅 게임의 중계방송 석에 않고

 4년 만에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출전한 16개 종목을

 모두 중계방송 할 수 있었던 아나운서가 바로

이광재 아나운서였습니다.

 

 

 

 

우리나라 올림픽 중계방송 역사는

 1948년부터 시작됩니다.1948년과 1952년에는

 민재호, 서명석 각각 한사람씩의 아나운서만 파견되었고

 1956년에는 장기범, 임택근 아나운서와 김성열 엔지니어가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이광재 아나운서가 파견된 1960년에는

임택근 아나운서와 김성배 엔지니어가 동반했습니다.

그때의 얘기는 이광재 아나운서의 회고담을 글

끝부분에 링크로 연결합니다.

 

 

남산방송국 정원에서 이광재, 장기범, 임택근, 최세훈, 강찬선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입니다.

 

 

1964년 장창선선수가 은매달을 목에걸고

가슴에 태극기를 단 김의태 선수가 시상대에 섰을때

목이터져라. 왜치던 이광재 아나운서, 북한의 세계적인 육상선수

신금단이 아버지 신문준을 잠시 만나고 해어지던 그 안따가운 장면을

묘사하던 이광재 아나운서, 그 방송을 들으며 국민들은 웃으며,

소리치며,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전 국민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그 하나된 마음이 힘이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건설된 힘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이광재 아나운서의 라디오 중계방송을

듣고 있노라면 대부분의 경기는 우리선수들이 이기는

경기였습니다. 중계방송을 들으며 늘 환호성을 올렸지요.

경기가 끝나고 판정이 내려 질 때면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청취자들은 국심판원망했고 우라나라의 국력이 약한 땃으로

돌렸습니다. 우리선수들이나 이광재 아나운서를 비롯해서 중계방송

아나운서에게는 늘 칭송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면서 "체력은 국력

이다". 를 웨치며 체육의 발전에 온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뜻하는대로 우리는 약소국에서 국력과 체력, 모두

세계적인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그시절 이광재, 임택근의 중계방송을 듣는

국민들은 즐거웠고, 희망이 있었고 그 아나운서는

 불세출의 아나운서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이광재

아나운서는 스포츠 중계방송에 힘이 실렸고 또 뉴스에 힘이

실렸습니다. 스포츠 중계방송은 어느 특정 종목이 아닌 전 종목에

 걸쳐 거침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황우겸 아나운서를 거쳐

박종세 아나운서의 전담 프로이던 야구를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전천후 스포츠 중계방송 아나운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광재 아나운서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제9회 

방송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방송문화상은

 그 시절에 방송인에게 주어지는최고의

영예로운 상이었습니다.

 

 

 

 

1964년 임택근 아나운서가 MBC로

옮겨가면서 KBS아나운서 실장이 되어 라디오

 전성시대에 모름지기 KBS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KBS 이광재, MBC 임택근, DBS 전영우, TBC 최계환 아나운서

 체제가 구축되면서 아나운서들의 불꽃 튀는 경쟁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가 아나운서 마지막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60년대가 저물어 가면서 미국 VOA에

2년 기간으로 파견되었지만 돌아오지 않았고

임택근 아나운서는 MBC의 상무, 전무가 되면서 현업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DBS 동아방송의 전영우 아나운서는 1980년

방송통합 때 KBS 통합 아나운서실장을 지내다가 학계로 전직했으며,

최계환 아나운서는 KBS가 국영에서 공영으로 바뀔 무렵 다시 KBS에 와서

 아나운서 실장을 했지만 이때부터는 TV방송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라디오방송이 차츰 방송의 안방을 내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오랜 세월 방송국의 얼굴이던

아나운서 전성시대가 점차로 바뀌었습니다.

 

이토록 라디오 전성시대와 아나운서

전성시대는 일치하는 것이었고 그 시대를

임택근, 이광재, 전영우, 최계환 아나운서가

마무리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이광재 아나운서 영면. 1950, 60년대 국민의 벗이었던 인기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1394

 

이광재 아나운서의 KBS시절 방송 회고록

http://blog.daum.net/jc21th/17780729

 

로마 올림픽과 이광재 아나운서의 중계방송 추억

http://blog.daum.net/jc21th/17780285

 

이광재 아나운서와 김무생님의 방송추억 (1)

http://blog.daum.net/jc21th/17781589


이광재 아나운서, 김무생 아나운서의 생생한 체험기록(2)

 http://blog.daum.net/jc21th/17781605


이광재 아나운서 백만인의 퀴즈관련 회고록

http://blog.daum.net/jc21th/17781212 


이광재 아나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http://blog.daum.net/jc21th/17780853




명성푸로지오 홍재운님  

불로그에서 글 한편을 인용했습니다.

 

 

8/6일 (2012) 아나운서 이광재

 

초등학생 땐 내 꿈은 아나운서였다.

백 TV 도 없고 동장집 앰프에서 선으로 연결된

 파란색 등근 스피커로 kbs만 듣던 시절이었다.    그때

아시아 농구 선수권대회.킹스컵 축구,메르데카배 축구를 할 때면

이광재 아나운서 중계방송을 했는데 방송내내 온 국민을 웃고 울렸다.

 ‘늦은밤 중계방송 들어시는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역만리 여기는

 **으로 시작하여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 "유희영 패스 신동파 슛 골인"

"치고나가는 정강지 패스 이회택슛" 그의 한마디 한마디 멘트,그가 기뻐하라면 우리는

기뻐해야 되었다. ‘온 천하에 펄럭이는 태극기 앞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우리

선수들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면 듣는 우리들은 다 울었다.

 

그땐 오늘같이 보수 진보도 없고.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김일성등 세뇌성

반공이념에다 가난할 때니까 오직 애국심 하나로 뭉친것 같다.

그런데 그 애국심을 앞에서 끌고 가는 게 아나운서였다. 어린 나이에 그걸

 들으면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설정도로 한국이란 국가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때부터 연필을 들고서 그 멘트를 노트에 적고 외워서

 맨날 아나운서 흉내를 냈다. 그런데 그기에도 경쟁자가 있었다.

 

나보다 키도적고 못생긴 대미 사는 정윤표란 친구,

이친구도 얄미울 정도로 흉내를 잘냈다. 그래서 둘이는 심심하면

교탁앞으로 불려나가 아나운서 흉내를 냈다. 나는 중학교 정부회장 선거에

출마하였서도 정견발표 대신 아나운서 흉내를 내면서 중계방송을 했다. 솜씨 좋은

 둘째형은 리시버로 들을수 있는 로케트 모양의 키트를 사다가 라디오를 조립하기도 했다

혼자 들을려고.. 중학교 들어가서야 서울간 형이 보내온 라디오같은 라디오를 보았다. 몸통보다

 더 큰 *'빳데리'를 고무줄로 친친 감아 뒤에 매단 *트랜지스터 라디오.그걸로 더욱 이광재 팬이 되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으로 분위기를 띄운 뒤 극적인 장면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온국민을 흥분

시킨 목소리. 중계방송만 듣고 있으면 경기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월등한 실력을 갖고 있고,

 게임에서 지면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 때문이라는 식으로 진짜 '애국적인 중계'를 했다.

혼을 뺄정도로 심금을 울려주었던 이광재 아나운서의 목소리, 모든 국민들에게 한

마음 한 뜻의 애국심을 불어넣어 주고,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에 용기와

희망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었다. 최근엔 TV중계로 방송도 해설도

수준이 그때와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향상 되었지만

그때의 라디오중계가 훨씬 정겹고 재미있었다.

 

치직거리는 잡음 섞인 목소리,

이런 방송조차도 잘 나오지 않아 팡팡 치고

이리저리 다이얼을 맞추느라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60년대 라디오는 나뿐만 아니라 그시대를 살았던

 누구에게나 제일 사랑받는 '친구'였다.

 

이광재. 나의 우상도 그때 그렇게 탄생되었다.

 

 

 

 

1958년 연말특집 아나운서 언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송영필, 강익수, 장기범, 임택근, 박종세,최세훈, 이규영, 강영숙, 전영우,

홍우겸, 유석춘, 강찬선, 김동만, 최계환, 최두헌, 문복순, 장금자, 유창경, 김준철, 최만린,

이현숙, 윤영중, 조영준, 이본, 이광재, 한경희 아나운서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이광재-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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