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아나운서 강찬선의 평양방송 재직시절 회고담

이장춘 2011. 8. 17. 03:51

 

 

 

강찬선 아나운서는 1947년 평양방송국
아나운서로 방송국에 들어와 평양방송국 분위기가
살벌 해 지면서 국립 예술극장으로 옮겨 일 하던 중 6.25를

맞았고 1. 4후퇴로 남하해서 피난살이를 하던중 1951년 KBS

아나운서 시험에 응모해서  다시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1983년 2월호 월간방송에 실렸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강찬선 아나운서의 평양방송 재직시절 회고담
 
평양방송에서 첫 출발 KBS와의 인연의 시초!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가속도가 붇는다는 것은
 실감나는 말이다. 바로 엇 그제 회감을 지낸 것 같은데 그로부터
어언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65세라는 늙은이가 되었다.   도무지 
수긍이  가지 않은 그러면서도 부인 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니까 내가 방송에 종사 한지도 40년이가까이 흘러갔다. 그동안,
방송원, 방송사, 방송관, 계장, 과장, 실장 그리고 KBS가 관영에서
 공영으로 뒤에는 이사, 방송위원 등 방송국에서 직위나 직명은
 많이도 바뀌었지만  오늘날까지 일개 아나운서로 시종 했다는데

대해서 후회는 없고 오히려 자신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이제 지난날을 회고하는 화재거리가 자연히 아나운서

생활을 중심으로 한 것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처음 방송에 투신한 것은 고향인 이북
 평양방송국이다. 해방된 다음해인 1947년 초……. 그때
평양방송국장이 중학시절의 은사였던 것이 인연이었다. 처음에는
 음악프로그램을 담당하는 편성원으로 방송합창단, 방송 4중창단을
조직 운영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주위의 권유에 따라 아나운서로 
전직하였다. 이제 35, 6년 전인 당시를 회고하면그때만 해도 방송국은
 비교적  자유스런  분위기였다. 하루의 방송이 끝나면 관현악
으로 연주된 구노의 “아배마리아”를내 보냈고 레코드
음악이나 독창, 합창 등 고서고금의 음악을

제약 없이 방송 할 수가 있었다. 

 

 이 열 명의 남녀 아나운서들 중.

책임자로 있던 전 모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당원들이었다.   그리고 서울의 표준어를
익힌다는 명분으로아나운서들은 서울방송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들을 수 있었다.  그서울의 아나운서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아나운서는 전인국, 윤용노
두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공산당 체제가
굳어지고 남북 대결상이 굳어짐에 따라
평양방송국의 분위기도 점점 살벌 해져갔다. 국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열성당원으로 교체되고 아나운서실에도
청진, 함흥 등 지방국에 근무하던 당원들이 몇 명 들어오고….
급기야는 아나운서들에게 서울 방송이나 일본방송을 듣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그때 우리들은 정확한 시보를 내기

 위해서 서울방송이나  일본 방송을 들으면서 시간을 맞추기

위한 구실을 내 세웠으나 시간을 맞추려면 모스코바

방송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발생한 것이 시간 오보사건

이었다.  시보를  담당한 아나운서들은 일부러

  2, 3초 틀린 시보를 내기가 일수였고 어떤 친구는

“정확한 모스코바 방송기준시간에 맞춘 시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국제 표준시간보다 3초

내외나 빠르거나 늦게 시보를 내 보냈다.

 
이것이 결국 평양 방송의 시보가 엉터리라는
소문이 퍼지고 공산당 고위층에서도 알게 되어 조사원이
나오고 야단법석이었다. 다급해진 아나운서들은 시보에 사용하는

시계가  고품이어서 정확하지 않다는 주장을 내 세우고…….결국은 시보로

 사용하는 타임워치를 몇 개 구입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거기에 아나운서들의 월남사건이 심상치 않게 발생하여 비당원인

아나운서들은 소위 불순분자, 자유주의 동요분자로
경계와 감시를 받게 되었다.
  

 

평양방송의 아나운서로서 탈북, 월남한

1번 주자는  홍양보씨다. 그는 해방 후 평양방송국

초기에 잠시 아나운서로 있다가 서울로 월남 서울 중앙방송국에

근무하면서 축구, 농구 등 스포츠중계와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의 국민장

의식을 멋지게중계방송해서 인기가 대단했다. 고 한다, 그는 6.25동란 때

일본 동경에 있는 VUNC (유엔군 총 사령부 방송)에서 몇 해 종사하다가

 VUNC와 함께 오키나와로, VUNC해체와 더불어 지금은 미국으로

 건너가 VOA(미국의 소리 방송)에 종사하고 있다.

 
그 다음이 장세균씨, 그는 월남하여
 KBS에도 종사했고 자유당 전성시기 내무부장관
비서실장이라는 요직에도 있었으나 지금은 무슨 사업을
 한다고 동분서주 하는모양이나 신통치 않은 것 같다.  다음에
 이여찬씨, 그는 월남하여 군문에 들어가 6.25때는 몇 번이고
 위기를 넘기고 육군 대령으로 제대, 지금은 서울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다음은 김광국씨, 이 김광국 아나운서의
월남은평양에 큰 충격을 안겨준 평양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어느 날  그는 느닷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특히 뉴스캐스터로 서울방송 아나운서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정평을 받아 오던 터이라 국장이         그의 사표를
수리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부터 방송국에

나오지 않고 몇몇 군대에 취직운동을 벌렸다.

 
신문사, 출판사, 학교 등 그가 취직을
의뢰한 곳에서 승낙을 받아   몇 일후 다시
 방송국에 나타나 사표를 제출해서수리 하고 전직
추천서를 써줄 것을 국장에게 의뢰했다. 그러나 국장은
 완강히 거절 하면서 사의를 번의하라고 타일렀다. 그러기를
수 3차.........그리고 그는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몇일 지난후 서울방송에서 심야에 이북 공산집단의 정체를 폭로
하는 대공방송이 전파를 타고      북한에 흘러 들어오기 시작
했고 그 방송의 담당자인 김자립이 바로 김광국으로 판명
되었다. 그리하여 방송국 또 한바탕 발칵 뒤집
히고, 고위층에서  진상조사를 하고…….


결국에는 전직 추천서를

써 주지 않았던 국장이란 사람이

 중앙방송국장이라는    영직에서 평양

근교에 있는 사동 탄광의 일개 사무원으로

전락되고 아나운서 실장은 멀리 청진

방송국으로 쫓겨났다

 

…….
중략..........
 
김광국 월남 사건으로 쫓겨난 국장,
실장 자리에는 방송인으로서 소양이나 인품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열성당원으로교체 되고 아나운서실에도
 당원증을 목에 건 작자들이 늘어나고, 심지어는 아나운서를
가장한 감시원까지 끼어들어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지고
끼리끼리 마음 놓고 농담하나 주고받을 수 없는 답답
하고 무시무시한 그 틈바구니에서 나도  빠져
나올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내가 옮긴곳이 평양 예술극장으로 
 당시 평양의 소위 예술극장이라는 것은 관현악단,

합창단, 무용단, 교향악단은 300여명의 규모였는데 음악,

예술가들의 집단이라 사람 잡는 악질공산당은 없고 특히 합창단은

지난날 교회 성가들의 출신이 대부분이어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아나운서나, 음악가나 정권을 거머쥔 공산집단의

선전도구의 구실을 하는 대는 매 한가지였다.

 

 

강찬선 아나운서의 딸 강경화님

 

 

 

 

2011년 현재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부대표로 재직중인 이화여고와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한 뒤 1977년 KBS 영어방송 PD 겸 아나운서로

근무했습니다. 1984년 매사추세츠 주립대에서 언론학

 박사가 된 후 세종대에서 영문학 교수로 지내다

국제전문가 특채로 1998년 외교부에

 들어갔습니다.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전화 통화를 통역한 게

계기가 돼 김 대통령의 영어 통역사로 발탁되어 주로

 대통령과 외교부 장관의 영어 연설문을 담당했습니다.

어난 영어 실력과 세련된 매너로 외교부 8년 만에

비고시 출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국장직인 국제

기구 정책관이 되었습니다. 이일병 연세대 교수

(58)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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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외교부장관 지명자 삶과 인생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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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한길로 살다가신 강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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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운서 강찬선 회고록, 부산방송 피난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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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강찬선의 평양방송시절부터 그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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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선 아나운서 방송회고록 / 1964년, 미국의 소리 방송 (VOA)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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