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방송

해방정국의 방송국, 미 군정청 접수와 방송고문단

이장춘 2011. 8. 2. 19:44

 

 

 

 해방정국의 방송국,  군정청 접수와 방송고문단

 

 

1945년 9월 15일! 한달간의 무정부 상태에서

어려움을 겪던 방송국에 무장한 미군이 예고없이 들어왔다.

미 군정청에서 방송국을 접수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로부터 빙송국은

미 군정하에서 방송을 했다. 9월 15일은 군정청이 일본의 방송국 간부들을

해임한 날이어서 우리방송인들이 직접 임원진을 선발한 날이고 건국 준비위원회가

일방적으로 구성한 내각명단을 발표하도록 강요한 날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

무장한 미군들이 덜어와 방송을 중단시키고 모든 방송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가 다음날 다시 불러들여 19시간이나 중단된방송을

 재개하면서 방송국은 미 군정에 접수되었다.

 

 

일제 강점기에하에서 방송을 했던 방송인들은

모두 물러 나겠다고 했지만 미군은 9월 7일에 발표한

포고령 1호 모든 공직자는 별명이 있을때까지 현직에 남아서

일하라는 그 내용을 들어 대면서 마음대로 그만 둘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방송인은 전문직종임으로 경력있는 사람들이 남아서 방송을 이끌어

가야 한다면서 다 같이 방송국을 운영하는데 힘을 기울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때까지 방송국에 근무했던 방송인들은 계속근무하게 되었고 10월

1일 모든 일본 방송인들이 해직되면서 한국방송인들과 고문관이 방송 감독자로 또는

협력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방송국에는 현직 대위 두사람과 중위 한사람이

 방송국장 고문관으로 일했고 또 각 업무분야벌로 고문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문관실이 따로 마련되었지만 1946년 3월 29일 부터 방송국이 군정청

직속 방송과로 되면서 부터  각 분야별로 함께 일하는것이

 좋겠다고 해서 각 파트별로 방송인들과한방에서

 일 하면서 호흠을 같이 했습니다.  

 

 
그때 방송국장이었던 이혜구 선생님 기록을 봅니다.
  

 

 

 

미국인 고문관실에는 유능한 캪튼 “퍼시빌”이
주석 격이고, 얼굴이 붉고 파잎을 물고 온화하고  주로
군정청시간 연출을 맡아보는 캪튼 “테일러” 도쿄스캪에서 와
 원래는 사후검열만 있고 사전검열이 없다는 것이지만 방송 전에
 뉴스제목을 대강 구두로 제출 받은 침착하고도 이해가 많은
 루테란트 “피커링” 그 외에 몇 미국인과 한국인
 통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 캪튼 “퍼시빌”, “테일러”.

“피커링” 3인은 서투른 영어 몇 마디로 우리

의사를 곧 짐작하는 이해력을 가졌고 당시 정당이

 수십 개 달하여 정계가 혼란 하였을 때 일을 민활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여 지금도 나뿐만 아니라 한국인

 직원은 유쾌한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혜구선생님의 글이었습니다. 

 

군정이 3년간이나 이어졌으므로 고문관도

여러차례 바뀌었지만 중요한 사항만 간추려보면 

국장 고문으로는  퍼시빌에 이어 윌슨, 엘른, 쁘라위트로

이어졌고 국장고문을 돕는 방송고문, 기술고문이 따로 있었으며

방송작가나 기술 실무자도 배치되어 3년간 생활을 같이 했습니다.

편성과에 배치된 고문관은 코르만, 레인지, 티이플님으로 이어지고

티이플 고문은 군정이 끝날때까지 오랬동안 재직하면서 교향악단을 직접

지휘하는등 여러분야에 힘을 기울였고 뒷날 VOA에서 일을 했습니다.

또 랜돌프씨가 작가로 있으면서 해뱡후 최초의 인기 어린이 연속극 

똘똘이 모험등 작품을 쓰기도 하고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제작

하거나 출연도 했습니다. 브라운이라는 여자 작가도

 있어서 간단한 대화극을 쓰기도 했습니다.

 

스무고개, 천문만답, 거리의 화재, 희망음악 등
이때 새로 생긴 프로그램들은 미국에서 방송음반을 가져다가

그것을 거울삼아 본보기로 만들어진 프로그램들 이었습니다. 현대화된

주간기본방송순서의 편성, 15분단위제실시, 프로그램사이의 간주곡사용,

음악과 음향 프로그램의 입체화 등 새로운  제도가 새로 시행 되었습니다.

 코르만 고문관은 기획과장이던  박경호님의 사위가 되었고 박경호님은

1949년 6월 미국연수를 갔다가  VOA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게 되셨습니다.

 

기술쪽의 고문관으로 있었던 포카드란 고문관은

뒷날 체신부 고문관으로 가 일하면서 연희송신소 50Kw출력관이

없어 방송이 어려웠을 때는 출력관을 공수 해다 방송을 할 수 있도록 했고

 방송기계부품이 부족 할 때는부평 보급 창고를 열어주면서 필요한

부품을 같다쓰라고 해서 자동차로 실어 오기도 했습니다.

 

동양 문화권에서 자라고 일본시절에
 방송을 시작해서 그 속에서 방송해온 우리방송인과
서양 문화와 함께 숨 쉬던 고문관 사이에는 생각의 차이가

있었고  때로는 우리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국가와 민족적인

 입장이 있어서 갈등을 빚을 때도 있었지만 우리 방송을 새로운

문화와 접목시키고  또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에 이리저리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미군이 처음 방송국에 들어오던 날의

표정을 당시의 이혜구 방송국장님의 기록이 있어

 참고가 될까해서 올렸습니다.  

 

(인공내각 발표 실랑이가 있고 난 뒤) 꾀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난데없이 미군 MP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총을

거머 쥔체 우당탕 밀려 들어와 한패는 지하실로 뛰어 들어가고

또 한패는 2층으로 뛰어올라간 것이 나의 눈에띠었다. 마치 노상에서

폭도들에게 쫓겨 방송국에 숨으려고 뛰어 들어온 것 같은 형세였다.

잠시 후 총을 겨눈 MP가 방송과로 들어오더니 불문곡직하고 안에

 있던 아나운서들을 방송국에서 당장나가라고 명령 하였다.

 윤길구 아나운서가 벗어놓은 양복을 가지러 가는데도

MP는 총을 그 등 뒤에 대고 따라 다녔다.

 

내가 아나운서들과 함께 현관홀에 나갔을 때
그곳에는 각 방에서 나온 직원들이 몰려 있었고 4명쯤 되는
MP가 한사람씩 내 보내고 있었다. 그는 기술과원에게는 조정판

 스위치를 끄고  내려오라고 일렀고 당분간 방송국 문을 닫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일렬로 서서 나가는 사람들에게 “류” 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일일이 물었다.

나는 “류”를 어떻게 쓰느냐고 MP에게 물었더니 그는 자기 수첩에 쓴 “LYU" 를 내 보여

주었으나 현관문을 나올 때 까지도 ”류“가 누구인지 몰랐다. 길에서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 살았다!“ 라는 말이 흘러 나왔고 소위 인민공화국

 각료명단 발표문제가 그렇게 뜻하지 않게무사히 해결 된 것을 천명이라고 기뻐

하면서 나의 우거로 동료들을 끌고 가서 술잔을 나눴다. 그때 그

주석에서 비로소 ”LYU"는 류가 아니라 “려” 라고

 읽어야 할 것을 알아 차렸다.

 

 

방송국에서 고문관들의 생활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숙소가 제대로

 있을 리가 없어서 응접실을숙소로 사용하다가 방송실 옆에

악기를 보관 해 두던그 방으로 옮겼습니다. 식사는 휴대용으로

 그리저리 때우고 잠은 잤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겨울에는 추워서

불을 안 때도 보온이 되는 방송실로 옮겨 생활하면서 잠을 자기도 했다.
방송실에서 버너를 이용해 휴대용식사도 만들어 들고 커피도끓여

먹으진동하는 냄새에, 화재 위험등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방송기술인 이종일님 기록중에서) 

 

 

 

 

참 고 사 항

 

 

1945년 9월 7일 미군이 진주하기에 앞서

맥아더가 한국 통치와 관련해  발표한 맥아더의 포고문 1호 내용

 

 

조선 인민에게 고함.

 

 

본관은 태평양 미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으로서 이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및 조선 인민에 대한 군정을 펴면서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

 

1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최고 통치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

 

2조 정부, 공공단체 및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보존하여야 한다.

 

3조 모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4조 주민의 재산권을 이를 존중한다.

주민은 본관의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의 직무에

종사한다.  5조 군정 기간에 있어서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하거나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영어 원문을 기본으로 한다.  6조 앞으로

 모든 포고, 법령, 규약, 조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될 것이며, 주민이 이행해야 할 사항들을 명기하게 될 것이다.

 

일본 요꼬하마에서 1945년 9월 7일

 

대평양 방면 미육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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