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2차 대전중의 방송 / 전쟁목적 수행을 위한 방송

이장춘 2011. 7. 20. 15:40

 

 

 

 
 2차 대전중의 방송 / 전쟁목적 수행을 위한 방송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2차

대전이 가까워지면서 방송을 전쟁목적 수행을 위한

 도구로 활용 해 가면서 이때까지 그런대로 할기를 띠던 연예오락,

어린이 방송도 차츰 위축되었고 가수나 배우도 전쟁목적 수행에 동원

되기 시작했습니다. 1938년, 국민정신 총동원령을 공포하고 인력과

물자등 모든것을 통제하는 소위 조선 육군 지원병령을 공포

그 취지를 방송에 적극 반영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우리말 전담방송인 제2방송에

일본어를 섞어 방송 하도록 강요 했습니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방송국을 물러난분이 그때의

제 2방송 책임을 맡았던 제 2방송과장 심우섭이었습니다.

그런대로 활기를 띠었던 연예오락 방송도 일본어 상용과 황국

신민화를 내세워 일본의 浪花節曲調 흉내닌 신가요니 야담등을

방송토록 하고 우리 고전음악인 창과 민요와 대중의 인기를 모아

가던 유행가등을 규제했습니다. 가수나 배우가 전쟁목적 수행에

 동원되면서 노래 부르는것을  그만둔 가수도 있었고 마지 못해

노래를 불렀던 가수는 뒷날 친일 논란에 휩 사이게 되었

습니다. 1977년판 한국방송사 P.77참조.

 

그때의 방송 프로그램은 소위 국민정신 진작운동에

 맞추어 특별 강좌를 수시로 방송하도록 하고 이른바 銃後미담을

주간정보시간에 방송 하도록 했으며 방송극(드라마) 역시 그런 내용에

촛점을 맞춰 나가도록 강요해서 전쟁목적수행이나 식민지정책 강화를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성인 프로그램은 물론 어린이 프로그램 까지도 그렇게 몰고

 갔습니다. 1940년 8월 부터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폐간되고  한글 혼용 신문은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만이 존재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은 추방당하고

외국방송을 들을 수 있는 단파수신기는 모두 몰수 되었습니다.

 


전쟁 중 하나밖에 없던 한글혼용 신문

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였습니다.

 

 1941년 12월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일본군의  힘이 미치는 모든 지역안의 방송국을 "大본營"

산하에 예속시켜 버렸습니다. (한국방송협회 발행 1997년 판

 한국방송 70년사)  일본  NHK가 전파관제를 사전에 준비 했다가

 진주만 침공과 함께 실행에 들어갔고 우리나라 방송에 대해서도 1942년

4월 27일부터 전파관제에 들어가면서 출력을 50Kw방송은 5Kw로 10Kw방송은

 1Kw로 출력을 의도하는 대로 낮춤과동시에  모든 방송국이 동일주파수를 썼습

니다. 이에따라 우리말방송은 제2방송의 더부살이를 하게되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방송을 들을 수 없는 사각지대가 늘어 났습니다.

 

 1943년 11월 10일 중단되었던 제2방송을

 다시 부활했지만 1080Khz단일 주파수로 방송했고 

1944년 3월 30일부터는 전국을 주야간 동일 주파수 관제로

 강화 했다가 1945년 2월 11일부터 전파관제 管區 변경에 따라 종전의

4군제를 6군제로 바꾸면서 제2방송의 전파발사는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해방될때까지 우리말 방송인 제2방송은 중단되고

제1방송의 더부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일본이 전파관제를 실시한

 주된 목적은 전파를 따라 연합군의 공습이 이루어지는 것을

 예방하고 외부의 방송을 차단하는 등의

 군사적 목적이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전파를 막기 위해  

서울시내 세 곳에서  방해전파를 발사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일어난것이 단파 수신사건이고  (단파방송 독립운동 편에 있음)

이 일로 방송인과 독립운동가, 라디오 부품 상회까지  350여명의 인사가

잡혀가 곤욕을 치루고 70여명이 형을 받았으며 20여명의 방송국

직원이 자리를 비우는등어려움을 겪었는가 하면 우리말

방송 전담 부서였던 제2방송부가  폐지되면서 우리말

방송이 한층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43년 하반기부터 방송국 언덕에 땅굴을 파고

비상방송시설을 만들거나 시내 요송에 비상시설을 갖추어

 방송국 본 연주소나 연희소신소에서 방송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지금의 덕수 초등학교 계단에 만든 비상방송국 시설로

 2평규모의 스튜디오 1개와 한평규모의 스튜디오 2개를 만드는 등 방송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종종 아래 사진이 경성방송국 건물인것 처럼 소개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 건물은 전쟁이 끝날 무렵 세워진

 비상방송 시설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 방송

 

김천애 봉선화.mp3

 

경성방송국에 1933년 4월부터 우리말 방송

전담채널이 새로 마련되면서 음악이나 방송극, 어린이

방송프로그램등이 활기를 띠었지만 교양 프로그램이나 뉴스는

제한적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뉴스나 해설 등의 보도 프로그램이

있는것도 아니고 사회 비평의 시사 프로그램이 있는것도 아니었습

니다. 대 내외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전달 해 주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늘 감시원을 두어서 일제가 허용하지

 

않는 방송은 가려지던 때 였습니다.

 

따라서 방송국에는 기자라는 것이 없었고
뉴스는 일본방송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방송하거나

동맹통신이라고 하는 일본정부의 통제 하에서 발행되는 통신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해서 방송 하는 것이었으며 당국에서 보내주는

소식을 그대로 베껴 전달 해 주는 것이 뉴스였습니다. 필요 할 때는 신문을

인용해서 방송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는 증권시장이나 기상대에

직통전화가있어서 쌀값이나 주식시세 기상통보를 전해주는

것이 큰 소식이었고 전기소식을 전하는 것도

중요한 생활뉴스였습니다.

김천애 봉선화.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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