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방송

2차 대전 중의 방송/ 방송연사들의 수난

이장춘 2011. 9. 11. 03:45

 

 

 

2차 대전 중의 방송/ 방송연사들의 수난

 

 

2아대전중에는 서춘( 徐椿)님등

방송에자주 출령하시던분들의 수난기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2차 대전이 본격화하면서

 방송편성과 내용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방송과나 방송부로

 불리던 직제도 하일단파방송의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가면서 아예

 제2 보도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일본에서 오는 방송이나 통신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방송하고 방송연사를 억지로 끌어내어 미리

작성된 원고를 읽게 하고 가수들에게는 전쟁목적 수행을 위한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했습니다. 방송편성은 방송국에서

 했지만 내용이나 연사동원은 총독부나 경기도

경찰부가 담당하다시피 해서 자기들이

 필요한 방송만 했습니다.

 

 

원고의 사전 검열을 실시해서 자기들

 뜻에 맞는 내용으로 만들었습니다. 필요 할 때는

 원고 자체를 총독부에서 직접 작성해서 연사들의 입만

 빌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생방송을 하던 시절이라 방송을

들으면서 감시를 하다가 만약 허용되지 않은 방송이 나가면 즉시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송에 출연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사람은 큰 고역이었습니다. 여러 이유를 대면서 

방송국에 나오지 않으려는 꾀를 내지만 그것이

 그리 쉽게 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명망 있는 사람일수록 방송국에

 더 끌려 나와야 하고 나오면 자기 뜻과는 다른

내용의 방송을 해야 되니, 끌려 민족을 배반하는 방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고통이란 이루 해아 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송에 나올 연사들은 여러 가지 꾀를 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폐간되기 전 조선일보가 주필을 지내다가 매일신보 주필이 된

 徐椿님이 방송국에 나와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1941년 진주만 사건이 일어나고

20여일이 지난12월 29일의 일입니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하고 승리에 도취되어 그 축하방송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방송을 하기로 되어있는 연사가 방송을

앞두고 축하연에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울 만큼 술을 마셨습니다.

 방송국 까지 나오기는 했지만 마이크 앞에서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아나운서는 시간이 되어 방송신호가 들어오자“지금부터 서춘 씨의

 방송이 있겠습니다." 라고멘트를 넣었지만 연사는 말이 없었습니다.

코를 골며 잠을 자버려 30분간의 방송은 펑크가 나고 말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총독부는 이 일을 흐지부지 넘겼습니다.

 

그 시절 방송국에서 근무했던 이덕근님의 기록을 보면

“하루는 고 모씨와 백 모씨가 끌려나와 방송연사 대기실에서

초조히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다. 두 분은 포로같이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고

불안에 가득 차 있었는데 방송이 끝나고 나서 일생에 한번 오점을 찍었다고 한숨 짖는

 모습을 보았다.... 중략..... 편성과에는 촉탁 같은 형식으로 와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때로서는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소속의 앞잡이 이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들은 대개의 경우 공갈로 명사들을 끌어내곤 했다.”고 했습니다.

 

 몇 가지 실례를 들었지만 일제강점기 더군다나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민족지가 폐간되고

해외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하면서 암흑세계를 만들고 일방적은

선전만을 늘어놓던 전쟁기간 중에는 극에 달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지금 살고 있는 분들이 그때를 얼마나 이해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때와는 양상이 다를 지라도 오늘날 북한 땅에서도 대부분의 방송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고 또 그때와는 비교하기 안 될지라도 극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해방된 나라에서도 그런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는 민주주의가 꽃피었으면 합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타향살이 고복수.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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